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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이 우이동의 절 화계사 근처에 있었다. 방학 때 종종 서울에 올라와 며칠 머물곤 했는데 그즈음 들은 얘기.

 

“대통령이 한신대학교를 너무 싫어해서...”

 

아마도 서울대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빨리 접했던 대학의 이름인 듯 싶다. 큰집 근처에 있었던 한국신학대학교는 당시 유신 체제의 권좌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매우 괘씸하고 골치 아픈 종기와도 같은 학교였다. 자잘한 것 같지만 몹시 아프고 확 터뜨려 버리자니 곪을까 두려운 종기.

 

취임식 중 제멋대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한 ‘장로님’ 이승만 대통령 이후 한국 기독교는 신과 구를 막론하고 정권에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굴종의 세월을 거쳐 1970년대에 접어들고 박정희 정권이 점차 본연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기독교 역시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며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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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원주 교구에서 정부의 부정부패 반대 시위가 터져 나오고 정부가 강경 조치를 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직격탄을 퍼붓는다.

 

“이 법은 북한(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유신이 선포된 뒤 개신교 쪽도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의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유신 다음해 부활절은 신구교 연합 행사였고 여기에 일부 목사와 전도사들은 “사울 왕아 회개하라”,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전단을 뿌리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지만 무위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극동의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사울 왕보다 훨씬 집요하고 잔인했다. 이때의 시위 준비를 빌미로 “부활절 예배 장소에 모인 10만여 군중을 4개 방향으로 유도, 방송국을 점거하고 이어 중앙청을 비롯한 관공서 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는 등 내란 음모를 기도했다”는, 이른바 ‘남산 야외 음악당 부활절 예배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뻥튀기를 자행한 것이다.

 

이제 사울은 골리앗이 돼 가고 있었다. 키가 3미터에 이르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대적하기조차 어려운 거인이었다는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나올 놈은 나오라고 윽박지르는 형국이었다. 유신이라는 방패를 들고 긴급 조치라는 칼을 휘두르는 이 거한 앞에서 3천 5백만 국민의 대다수는 숨을 죽였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다윗은 있는 법. 한국의 기독교인들 일부는 다윗처럼 팔매를 들고 나선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한국의 골리앗 역시 곱징역과 고춧가루 물을 휘두르며 외쳤다.

 

“어서들 오너라.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사무엘상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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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윗들의 진지 가운데 가장 튼실했던 것이 한국신학대학교였다. 유신 선포 뒤 숨 죽이던 한 해가 가고 1973년 10월 2일 서울대에서 시위가 터져 나왔고 이 시위 진압과 관련하여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냈던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죽음을 당했다.

 

반 유신 투쟁의 구호가 간간이 어둠을 찢고 나오는 가운데 한신대학교에서도 학생 회장 이창식과 대의원 의장 김성환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신앙 양심상 안이하게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라고 선언한 뒤, 학생들이 11월 9일부터 열흘 동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채플실에서 예배와 토론으로 신앙적인 결단과 함께 투쟁을 하기 위한 이론적인 무장을 계속했다. (문동환, 길을 찾아서, 한겨레 신문 연재)

 

마침내 다윗들이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나선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다윗처럼 아직 돌팔매 솜씨가 여물지 않아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지 못했고 갑옷에 튕겨 나갈 뿐이었으나 어쨌든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다윗의 스승들은 난처했다. 수업 거부가 진행되니 강의할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닐니리야 놀러갈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고 손 놓고 있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애들이 골리앗과 맞선다는데 신학대학 교수 처지에 다윗을 나무라던 다윗의 형들처럼 “니들이 뭘 안다고 이래?”라며 윽박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윗과 함께 돌팔매 휘두를 수도 없고... 결국 교수들도 모여서 기도하기로 했다. 허기사 종교인들에게 기도만한 무기가 있을까.

 

유신 정권은 한신대학교에 학생들 제적을 요구해 왔다. 그즈음 한신대 교수 문동환은 학장실에 들렀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김정준 학장이 바리깡을 들고 자기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뭡니까? 화계사로 출가라도 하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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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하는 문동환에게 김정준 학장은 안병무 교수의 제안에 따라 학생들을 지지하는 교수들 전원 삭발을 진행하기로 했음을 전했다. 바야흐로 한국신학대학교는 외관상(?)으로 화계사 승가대학이 됐다. 백발 또는 염색한 흑발이 무성하던 머리는 까까머리로 바뀌었고 학생들은 교수들의 머리 앞에서 입을 벌렸다.

 

이때 벌어진 서글프지만 웃음이 터져나오는 광경 중 하나. 저마다 삭발을 진행한 안병무 교수와 문동환 교수가 조우한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안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동환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거울 속에서 은진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을 보았던 것이었다. 나도 병무야! 맞장구를 쳤다. 그 엄중한 순간에 교수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문동환은 기나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는 장발 스타일이었던 바, 그 삼단같은 머리가 썽둥 잘려나가 민머리를 드러낸 순간 과거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 서로에게 떠올랐던 것이다. 추억을 되살려준 유신 정권에게 감사해야 했을까.

 

교수들의 머리 모양을 본 학생 몇몇이 이발관으로 달려갔는데 하필 쉬는 날이었다. 학생들은 아무 가위나 들고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턱턱 잘라냈다. 가위가 없는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뜯어서라도 삭발을 할 기세였다. 어떤 전언에 따르면 교직원들도 일부 동참했고 심지어 학교 버스 운전사 아저씨도 삭발 행렬에 동참했다고 한다. 며칠 후 학생들의 단식 투쟁이 끝나던 날 민머리의 교수와 학생들은 부둥켜 안고 함께 울었고, 한국 길거리 데모 역사에서 유구한 역사와 생명력을 자랑하는 노래를 울부짖으며 불렀다.

 

“우리는 한신 가족 좋다 좋아. 함께 죽고 함께 살자. 좋다 좋아. 무릎을 꿇고 살기 보다 서서 죽기 더 원한다. 우리는 모두 한신 가족."

 

가슴에 엉킨 가래같은 피울음을 한 바가지 토한 후 김정준 학장은 강단 앞의 한신대학교 교기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면도칼이었다. 예리하게 날 선 면도칼로 학장은 자신의 학교의 상징을 찢는다. 갈기갈기. 북북. 난자한다. 학생을 지켜주지 못하는 학교에 대한 자괴, 그 학교에서 스승이라 일컬어지는 자신들의 무기력, 학생들에게 골리앗의 칼처럼 육중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범벅이 된 칼질이었다.

 

“학생들이 다시 돌아오면 이 교기를 꿰맬 것입니다."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하였을지는 굳이 적을 필요도, 상상을 오래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이야 아직 우리 사회의 요소요소에, 그리고 우리들에게 옛 얘기를 해 주는 6~70대 노인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 교수님들은 거의 세상에 계시지 않을 것이다. 김정준 학장은 유신의 최후를 목도한 직후인 1981년 세상을 떴고, 민머리의 문동환을 두고 동환아!를 부르짖으며 잠깐 옛날로 돌아간 안병무는 1996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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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 전 2019년 3월 9일, 한신대 삭발 사건의 주역 중 하나이며 유신 정권과 그 뒤를 이은 골리앗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 돌팔매를 놓지 않았던 한 성직자가 영면에 들었다. 고 문동환 목사님의 명복을 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어느 놈들이 틈만 나면 내세우는 ‘자유 민주주의’는 그분과 그분의 형제와 친구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