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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교적 간증 스타일의 도입부가 떠올라 그렇게 시작해본다. 미즈 마블, 현재는 캡틴 마블인 캐릭터 캐럴 댄버스에 혹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코스튬 때문이다. 그렇게 입문한 캐럴 댄버스 캐릭터는 멋졌다. 강인하고, 여유롭고, 유머를 알지만, 추진력이 있었다. 캐릭터를 알수록 코스튬은 좋아하는 이유 순위에서 추락했다. 내 아이패드로 구매한 마블 만화의 대부분은 1대 미즈 마블인 캐럴 댄버스와 2대 미즈 마블 카말라 칸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캡틴 마블과 미즈 마블은 마블코믹스의 캐릭터 중 나의 최애캐였다. (비록 DC의 배트맨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 캡틴 마블 영화를 기대했다. 감독이 '하프 넬슨'을 만든 감독들이어서 더욱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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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깨졌다.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퀄리티와 기대와 전혀 달라 신선한 방향의 영화였다. 

 

영화 <캡틴 마블>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그동안 쌓아온 클리셰 전개를 뒤섞었다. 그래서 영화는 기원을 다뤄야 하는 첫 영화지만, 기원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캐럴이 자신의 기원을 찾고 재구성한다. 과거를 찾고 임무를 완수하려 지구에 온 캐럴은 닉 퓨리를 만난다. 사실상 지구가 초행인 캐럴과 당연히 외계인 방문자가 처음일 퓨리는, 이런 식의 만남에서 늘 봐왔던 클리셰 - 지난한 의사소통 코드 맞추기 -를 거의 가지지 않는다. 목적을 명확하게 공유하고, 서로 도우면 이득이 될 것을 이해하고, 프로답게 협력한다. 그래서 쿨한 전개와 버디물 유머가 가능해진다.

 

제작진들은 장르를 깊이 이해했다. 전형적인 스토리에 전형적인 진행을 포기하고 속도감과 밀도를 높였다. 클리셰가 있었다면 편안한 감상이 가능했겠지만 그만큼 지루했을 것이다. '하프 넬슨'을 만들었던 감독들은 대신 이렇게 얘기한다. "지루한 요소는 뺐어. 그러니 긴장 늦추지 말고 계속 따라와. 보여줄 게 아직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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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귀여웡...

 

볼 거리는 분명 많다. 고양이, 아니 고양이의 탈을 쓴 위험동물 구스의 귀여움과 활약은 엄청난 씬 스틸러였다. 원작에서의 이름은 츄이였고 츄이는 캐럴이 기르는 외계 고양이였다. 가끔 캐럴이 이런 농담을 하던 게 기억난다. "츄이, 문 바깥에 있는 무례한 남자는 잡아삼켜도 돼."

 

이름이 바뀐 이유를 이 늙은 팬보이가 상상을 해본다. 작중 시간이 90년대다 보니, 후속작에 나올 고양이의 이름이 츄이가 되고, 설정상 구스의 자식이거나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를 이은 고먐미 쇼가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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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용맹해...

 

이렇게 등장 요소의 뒷면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빠진 10덕후를 위한 서술 트릭도 있다. 주드 로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극초반 내내 의도적으로 보일 만큼 언급되지 않는다. 그가 지휘하는 소대의 소대원들 이름이 모두(가오갤 1편에 먼저 등장했던 코라스는 제외하고) 언급될 동안 지휘자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개봉전 정보에서도 주드 로의 배역이 무엇인지는 노출되지 않았다. 그래서 덕후들은 캡틴 마블의 아이덴티티를 물려주는 선배 히어로 마-벨이 아니겠냐고 짐작했다. 실제로 극초반 주드 로의 배역이 캐럴을 지도하는 모습은 '아아 마-벨 맞구나' 싶은 서술이었다. 하지만 중반, 지구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캐럴이 그를 '욘-로그'라고 지칭했을 때 나라는 10덕후는 무릎을 쳤다. '아아 이런 트릭이구나! 그럼 주드 로가 메인 빌런 포지션!’ 물론 곧 일반 관객들도 알 수 있게 욘-록의 실체가 드러나긴 하지만 조금 더 아는 자는 조금 더 일찍 진실을 아는 쾌감을 느낄 수 있게 한 장치다. 오직 10덕후만 아는 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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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로그는 마-벨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원작 캐럴 댄버스의 기원은 이렇다. 크리 제국의 슈퍼히어로인 마-벨이 빌런 욘-로그가 지구에서 벌이려는 테러 공격에 대항해 싸우고, 결전 끝에 욘-로그의 장비가 폭발하고, 폭발의 결과로 인해 전투장소에 있었던 캐럴의 신체에 마-벨의 DNA가 침투한다. 그렇게 캐럴 댄버스는 반지구인-반크리인이 되어 슈퍼파워를 얻는다.

 

이것이 영화에선 이렇게 변주되었다. 욘-로그에 의해 마-벨이 죽던 장소에 캐럴이 있었고, 마-벨의 장비가 폭발하면서 그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은 캐럴이 슈퍼파워를 얻는다. 캐럴의 능력을 탐낸 욘-로그는 자신의 피를 수혈해 캐럴을 반지구인-반크리인으로 바꾼다. 3인의 전투, 폭발, DNA 변형이라는 요소만 남기고 그 연관성을 뒤틀었다. 재미난 변주를 기대하고 있던 덕후를 만족시키는 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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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주는 또 있다. 클라이맥스 전투 직전 성층권에서 집중포화를 받은 캐럴은 지표면까지 자유낙하한다. 원작에서 이는 캐럴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하는 일이다. 성층권까지 올라가서, 모든 능력을 끄고 자유낙하를 하다가, 충돌 직전에 다시 날아오르기. 이럴 때 나오는 미소는 10덕후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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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램보 모녀. 개봉전, 램보 성을 단 등장인물의 이름이 마리아인 것을 보고 의구심을 가졌다. 원작에서 캐럴과 연관된 램보는 마리아가 아닌 모니카다. 영화를 봤더니 모니카는 마리아의 딸이고, 마리아의 절친인 캐럴의 조카다. 아주 작은 변주.

 

모니카 램보는 원작에서 지구인 슈퍼히어로다. 캐럴이 마-벨을 완전히 계승하여 미즈 마블의 이름을 버리고 캡틴 마블의 이름을 쓰기 전에 잠시 캡틴 마블 이름을 쓴 적이 있다. 캐럴의 친구이며, 아이덴티티의 역사가 겹치니 서로 투닥거리기도 한다. 이럴 때 캐럴은 Captain Whiz-Bang이라 불리며 모니카는 Lieutenant Trouble(말썽쟁이 중위)이라고 불린다. 모니카의 이 별명이 영화에서도 불린다. 그때의 짜릿함이란 10덕후만 안다. 아마도 후속작에선 90년대에 10대였으니 2010년대에는 장성한 모니카 램보가 등장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니카의 다른 히어로 네임인 '포톤'이 어머니 마리아의 전투기 콜사인 별명으로 잠시 지나간 게 보였다.

 

제작진이 원작을 깊이 이해했다. 변주는 해야 하지만 원작을 파괴하거나 무시하는 수준의 변주는 하지 않고 주요 요소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변주 속에서 살짝살짝 팬서비스를 내보인다. 만족스러운 영리함이다.

 

클리셰를 생략하여 얻은 속도감, 그로인해 더 많은 씬이 들어갈 수 있어 풍부해진 서사의 밀도, 설정을 뒤트는 한편 기둥은 건드리지 않는 영리함. 여기에 좋은 연기와 잘 뽑힌 대사와 고급진 CG가 더해진다. 액션은 합이 오가는 재미가 덜하지만, 캐릭터의 능력 특성상 광원 효과 떡칠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

 

여기에 잘 소화된 페미니즘까지. 캐럴이 욘-로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성장했음을 표현하는 클라이맥스의 대사는 정말 좋은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으로 모든 갈등이 끝나는 처리 또한 상징적이다. 부당한 가해자에게 정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원더우먼에서 보여주었던, 두 남녀의 관계 변화와 그들의 대화가 함축했던 지점과는 다른 방향의 페미니즘 담론이 숨어있다. 세련된 처리다.

 

이번 영화에서 캐럴이 모니카의 멘토 역할을 하는 모습을 아주 잠깐 보기도 했는데, 2대 미즈 마블인 카말라 칸의 영화화가 결정되었으니 그 모습을 향후 또 볼 수 있겠다. 이후 장성한 모니카 램보에게도, 그리고 이후 등장할 카말라 칸에게도, 캐럴 댄버스는 좋은 멘토가 될 수 있다. 이건 중요한 활용 가능성이다. 마블에는 DC의 원더우먼에 비견될 만한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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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우먼은 DC에게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이용을 제대로 한 역사가 짧아서 그렇지. 첫 등장 때부터 부여받은 설정 요소로 인해 성상품화로도 페미니즘으로도 이용이 가능한 다층적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를 써본 경험이 있는 DC 편집부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서 블랙 카나리, 배트걸, 슈퍼걸 등의 후속작도 정착시켰다. 드라마 슈퍼걸의 1 시즌은 여성 멘토/멘티의 관계 측면에서 주목할 만했다. 미숙한 남성이 등장해 친구와 멘토와의 관계와 연애 경험 등을 거치며 성장하는 하이틴 성장드라마의 공식에서, 주요 인물들을 여성으로 바꾼 것만으로도 신선함을 주었다. 그만큼 여성 중심의 서사는 많지 않다. 소년들이 동일시할 슈퍼히어로는 많지만, 소녀들이 동일시할 슈퍼히어로는 그보다 턱없이 적다. 그나마 마블에는 더욱 적다.

 

그래서 마블 편집부는 지난 몇 년 동안, 아이언맨/캡틴아메리카를 잇는 차세대 중심 리더 캐릭터로 캐럴 댄버스의 캡틴 마블을 밀어왔다. 만화 쪽에서는 잘 쳐봐야 반쪽 성공이었지만, 영화 쪽에서는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환으로 캐럴의 공군 시절 별명이 '치즈버거'에서 '어벤져'로 바뀌었다. 캐럴은 첫 중력 테스트를 받기 전 점심으로 치즈버거를 먹었는데, 미 공군은 중력 테스트를 받으며 토하는 음식을 파일럿의 별명으로 정해준다는 루머(?)가 있다. 그래서 캐럴의 파일럿 별명은 치즈버거가 되었는데... 캐럴을 차세대 메인으로 밀어줘야 할 사명이 있는 영화에서는 어벤져로 바꿔 어벤져스 프로젝트 개념에 영감을 준 인물로 탈바꿈시켰다.

 

케빈 파이기가 원더우먼의 성공에 고무 받았던 이유는 캡틴 마블 영화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짐을 덜었을 것이다. 모회사인 디즈니에 가서도, 원청사인 마블코믹스에 가서도, 어깨에 힘 좀 더 줄 수가 있겠으니 축하드린다. 브리 라슨도 가짜뉴스와 음해에 마음고생 그만하시라(아마 했을 거야... 아마...). 이제 소녀들의, 아니 그냥 모든 팬들의 우상이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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