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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

 

울타리 앞에 밀집해 있는 기마무사 2,000을 향해 노부나가가 매복시켰던 1,000자루의 총포가 일제히 천지를 뒤흔들며 발사되었다.

 

순간 사방이 조용해졌다.

 

일발필도라 일컬어지는, 한 눈을 감고 겨냥하는 노부나가의 신식 총포. 그것이 한군데에 몰린 군사들에게 선을 보였다. 초연이 서서히 서쪽으로 흘러간 뒤 울타리에는 주인을 잃은 말만이 외로이 남고 사람의 수는 셀 수 있을 정도까지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공격을 재촉하는 우렁찬 북소리도 소라고둥 소리도 사라지고 없었다.

 

"철수하라!"

 

누군가가 외쳤을 때는 오쿠보 군의 창 끝이 일제히 울타리 밖을 향해 공격해 나오고 있었다.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이다. 미카와 무사의 싸움이다. 놓치지 마라."

 

꼼짝달싹 못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 카츠요리의 대에 이르러 신겐 시대를 지나치게 연연해하던 타케다 군은 전술면에서도 신겐 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동안에 무기는 칼에서 창으로, 창에서 총포로 바뀌었다. (하략)

 

- 『대망』 中 발췌

 

영화 <카게무샤>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나가시노(長篠) 전투를 묘사한 대목이다. 영화상에서는 카게무샤가 ‘풍림화산’ 깃발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상징하는 의미는 크다. 이제 전국시대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간 거다.

 

나가시노 전투의 원인은 신겐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1574년 5월 가쓰요리는 도쿠가와의 토토우미 지역의 최전선 기지인 다카텐진성(高天神城)을 함락했다. 이렇게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奧平定昌)를 나가시노 성에 파견해 가쓰요리를 방어케 한다. 사다마사는 원래 다케다 가문의 가신이었다가, 신겐이 죽은 뒤 도쿠가와에게 넘어간 이였다.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에 대한 개인적 원한(?)도 있겠지만, 나가시노란 지형 자체가 전략적이었다. 즉, 진출을 하기 위해서는 공략을 할 수밖에 없는 곳이란 소리다.

 

나가시노의 위치 자체가 다케다와 도쿠가와의 세력권이 맞닿는 곳이었고, 평지가 끝나고 산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했다. 즉, 다케가의 입장에서는 산지를 빠져나와 평지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였고, 반대로 도쿠가와 쪽에서 보자면 다케다군을 저지하고,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다케다가 ‘진출’을 생각한다면, 나가시노로 나가야 했다. 다케다의 진출을 막겠다면, 도쿠가와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는 이곳에서 다케다를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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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나가시노 전투에 기기묘묘한 ‘전략전술’이 등장한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전근대’와 ‘근대’가 붙었고, 근대가 이겼다.

 

① 노부나가의 신식 총포. 그것이 한군데에 몰린 군사들에게 선을 보였다. 초연이 서서히 서쪽으로 흘러간 뒤 울타리에는 주인을 잃은 말만이 외로이 남고 사람의 수는 셀 수 있을 정도까지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② 카츠요리의 대에 이르러 신겐 시대를 지나치게 연연해하던 타케다 군은 전술 면에서도 신겐 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동안에 무기는 칼에서 창으로, 창에서 총포로 바뀌었다.

 

소설 ‘대망’에 나와 있듯이 나가시노 전투는 한 시대의 ‘종말’을 증언했다.

 

“근대의 등장”

 

이라고 해야 할까? 노부나가는 철포를 대량으로 준비해 기마군단을 박살낸다. 중세 유럽의 기사가 몰락한 원인 중 하나였던 ‘화약무기’의 활용이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무사의 기술’이 대량생산 된 보병용 무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진 거다.

 

한 시대의 종언이다. 여기에 대한 부연설명이 더 아프다. ‘신겐의 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렇다. 당시 다케다 군은 ‘강병’으로 유명했다. 영화나 드라마, 여러 매체에서 등장하는 붉은색 갑옷의 다케다 군은 ‘귀신’ 그 자체였다.

 

이 붉은색 갑옷의 다케다 군을 만든 건 요시노부의 스승인 오부 토라마사(飯富虎昌)였다. 20세기 초반까지 ‘붉은색 계열’은 남자의 색깔이었다(20세기 초반까지 적색 계통, 핑크색은 남자의 색을 상징했다. 남자 아이들도 핑크색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전투와 피의 상징이었던 붉은 색은 그 자체로 ‘강함’의 상징이었다. 이 붉은 색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는 군대는 다케다 군에서도 정예로 분류된 병력들이었다(실제로 붉은색 군대를 ‘만드는’ 것 자체가 돈이 많이 들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붉은색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희귀 광물에서 염료를 축출해야 했기에 붉은색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이 붉은 군대는 말 그대로 ‘질’을 의미했다.

 

실제로 다케다 군은 ‘질’의 군대였다. 산악병의 전투력은 평지에서 사는 병사들의 그것을 압도했다. 다케다 군 1명이 오다 군 3~4명의 전투력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이 질이 철포 앞에서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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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묘사처럼 이미 시대는 ‘근대의 힘’으로 넘어간 상황임에도 가쓰요리는 전근대의 방식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 싸웠다.

 

객관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다케다 군의 총 병력은 15,000명.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의 총 병력은 38,000명이었다. 게다가 이미 오다 연합군은 진을 치고, 거마창(拒馬槍 : 기병용 방어 목책)을 둘러치고 있었다. 진을 치고 기다리는 두 배 이상의 적군에게 싸움을 건 것이다.

 

물론, 기병의 위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송사전(宋史筌) 요열전(遼列傳)을 보면, 금나라 기병 17명(궁기병 포함)이 송나라 보병 2000명을 학살한 기록이 나온다. 기병의 무서움이다.

 

아마도 가쓰요리는 무적의 다케다 군단의 신화를 믿고 있었던 것 같다(아니면, 막연한 ‘희망’을 말이다). 문제는 대 기병용 목책과 두 배가 넘는 병력으로 먼저 요충지를 선점한 병력에 대한 선제공격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겐의 부하였던 역전의 명장들은 입을 모아 철퇴를 말했다.

 

“이 전투는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이대로 돌격했다가는 모두 다 전멸입니다! 훗날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쓰요리는 전투를 강행했다. 이 전투를 통해 다케다 군은 거의 10,000명의 전사자를 만들게 된다(기록에 따라 다르다. 불과 1,000명의 손실만 있었다는 기록부터, 7,000명의 손실을 봤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병력적인 손실보다 더 뼈아픈 건 역전의 용사인 숙장(宿將)들의 손실이다. 다케다 4명신이라 불렸던 이들 중 3명. 그러니까,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전사했다(이들 모두 철퇴를 간청했었다). 그리고 신겐이 자랑했던 다케다 24장 중 대부분이 이 전투로 전사하게 된다. 다케다 가문의 몰락이다.

 

전술적으로 특별한 기동이나 기기묘묘한 술책이 동원된 게 아니라, 오로지 힘대 힘으로 맞붙은 전투였기에 그 실패는 더욱 더 뼈아팠다. 이제 더 이상 다케다 군단의 위용은 통하지 않는 거였다. 전투의 방식이 달라진 거였다. 아니, 시대가 바뀐 거였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나가시노 전투의 개괄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매체에서의 ‘나가시노 전투’와 실제 역사상의 ‘나가시노 전투’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차이? 아니, 의문점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나가시노 전투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

 

첫째, 오다 노부나가가 3단 철포 진형을 사용했는가?

둘째, 다케다 가문이 자랑하는 기마군단의 돌격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3천정의 철포를 준비해 3단으로 병력을 쪼개 연발사격을 했다. 맨 앞열이 발사를 하고, 두 번째 열이 뒤이어 쏘고, 세 번째 열이 다시 쏘고, 그 사이 재장전한 첫 번째 열이 돌아와 사격한다.”

 

일단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이런 3단 사격이 가능하려면, 매치락(Matchloc : 화승식) 머스킷이 아니라, 플릭트 락(Flintlock : 수석식, 부싯돌로 격발) 머스킷이어야 한다. 화승총,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조총’은 불이 붙은 심지로 화약을 격발한다. 이렇게 불을 다루는 상황에서 밀집된다면, 상당히(!!) 위험하다. 불꽃이 어디로 튈지 어떻게 장담하나? 결정적으로 일본의 조총은 사수 오른쪽으로 폭발이 분출된다. 즉, 발사할 때 점화약을 담은 화문에서 불이 튀어서 옆으로 나간다는 거다. 그렇다는 건 역시나 ‘밀집대형’을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거다(나폴레옹 시절의 라인배틀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쏘는 방식은 어렵다는 뜻이다).

 

즉, 이 당시에 오다 노부나가가 상당한 양의 철포를 준비해 사용한 건 맞지만, 3단 사격 형태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어디까지나 사족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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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가문의 기마군단에 대해서는 ‘근원적인’ 의문을 가져야 하는데, 조선시대... 아니, 한반도에 있었던 많은 국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말이 과하마(果下馬)이다. 중국 대륙에서도 과하마란 존재가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과하마는 말 그대로 과일 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는 말. 즉, 작은 말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개마무사들도 이 말을 타고 싸웠는데, 산을 능숙하게 타고 내리며, 개갑(鎧甲 : 미늘갑옷)을 입힌 상태에서도 힘차게 잘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의 말들도 대부분 체구가 작은 말이었다. 대부분은 체고(體高)가 140센티미터가 안 되는 작은 말이었다. 물론, 작은 말이라고 해서 기병으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당시 일본에서는 거세마란 개념이 없었다. 경마장을 다녀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말의 성질을 죽이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 말을 거세시키는 거였다. 집단적으로 돌격을 해야 하는 기마군단이라면, 말의 성질을 죽이고 기수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조련을 해야 하는데, 거세를 시키지 않고 조련하는 건 꽤 어렵다. 아울러 중요한 게 이 당시 일본 말에는 편자를 박지 않았다. 편자란, 일종의 말 신발이다. 편자가 없다면, 발굽이 빨리 마모되어 제대로 달릴 수가 없고, 말도 발굽이 신경 쓰여 움직임에 제한이 있다. 물론, 당시 일본에서는 말 짚신을 신기는 방법으로 말발굽을 보호하긴 했는데, 이게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고구려에서도 과하마를 가지고 잘 싸웠던 걸 보면(이 당시 과하마가 중국이 생각하는 과하마가 아니라 다른 종자의 말일 수도 있지만), 일본의 작은 말이 기병돌격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 우리가 영상매체로 보는 ‘다케다 군단’의 웅장한 기병돌격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