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필독 추천18 비추천0

 

 

 

 

 

날라리 왕 헨리가 국정을 장악하고 파악해 친정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때는 앤과 연애를 하는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앤은 헨리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영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다, 왜 권력을 놔두고 잠자는가?

 

당신은 잠자는 사자인가. 깨어난 사자인가?

 

앤의 속삭임에 헨리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울지를 의심했다.

 

‘울지 저 양반은 나의 신하인가, 아니면 교황의 신하인가?’

 

07-2.jpg

 

진실을 말하자면 울지는 자기 자신, 자신의 야망의 신하였다.

 

1529년, 인내심의 끈이 끊어진 헨리 8세는 드디어 울지를 해임했다. 중앙 정계에서 쫓겨난 울지는 권력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권력 성애자였다. 그는 왕과 왕비의 이혼에 최선을 다할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었다. 헨리 8세가 아니라 다름 아닌 앤 불린에게 빌었다. 그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그녀였다.

 

앤은 울지의 항복을 즐겼지만 소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러자 울지는 편을 바꾸기로 했다. 드디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고 말았다. 그는 이번에는 캐서린 왕비에게 가서 충성 맹세를 올렸다.

 

“여왕 폐하를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캐서린과의 연합. 이는 곧 스페인과의 연합이기도 했다. 울지는 로마 교황정은 물론이고 스페인 황실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앤 불린이 아버지의 현금을 이용해 정계와 궁궐에 자신의 사람을 촘촘하게 깔아놓은 후였다. 울지의 편지들은 앤의 그물망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반역죄로 체포됐다. 요즘으로 치면 ‘압수 수색’을 당했다.

 

헨리 왕은 울지의 막대한 영지와 부정부패로 얻은 수입, 그가 누렸던 권력의 정도를 맨눈으로 확인한다. 모두가 왕인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수도원과 교회 소유의 막대한 영지와 수입의 실체도 확인했다. 너무 많았다.

 

수도원과 교회의 수입은 주교, 대주교, 추기경을 거쳐 최종적으로 교황에까지 상납된다. 하지만 이건 영국의 왕인 내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꼭 내 것이 아니더라도 이거, 국부 유출이 아닌가?

 

0200902c8f6974257d4cec603da281b9.jpg

 

왕 헨리가 의회를 압박하자 의회는 재빨리 울지를 반역죄로 고발, 탄핵했다. 반역죄라는 게 외환법 위반과 왕에 대한 배신이었는데 한마디로 터무니없었다. 외교는 물론 교황청에 기름칠을 하는 것까지 울지의 몫이었다. 왕이 위임한 ‘업무’였는데도 따지고 보면 외환법 위반이긴 했다. 따지고 보면...

 

울지는 생존 본능을 발휘했다. 모든 재산을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한다는 조건으로 참수형만은 모면했다. 참 똑똑하다. 추기경에게는 합법적으로 상속을 해 줄 ‘정식’ 처자식이 없다. 꼼수야 얼마든지 있지만 지금 그게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목이 잘리면 어차피 무주공산이 된 재산은 왕실이 쓸어가게 되어 있다.

 

죽고 바치느냐, 바치고 사느냐.

 

울지는 당연히 사는 쪽을 택했다. 그는 돈과 권력을 모두 잃고 시골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권력에서 낙오된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유배길에 화병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차기 교황을 꿈꾸던 추기경은 영국의 시골길에서 객사했다. 그의 유언은 미묘하다.

 

“내가 왕에게(세속적 욕망에) 충성한 시간과 노력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들였더라면 이런 최후는 오지 않았을 텐데.”

 

절절한 후회, 종교적인 죄책감이 물씬 묻어나는 유언이다. 헨리 8세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는 억울함도 스며있다. 그의 장례를 치르려고 옷을 벗겨 보니 웬걸, 고행대를 차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세상에 권력욕의 화신 울지가 사실은 고행대를 차고 죄인 된 몸임을 주님께 고백하며 살았었다니...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었다. 토머스 울지는 놀랍게도 일백프로 세속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종교인이 되겠다고 출가했을 때는 신앙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끝없이 타락했지만 순수했던 시절의 의무감을, 단 한 조각은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앤 불린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녀는 전리품으로 궁궐을 선물 받았다. 이후로 이 궁은 왕의 여름 궁전이 된다.

 

원래는 울지의 대저택 겸 집무실인 ‘요크 플레이스’였다. 울지는 돈을 아끼지 않고 저택을 지으면서 세간의 눈총에 시달렸다. 영국에 있는 그 어떤 건축물보다 훌륭했으니까. 물론 궁궐을 포함해서 말이다.

 

“저 양반 저거 미친 거 아녀?”

 

“왕이 가진 것보다 귀한 보석은 숨길 수나 있지. 세상에 하늘 아래 왕의 처소보다 더 대단한 건물을 자기 집으로 짓고 있다니...”

 

다 짓고 나니 너무나 화려해서 울지도 쫄았다. 그래서 울지는 헨리 8세 앞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왕의 존엄을 드높이는 일을 제가 대신했사옵니다. 언제든 근처를 행차하실 때면 마음껏 이용해주십시오. 이곳은 폐하께 언제나 개방된 행궁이옵니다!”

 

Hampton-Court-800-x-400-2-800x400.jpg

 

이 궁전의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다. 헨리가 앤 불린을 위해 3년 동안이나 리모델링해서 선물해 줄 때는 ‘화이트 홀’로 개명했다. 이곳이 그 유명한 ‘햄프턴 궁(Hampton Court)’이다.

 

헨리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한창 금슬 좋은 부부일 때, 울지는 대저택을 지으면서 왕이 올 때마다 모실 공간에 특별한 석재 장식을 해놓았다. 문간의 석재 아치 왼쪽에는 석류를 장식했다. 오른쪽에는 장미 문양을 장식했다.

 

석류는 캐서린의 친정인 스페인 왕가의 상징이었고 장미는 튜더 왕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앤을 위해 증축된 공간에서는 헨리의 H와 앤의 A가 사랑의 매듭으로 합쳐져 있는 문양이 보인다. (헨리는 앤의 목을 자르고 나서 H&A 문양을 모두 지우라고 명했다. 그러나 인부들이 실수로 지나쳐 문양 하나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아무튼, 애니웨이.

 

왕이 교황의 특사이자 추기경을 작살내다니. 폭풍 전야였다. 캐서린은 열심히 기도했다.

 

429264295_f0ed19f76f_b.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