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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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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째 삼일절을 앞두고 북미 정상 회담이 있었다. 북한의 국방위원장인 김정은은 60시간 열차를 타고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대한민국의 언론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의 상승 요인이 될 만한 뉴스는 의도적으로 외면한다는 말도 있다. 그래도 이건 보도해야 할 사건이다. 뉴스를 보면서 대한민국이 지금은 섬처럼 고립되어 있지만 대륙의 일부라는 걸 깨닫는 사람들이 생길 것 같다. 지금도 배와 비행기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일부에게만이다.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순간에는 나머지 구성원들의 세계관도 확장된다.

 

충분히 희망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공포로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소수의 이익에는 반하지만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 삼일운동 백 년은 평화의 원년이 된다. 임시정부 수립 백 주년도 그런 의미를 얻는다. 지난 정권에서 일제 침략기를 역사에서 누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건국절을 논란거리로 만들었다. 누락된 역사에 공과 과를 물을 수 없다. 원균의 후손이 권력을 가지고 조상 원균을 맹장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원래는 있었겠지만 혼인으로 4대쯤 섞이다 보니 우리나라의 지배층에 친일파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드물다.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리 참담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렬이 전쟁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희망은 남아 있고 시간을 끈 만큼 되도록 결실이 풍성하기를 바란다. 자본주의 사회는 계속 성장해야 유지될 수 있다. 주변국들은 성장 동력을 잃었다. 일본은 전쟁 특수를 기대하거나 변화를 거부하는 입장으로 보인다. 다른 주변국들도 새로운 시장과 성장 동력을 거부할 것 같지는 않다. 희망적인 관측을 포기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살아온 이력에 호의적인 믿음을 가지고 지켜본다. 나는 국가의 내집단에 포함된 기억이 별로 없기에 그렇게 국가주의자도 되지 못한다. 다만 처지가 비슷한 이들에게 감응하는 편이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의 힘없는 개인들과 다른 국가의 처지가 다르지 않은 국민들에게도 전시체제보다 평화가 이익이다. 어쩌면 합리주의자에 가깝다.

 

북미 정상 회담을 깬 것은 아무래도 트럼프다. 트럼프는 나르시시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공격적인 언행은 가끔 의도적이다. 정말 미친놈은 기업을 운영하거나 미국 대통령 자리에 앉지 못한다. 권력에 취해 미쳐 버린 독재자들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박근혜도 야당 대표를 할 때는 괜찮은 구석도 있었다. 특히나 경제 사범 이명박의 도덕적 해이를 공격할 때는 다른 당의 의원들보다 선명하기까지 했다. 공격성을 보이는 인물에게 집단은 심리적으로 의존하곤 한다. 리더의 공격성이 우리라는 내집단이 아니라 외집단에게 표출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수렵 채집 시대로부터 인류에게 각인된 것이다. 외부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공격성이 내부 구성원을 향할 때는 서열 유지의 정당성이나 피해자에게 이유를 찾는 합리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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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나르시시스트는 영화 아폴로 13호의 원작자인 제프리 쿠르거가 지은 책이다. 타임의 수석편집자라니 그가 직업에서 접하고 다루는 정보의 양을 짐작한다. 책에서 나르시시스트로 트럼프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런 이유로 책을 고르지는 않았다. 책을 내고 주변에 반응해 잠시간 심리 상태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후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반응들이다. 나라는 사람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필명으로 책이 출판된 것 하나만으로 시선이 조금 바뀌고, 바뀐 시선에 반응한다. 고양감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지난주에 쓴 글을 되짚어 보았다. 서울에서 친목 모임처럼 출판 기념회를 열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왜 많지도 않은 그들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물론 약간의 심적 부담도 있었다. 되갚아야 할 선의에 부담감은 당연하지만 그 선의를 폄하할 자격은 나에게 없다. 세상에 당연하고 마땅한 것은 없다. 부산에서 올라온 산이랑님. 전주에서 올라온 아톰님. 자리를 마련한 투아웃님. 초상화를 그려 주신 초하류님. 술을 즐기진 않지만 사랑하는 애니원님. 두리번님. 친구를 데려오신 콩쥐님과 친구분. 아이디를 밝히지 않던 무명님. 소녀님. 그리고 스무 권의 책을 들고나오신 주관적 지향님께 감사드린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살면서 갚을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갚겠다. 만약 기회가 닿지 않는다면 타인에게 갚겠다. 선의가 물결처럼 이어져 그들과 연관된 사람에게 닿기를 바란다.

 

몇 번 눈에 띄던 책을 잡았다. 지식의 첨단에서 미지의 경계를 넓히는 전문가들의 글도 가치가 있지만 기존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한 단어들이 어렵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전문가들의 언어를 번역해 주는 에디터들의 글이 좀 편하게 읽힌다. 다윈주의적인 관점과 정신분석학 저자 개인의 경험이 버무려진 책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소시오패스와 겹치는 부분도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타인을 부속물이나 목적이 아닌 도구로 인식한다. 공감 능력에서 소시오패스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무심코 바라본 타인의 고통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바라본 타인의 고통은 이해한다. 발달한 영상 장치로 보면 뇌에 공감 능력이 활성화되는 부분이 있다. 소시오패스는 평소에 그 부분이 활성화되지 않지만 타인을 이용할 목적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활성화된다. 사기꾼들이 공감 능력을 이용해 신뢰를 쌓고, 신뢰를 바탕으로 인생을 무너뜨릴 범죄를 저지른 다음 피해자를 조롱하는 이유다. 이런 구조의 사고 회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곳간을 지킬 대표자로 사이코패스를 선출하기 쉽다.

 

경쟁이 치열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공 루트를 타기에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편이 확실히 유리하다. 학생 시절부터 친구의 고민과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함께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보다 그 시간에 냉정하게 자신을 위해 투자한 사람이 성적이 좋게 나오고 성공하기 좋은 사회다. 그런 과정을 거친 엘리트들이 그들의 눈에 패배자나 낙오자로 보이는 이들을 보듬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웃게 된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 내 속 짚어 남의 속이다. 속담은 별다른 교육 과정을 거치지 못한 조상들이 삶으로 체화한 지식이다.

 

성장기 적절한 유대감 형성도 중요하지만 소시오패스는 유전적 요인이 더 작용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환경적 요인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나르시시스트로 산다는 게 적당하다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기애나 인정 욕구가 많아야 유리한 직업군이 있다. 정치인, 그룹이 아닌 가수, 코미디언등이다. 자기애나 인정 욕구가 부족한 사람이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은 심리적 위축을 가져온다. 그 상황을 즐기고 오히려 고양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평화 시기에는 대중의 응축된 힘을 한 방향으로 이끌고, 위기 상황에서는 구심점이 된다.

 

인간의 사회는 복잡하게 발전해서 여러 가지 성향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개미 사회가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일꾼 개미와 병정 개미들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한 무리에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모양이 다른 개미는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나뭇잎을 자르는 개미와 나르는 개미와 그 개미의 머리 위에서 기생 파리와 싸우는 더 작은 개미는 한 어미에게서 난 한배의 자매다. 인간의 사회는 발전에 따라 적성과 성격을 만들어 냈다. 나르시시스트도 그중 한 가지다. 개미처럼 외양으로 구별되는 것은 없다. 덜하고 더하고의 차이가 있다. 그중 자기애와 인정 욕구가 강한 대신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라고 칭한다. 다른 말로 바꿔보면 자존감이 강하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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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생명은 자기중심적이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지 못한 생명이 대를 이어 가며 생존할 수는 없다. 포유류에서 임신에 성공한 수정란은 모체의 유전자와 다른 부계의 유전자를 감춘다. 태반은 이질적인 유전자를 공격하는 어미의 면역 체계에 저항하는 막이다. 태아는 자신의 생육을 위해 어미의 뼈를 녹여 자신의 골격을 만들고 영양 물질을 흡수하기 위해 고혈당 상태로 유도한다.

 

이런 태아의 생존 본능을 기생충과 비교하는 발언들도 있다. 연가시나 개미의 뇌를 잠식하는 기생충도 있지만 먹이 사슬의 정점에 이른 동물의 기생충은 대체적으로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태아는 기생충보다 심하게 어미의 몸을 소모한다. 때론 고통스러울 그 시간 이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대를 이어 삶을 추구하는 생명은 출산의 고통 이후에도 양육에 시간을 투자한다. 인간은 그 시간이 특히나 길다. 철저하게 이기주의자로 태어난 사람의 아이는 자라면서 공감 능력을 학습하고 충동 조절 능력을 익힌다.

 

각자의 유전적 차이도 있지만 긴 시간의 양육 과정에서 조금씩 변이가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천재는 무언가에 뛰어난 사람을 일컫지만 다른 부분에서 그만큼 결여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감 능력이나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도 일정 부분 타고나는 부분과 학습으로 성장하는 부분이 각자 다르다.

 

지나친 나르시시스트는 대인 관계가 불편하고 어렵다. 저만 잘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문 법이다. 그렇지만 나르시시즘은 질병이 아니다. 체지방처럼 지수로 표현한다. 몸에 지방이 많다고 병은 아니다. 오히려 지방이 전혀 없는 육체는 면역력이 부족하고 건강이 위험하다. 지방이 일정 부분을 넘어서면 다른 질병의 원인이 된다. 유전적 체질에 따라 위험 수위는 다르다. 자기애와 공감 능력도 그렇게 이해했다. 지나치게 자기애가 많으면 타인과 교감을 못하고 공감 능력이 너무 뛰어나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면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린다. 미싱 시다들의 고통에 공감한 스무 살 재단사 전태일은 돈을 모아 좀 더 나은 사업체를 만들지 않았다. 그녀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죽었다.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으니 단순히 생물학적으로는 실패한 삶이다. 그러나 선뜻 그를 실패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동의한다. 그 세계는 굳건하지 않다.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 세계는 수십억의 세포와 그 수와 버금가거나 훨씬 많은 미생물들의 군집이다. 장내 미생물의 균형이 달라지는 것만으로 사람의 성격이 변하기도 한다. 장염에 걸려 삼일 연속 설사를 하면서 밝게 웃으며 나라 걱정과 인류 평화에 이바지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은 그 지경이 되면 주변 사람도 챙기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장염에 걸린다는 것은 식중독균이 장에 들어와서 번식을 하는 것이다. 인간과 공생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식중독균은 장의 적당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맹렬히 번식한 다음 장을 제어하는 유전적 구조를 복사해 설사를 유도한다. 몸의 균형이 무너진 그 과정에서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그런 약한 개인들이 모여 사회적 집단들이 만들어진다. 개인에게 지나친 자기애의 발현과 공감 능력의 부족을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면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국가주의나 인종주의 정도로 표현될 것 같다. 사람에게는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려는 습성이 있다. 오랜 수렵 채집 생활의 흔적이다. 내집단과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의복, 머리 모양, 문신이나 심하게는 신체 일부를 변형하기도 한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언어와 문화라 일컫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와 동일한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고 충실하려 한다.

 

인류가 인식하는 내집단의 크기가 점차 확장되는 추세이긴 하다. 언젠가는 지구 차원의 세계 정부가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진화적으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집단의 크기는 작다. 그러면서 큰 무리의 일원임을 자각할 때 안도감과 충만감을 느낀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역사가 그리 긴 것은 아니지만 쉽게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특히나 가까운 곳에 군국주의에 가까운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먼저 국가주의를 버려한다고 주장하기가 어렵다. 평소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나도 일본의 행태를 보면 국가주의가 생성된다. 집단의 구성원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의 관계도 상호적이다.

 

개인의 의식이 양배추나 양파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나의 심지 위에 생존 욕구, 동물적인 욕망, 경험에서 얻은 교훈 위에 살면서 추구해야 할 가치 같은 것들을 겹겹이 외피에 두르고 있는 것 같다. 표면에 드러나는 의식은 그만큼 상처받기도 쉬워 변색되고 퇴색된다. 멍들고 으깨진 양배추의 외피나 말라비틀어지는 양파 껍질처럼 변한다. 시간의 흐름과 상황 변화에 따라 변해 버리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 변해 버린 건 그 나름대로 심층 의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수많은 생각 중에서 선택받은 의식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그 선택의 결과로 누구는 범죄자가 되고 누구는 긴 시간 우리가 기억하는 의인으로 남는다. 인간이 패턴을 인식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조금 다르겠지만 집단 의식도 개인 의식과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집단 구성원의 맨 안쪽에 묵묵히 생존 욕구를 위해 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개인적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대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집단의 의지로 투영하려 한다. 삶이 단순하지 않고, 개인들의 복잡한 삶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단단해진 집단 의식이 단순할 리 없지만 가끔 복잡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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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국가 기념일 행사를 티비로 보면서 이런 형식적인 의식들이 때론 우리로 구분 지어진 우리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집단 의식의 방향성을 잡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도 방향성이 예측 가능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니 국가 기념일 행사도 지켜보고 있다. 행사 마지막에 대학생 대표 20명에게 횃불을 나누어주었다. 411일 임시정부 수립일까지 전국을 순회하고 다시 모일 것이다. 때론 개인이 흔들리는 의지를 잡아가는 것처럼 집단 의지를 형성하기도 한다.

 

반대하는 세력도 있겠지만 되도록 411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은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으면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동족상잔을 거치며 자학적으로 굳어진 집단 의식을 치유하는 의미도 있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과도하면 타국민이나 인종 비하로 이어질 수 있지만 부족해도 문제가 생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조금 더 민족적 자긍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북한과 전쟁으로 인한 통일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임시정부 수립일을 정책적으로 기념해야 한다. 고려 시대 서희가 거란과의 담판을 통해 강동육주를 양보받은 것은 고구려의 고토에서 발흥하여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거란에게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고려는 건국 이념과 국호에서 고구려의 계승 의지를 보였다. 건군 75주년을 기념하는 북한에게 건국 70주년은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협업과 협상에서 누군가는 조금 더 양보를 하기 마련이지만 국가의 기원과 이념을 정립하지 못하면 순간적인 이익으로만 판단한다. 순간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판단하고 결정하다 보면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설정하기는 요원하다.

 

제대로 정립된 국가관과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착취나 사기를 치지 못한다.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대접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존감을 갖춘 국민들이라면 자본과 노동 문제도 큰 틀에서 해소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일을 하며 뭉친 등 근육이 쉬는 동안 풀리면서 근육통을 겪는다. 일에 비해 적은 보수나 근육통보다 불편한 것은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사회 구조와 인식이다. 그 인식이 소비자의 아기들을 죽이는 제품을 판매하고도 뻔뻔한 기업을 낳았고, 그 제품을 광고하고도 부끄럽지 않은 방송인들을 만들었다. 돈을 받고 제품의 안정성을 입증한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 국민은 조금 더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파카한일유압의 부당한 정리해고 이후, 대법원의 판결이 나기까지 1334일이 걸렸다.

세상에 큰 뉴스 많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딴지 필진 범우는 이에 맞서 투쟁한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본인의 성격처럼 꾸준히, 그리고 묵묵하게.

 

그와 그의 가족에게 참으로 무거운 날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재화를 생산하던 노예의 다른 이름이다.

근로자는 착한 노예. 노동자는 불순한 노예.

 

 

이 시대 노예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고 때론 발버둥치고, 때론 포기하고,

때론 관조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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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일기(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