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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 길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스스로를 엄정하게 돌아보면 재주가 없는 편에 속한다. 운동 신경은 전반적으로 나무늘보 수준이고, 손으로 뭘 만들거나 하는 능력은 화성의 물보다 없으며, 당구나 게임은 지진아 수준으로 허덕이다가 결국 포기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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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수능란한 사람들이 보면 그것도 재주라고 비웃을 수준이긴 하지만 가뭄에 콩 같은 재주가 있다면 “내가 아는 노래는 기타로 반주할 수 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아하게 기타를 뜯는 수준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어설픈 코드 잡기로 악보를 보지 않고 가락 맞춰 주는 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별것 아니지만 다들 술 취해서 목소리 커지고 하면 꽤 유용한 놀이 도구가 될 수 있다.

 

1999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데일리 프로그램을 할 때였는데 짝을 이룬 작가랑 죽이 맞아 술을 자주 퍼마셨다. 방송 끝내고 그다음 주 일정이 여유가 있었던 ‘불금’의 날이었다. 작가 두엇이랑 종로의 유명한 고갈비집에서 막걸리를 진탕 마신 후 2차를 갔다.

 

허리우드 극장 근처의 2층 민속 주점이었는데 거기에 기타가 있었다. 두 그룹 정도가 있었는데 다들 술에 젖은 목소리로 돌아가며 노래를 하는 분위기였다. 작가가 노래를 하겠다고 나섰고 마침 아는 노래라 뚱땅거리며 반주를 해 줬는데 그게 취객들 눈에 띄었다.

 

이 노래 아느냐 저 노래 아느냐 하는데 한 팀은 연세 대학교 어느 학술 동아리의 40대 OB팀이었다. 다른 한 팀은 나이 고희쯤 된 노인들이어서 대충 ‘겐또가 서는’ 노래들이었고 몇 곡 함께 했더니 가요무대 판이 벌어져 버렸다. 왕년의 운동권 노래부터 트윈 폴리오, 이별의 부산 정거장까지. 술값까지 내준다는 통에 더 열심히 한 건 안 비밀.

 

합창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독창 분위기로 흘렀다. 음치 대마왕도 있었지만 뜻밖의 구성진 목소리도 있었다. 그렇게 신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노인들 팀에서 한 명이 일어섰다. 나에게 “이건 아나?” 하면서 물어본 노래가 최희준의 <하숙생>이었다. C 코드로 시작하면 어설프게 짚을 수 있다 싶었는데 그분의 목소리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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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노래란 게 잘 부른다 못 부른다를 넘어서 자신을 통째로 실어 부른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분의 노래가 그랬다. 이마에 주름은 작대기 네 개 병장을 넘어섰고 목소리는 쉴 대로 쉬어 있었지만 잡담 하나 하는 사람 없이 모두가 노래에 집중했으니까.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대목에서는 얼핏 울먹이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목소리가 떨려 나왔고 그 북받침이 다시 ‘인생은 나그네 길’ 대목에서 다독여질 때 함께 처연해졌고 마지막은 다들 따라 불렀다.

 

노래도 부르다 보면 지친다. 더 이상 손님도 찾지 않는 여름밤. 아니 새벽에 가까운 시간, 갓 서른의 남녀와 마흔 줄의 중년들, 일흔 어간의 노인들은 한데 어울려 남은 술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노인 그룹의 하나가 우리 자리로 왔다. 몇 번 술을 주고받은 후 오늘 무슨 모임이시냐고 물었더니 아까 <하숙생>을 부른 노인의 부인이 얼마 전 죽었고, 장례 후 친구 위로차 모인 모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덧붙인 얘기.

 

“저 자식, 인생이 진짜 드라마야 드라마.”

 

무슨 드라마냐고 심드렁하게 물었는데 이내 귀가 곤두섰다. 그 아저씨가 얘기를 구수하게 하기도 했거니와 사연이 정말 기구해서 말이다.

 

“저 녀석은 삼팔따라지야. 이북 어딘가에서 꽤 잘 사는 집 아들이었는데 빨갱이들한테 다 빼앗기고 쫓겨 내려왔지. 우린 여기서 한 놈 빼고 다 전쟁에 나갔어. 노래 부른 놈 말고 저기 자는 놈. 저 화상은 부잣집 아들이라 돈 주고 뺐어. 노래 부른 놈은 백골 부대 출신이야. 죽을 고비 열두어 번은 넘겼지. 우린 어찌어찌 후방에 있었어. 전쟁 끝나고 제대했지만 뭐 부모도 전쟁통에 병 걸려 돌아가셨고 사는 게 다 그랬지 뭐. 아등바등 살았지. 저 친구는 역시 전쟁통에 혼자된 처자하고 결혼을 했어. 응. 이번에 돌아간 여자. 70년대 중동 붐 때 저 친구도 중동에 나갔지. 그런데 이 여편네가 바람이 난 거야. 우리도 아는 동네 남자였지. 아니 뭐... 진상은 모르지. 여자는 남자가 강간한 뒤에 계속 그렇게 된 거라 했다는데... 몰라. 문제는...”

 

그 뒤 얘기는 정말 황망했다. 중동에서 돌아와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그와 바람이 났다는 남자를 모두 칼로 찔렀다. 둘 다 중태에 빠졌지만 살아났고 남자는 교도소로 갔다. 그 옥바라지를 한 건 부인이었다.

 

온갖 쌍욕을 들으면서도, 울며불며 돌아오면서도 부인은 남편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친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으니 갈 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출소한 뒤에도 남편은 부인을 몇 번이나 집에서 내몰았지만 부인은 악착같이 집 대문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고 한다. 결국 둘은 헤어지지 못했다.

 

나이 마흔 넘은 살인미수 전과자는 취직할 구멍이 없었고 거의 살림은 여자가 챙겼다. 그 풍파 많은 집에서도 잘 자라 좋은 대학 나와 번듯한 직장 다니고 근사한 신랑감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던 외동딸이 그만 범죄의 희생자가 돼 죽고 말았다.

 

그 후 부인은 정신줄을 놓았다고 한다. 남편이 중동에서 돌아온 이후 평생을 죽어 살던 부인에게 딸은 정신적 기둥이자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딸 때문에 악착같이 집에서 버티고자 했고 남편의 주먹질을 받아냈고 더러운 년이라는 욕설을 참아 넘겼던 거라고 했다. 척추가 꺾이고 뼈가 녹아버린 연체동물 같은 삶은 오래가지 못했고 부인은 몇 달 전 죽었다.

 

“부인이 가면서 그랬다네. 미안하다고. 자기는 딸 따라가겠다고. 그때 저 녀석이 술 취해서 막 그러더라고. 그냥 만나지 말걸, 왜 만나서. 태어나지 말걸, 왜 태어나서. 그냥 그때 칼질할 때 죽어 버리지 왜 살아서... 쟤는 이제 또 전쟁 직후처럼 혼자가 됐지. 돌고 돌아서 말이야. 인생이 뭔지. 사는 게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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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은 극적이다. 흥미진진하고 굴곡 많은 드라마냐 막장 드라마냐 아니면 사람들이 하품하면서 보는 스테레오 타입의 드라마냐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우연 같은 필연과 필연 같은 우연의 씨줄과 날줄로 우리 운명의 옷감을 짜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노여움의 사대문 사이를 누비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돌아와 혼자만의 거울 앞에 서서 쓸쓸하게 읊조리게 되는 것도 같다.

 

“사는 게 뭔지 참.”

 

그날 술자리를 파하고 지하철 첫차 시간을 가늠하며 종로 바닥을 걸을 때, 그 노래를 들어보긴 했지만 잘 몰랐다는 서브 작가는 가사를 알려 달라고 했다. 요즘처럼 검색이 되는 시대가 아닌지라 띄엄띄엄 가사를 불러 줬는데 가사를 음미하던 그녀는 뜻밖의 질문을 해 왔다.

 

“왜 제목이 <하숙생>인가요?”

 

"글쎄. 세상이 다 하숙집이고 우리는 거기서 잠깐 하숙하고 떠나는 존재다. 뭐 그런 뜻 아닐까?”

 

더듬더듬 대답을 했는데 서브 작가는 또 예상외의 응답을 해 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하숙생은 맞는데 그래도 남는 건 있잖아요. 우리 하숙집 아무개가 사법 고시 패스했다... 여기에 누가 살았다... 그런 건 남잖아요.”

 

생뚱맞은 소리에 한바탕 웃음을 내질렀던 기억이 난다. 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거야? 하면서. 이름조차 희미해진 서브 작가는 요즘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하숙생이지만 그 후배들에게, 또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뭔가를 일궈 냈을지 궁금해진다. 최근 별세한 최희준 선생이 비록 빈손으로 떠나셨으나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우리 손아귀에 남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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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고 죽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그 아름답고 추하고 슬프고 통쾌한 삶의 여울목들에 찬사를. 마지막으로 원로 가수 최희준, <하숙생>의 가수 최희준 님의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