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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이 걸리는 "경제분석"

 

갑을 문제나 재벌 일가의 사익 편취 관련 뉴스를 보면 답답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제재 수위가 너무 낮다는 부분입니다. 국민 여론의 뒷받침도 있어서 하도급 거래를 비롯해 가맹 사업(프랜차이즈), 대리점 거래, 대규모 유통업자와의 거래 등 일련의 전형적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한 제재도 꾸준히 행해지고 있고, 민사상 손해 배상 제도와 관련해서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는 등 나름의 개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정위 소관 법령은 아니지만 개정된 상생협력법도 올 7월부터 시행되며 일정한 행위에 대한 3배 손해 배상 제도가 시행되네요. 물론 갑을 관계가 유지되는 한 을의 입장에서는 거액의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꺼려지므로 법 개정의 효과는 한정적일 것이라는 소리도 있는 모양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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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답답한 점은 시간입니다. 공정위가 조사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도 좀처럼 제재가 이루어졌다는 뉴스가 안 나오는 케이스가 적지 않다는 말이지요. 김상조 위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정위의 어떤 조사는 검찰이나 경찰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경제분석을 해야 되기 때문에요."

(KBS 최강욱의 최강시사, 2018.6.21.)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공정거래법은 전통적인 “독점의 폐해”를 규제하는 측면(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기업 결합, 카르텔에 대한 규제)과 개별 사업자에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규제하는 측면(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한 규제)이 있습니다. 양자 간 가장 큰 차이점은 전통적인 독점 규제는 해당 행위로 인해 시장 경쟁에 큰 악영향을 미치거나 그 우려가 있어야 비로소 발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지요. 공정거래법상 용어로 말하면 경쟁 제한성을 입증해야 된다는 이야기지요.

 

때문에 공정위는 “독점의 폐해”가 나타나는 것으로 지목한 사안에 대해, 문제된 행위가 경쟁 제한적 효과를 일으키거나 일으킬 우려가 있는지 따지기 위해 꼼꼼하게 “경제분석”을 합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웬만한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을 상정하면서 그 행위(예를 들어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때문에 정상적인 경쟁 환경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밝히면 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경제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실제 조사에서는 가격 동향이나 사업자수 변동 등에 착안해서 그나마 경쟁이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변화, 예를 들어 자연스럽지 않은 가격 상승이나 이상한 사업자 수 감소 등이 있거나 앞으로 있을 우려가 있는 경우 경쟁 제한성을 인정합니다. 무척 복잡하고 방대한 조사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이지요(궁금한 분은 공정위 웹사이트에서 공개된 관련 의결서를 참조하면 조사에 투입되는 노력의 방대함의 일단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2. 구조 개혁 속도의 답답함

 

경제분석이 필요한 조사는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것은 오케이. 그런데 시간과 관련해서 또 하나 답답함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경제의 구조 개혁 속도이지요.

 

역대 정권이 개혁을 외칠 때마다 공정거래법이나 공정위의 역할이 거론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에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웠지요. 김상조 위원장이 생각하는 경제민주화의 알맹이는 나중에 소개하기로 하고 지금은 경제 개혁과 시간에 관한 발언을 보고자 합니다.

 

"저의 친정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 단체 쪽에서도 법개정의 내용이나 또는 지난 1년 4개월 동안 저희 공정위가 해 왔던 일에 대해서 너무 뜸을 들이는거 아니야, 라고 하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점은 분명히 저의 진정성을 가지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 30년 된 과제입니다. 30년 동안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기대하는 어떤 방식의 재벌 개혁 수단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저는 30년 전에 형성된 인식이 아닐까...라는, 어떤 반성을 해보고 있습니다.

 

30년 전에는 정부가, 특히 공정위가 사전적인 규제 수단을 가지고 이렇게 개혁을 해나가는 게 유일하고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을지 모르겠지만, 21세기의 현 단계에서는 꼭 그런 건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어떤 법과 다양한 어떤 수단들의 종합적 체계성을 높이는 게, 그게 바로 한국 경제를 선진화하고 정상화하는 길이고, 이거야말로 개혁을 성공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저는 그것은 지난 30년 동안 실패한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게, 예측 가능하게 가는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판하시는 것은 경청하겠습니다만은 저희들의 진정성을 좀 인내심을 갖고 좀 더 기다려 보셨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KBS 열린토론, 201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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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속도감이랑 실효성 있는 개혁에 있다는 지적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방송 중에서도 우스갯거리로 언급되었는데, 위 발언 내용 자체는 공정거래위원장의 우선적 직책으로 여기기는 어렵지요. 공정거래법과 그 관련 법령은 일단 공정한 경쟁이나 거래 관계를 확보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요. 그런데 거의 공정거래법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위 발언에도 공정거래법과 직접 관련된 용어가 언뜻 나와 있어요. 바로 "사전적인 규제"라는 말입니다.

 

공정거래법의 세계에서 말하는 '전통적 규제 대상'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카르텔, 경쟁을 저해하는 기업결합이었지요. 그 중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이나 카르텔에 대한 규제는 기본적으로 독점의 폐해(자연스럽지 않은 가격 인상이나 사업자 수 감소 등)가 나타나기 때문에 규제를 가한다는 입장이거든요.

 

반면 기업결합 규제는 어떨까요. 쉽게 말해서 인위적으로 독과점 기업을 막는 것인데, 독과점 기업이 갑자기 생겼다고 해서 바로 독과점의 폐해가 일어나지는 않지요. 그럼에도 일정한 기업결합을 규제하는 취지는 장차 발생할 우려가 큰 기업결합을 미리, 사전적으로 규제하자는 데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공정거래법의 세계에서 "사전 규제"라고 하면 실질적으로 기업결합 규제를 일컫습니다(참고로 김 위원장이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2018.10.5.)에 출연했을 때 "공정거래법 3장에 있는 사전규제"라고 말했는데 3장에는 기업결합 규제나 경제력 집중의 억제가 규정되고 있고, 그 "사전규제"는 바로 공정거래법적 의미의 사전규제입니다).

 

다만 김상조 위원장이 사전적인 규제라고 말한 취지는 반드시 공정거래법상 용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정부가 미리 기업 활동에 규제를 가함으로 재벌 기업 등 대기업의 횡포를 막는 규제 수단”이란 뜻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정부가 나라 경제를 주도해서 키우던 시절 같으면 정부가 미리 기업 활동에 간섭・통제하는 차원에서 재벌 기업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횡포를 막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질적인 면에서도 많이 고도화・복잡화된 지금, 되도록이면 자유로운 경쟁에 따른 효율성 향상이나 창의성 고조에 기대하며 정부가 개입하는 일은 '자유 경제의 순기능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부분(불공정 거래 행위도 그 하나)에 한정시킨다'는 입장이다, 라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실제로 김상조 위원장이 사전 규제라는 말을 이런 의미로 썼었다면 경제민주화에 대해 김 위원장이 이야기한 내용도 쏙 이해가 돼서 재미있는데 그건 다음 편에서 언급하도록 할게요).

 

그렇다면 정책의 효과가 눈에 띄게 빨리 나타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단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하게끔 만들어 효율성을 높이고 창의성을 발휘하게 한다, 이런 과정은 평소 한국 경제나 기업 활동을 관찰하고 있지 않는 한 실감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경제 정책, 아니면 더 자세히 공정거래법상 경쟁 정책은 "아~ 그런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그 결과와의 인과관계를 보기 어렵다는 것도 있어요. 일반 국민이 볼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라고 느껴지는 까닭은 이런 부분에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정책 당국의 "기다려 달라"는 말은 그냥 핑계일 경우도 많겠지요. 그러나 위와 같은 사정을 알고 들으면 김 위원장 말씀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3. 위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작년 11월 공정거래법의 전면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면 개정인 만큼 다방면으로 주요한 개정이 있었는데, 언론이 특히 치중해서 보도한 것이 '전속고발권'이었지요. 사건을 검찰에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공정위만이 쥐고 있다는 것인데, 현행 공정거래법에서도 공정위는 고발할지 여부에 대해 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아서 전속고발권이라는 말 자체가 좀 위화감이 있긴 합니다. 공정거래법 사건에 대해 강력한 처벌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여론의 동향을 의식해서 공정위가 억지로 개정안에 포함시켰다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검찰이 자체적으로 수사에 착수하고 기소할 수 있게 될 대상은 경성담합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라디오 프로에서 김 위원장에게 "중요한 사건일수록 전문성을 갖춘 공정위가 주도적으로 조사에 임해야 되지 않냐"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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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담합은 하드코어 카르텔(Hardcore-Kartelle)로도 불리고, 일반적으로 "경쟁 제한 외의 목적・효과가 없는 담합"이라 설명이 되지요. 웬만하면 서로 경쟁을 해야 되는 기업끼리 가격이나 생산량을 담합하거나 영업 지역을 서로 나눠먹는 식의 "오로지 경쟁을 저해할 목적・효과"만이 있는 담합을 일컫습니다(그래서 경쟁사업자까지 공동 연구를 하거나 배송/유통 서비스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등 효율성・창의성을 높이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협조 등은 불법적인 담합으로 여기지 않을 여지가 있어요). 위 질문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야말로 전문 기관인 공정위가 앞서서 단속해야 되지 않냐는 뜻으로 질문을 던진거지요. 얼핏 들으면 그럴 만하지요? 그런데 김상조 위원장은 이렇게 답변했어요.

 

"경성담합에 대해 좀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 (중략) ... 경쟁법 또는 공정거래법이 법위반, 위법행위라고 규정하는 것 중에 당연위법이 있어요. 법에서 정한 요건에 해당하면 그냥 불법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조항이요. 또 하나는 법의 위법 구성요건에 해당되더라도 그것이 가져오는 경제적 효율성과 비교함으로써 어느 쪽이 더 큰가를 판단해서 위법 여부를 최종적으로 다시 판단하는, rule of reason, 합리의 법칙이 적용되는 조항들이 있습니다. 경성담합은 당연위법입니다."

(KBS 열린토론. 2018.10.30.)

 

김 위원장이 이렇게 답변을 하자, 순간 얼어붙은 스튜디오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답변에 나온 "당연위법"은 공정거래법 상 용어입니다. 내용은 김 위원장이 설명한대로 해당 행위가 있기만 하면 바로 위법이라는 뜻으로, 그 행위가 시장 경쟁에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지를 꼼꼼히 따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위에서 나온 "경제분석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야기와 표리일체를 이룬 말이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서 경제분석이 필요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이코노미스트 집단이기도 한 공정위가 굳이 나오지 않더라도 검찰이 자체적으로 적발・단속하게 해줘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검찰과 공정위가 협조하면서 조사에 임할 겁니다.

 

우리는 일단 1.에서 언급한 내용과 함께 공정위가 다루는 공정거래법 위반 사안에는, 자세한 경제분석을 통해 위법성을 판단하는(합리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과 해당 행위가 있으면 바로 위법으로 인정되는 것(당연위법형 행위)이 있다는 점을 알아두고자 합니다.

 

이런 이분론을 전제하면 경쟁 방법의 부당성에 착안해서 단속하는 불공정거래행위(소위 갑의 횡포도 이에 포함됨)는 그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김상조 위원장이 취임 후 "먼저 국민이 공정위의 활동을 실감할 수 있는 분야"로 갑의 횡포를 억제하려던 이유는 불공정거래행위가 국민 생활에 가장 밀접한 위법 행위라는 것도 있지만, 불공정거래행위가 비교적 빨리 단속할 수 있다는 점도 있을 겁니다.

 

언론에서는 "재벌 저격수 김상조가 재벌 규제를 뒷전으로 미루더라"라고 놀랐었는데 위원장 취임 시 여론, 그리고 갑질 단속의 신속성을 전제하면 김 위원장이 먼저 갑질부터 치중한 것은 하나도 놀랍지 않은 거지요. 필자는 김상조 위원장이 취임 당시 먼저 갑질 근절에 애를 쓰겠다는 의향을 밝혔을 때 "오~! 그럴 법하네!"라고 깊이 와닿았지요(이런 납득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다음 편에서 설명하겠습니다).

 

 

 

4. 담합했는데 왜 단속 안 해!?

 

담합, 특히 경쟁자끼리 미리 짜고 가격이나 생산량을 결정하거나 입찰 가격을 맞춰서 입찰하는 경성카르텔은 그 담합 행위가 입증되면 바로 위법으로 판단합니다("당연위법"이죠). 이렇게 말하면 되게 심플해지기 때문에 누가 봐도 담합이 이뤄졌는데도 공정위가 단속・고발하지 않으면 일반 국민은 너무나 답답합니다.

 

그런데 담합 행위는 그 존재를 입증하는 자체가 아주 어렵습니다. 담합을 입증하려면 경쟁사끼리 가격이나 생산량을 맞추자는 의사를 주고 받고 동의를 했다는 점(공정거래법의 세계에서는 "의사의 연락"이라고 불러요)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런 상의나 동의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까요? 무척 어려울 것 같잖아요?

 

그렇습니다. 담합에 직접 가담한 종업원이 남긴 메모 등을 압수하고 조사해서 언제, 어디서, 누가 만났고 어떤 선에서 가격을 맞추려고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되는 겁니다. 상상만 해도 매우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담합했겠지"라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는데도 공정위가 단속하지 못하거나 단속을 꺼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거지요(국회에 계류중인 개정법에는 담합을 추정하는 조문이 담겨졌는데 해당 조문의 의도 역시 담합 입증의 어려움을 경감하려는 데에 있지요).

 

이와 관련해서 김상조 위원장은 이렇게 해명한 적이 있습니다.

 

"담합사건의 상당 부분은, 사실은 한국에서는 70%, 선진국에서는 90% 정도가 자진신고, 그러니까 자수하는 사업자에 의해서 정보를 확보하고 조사하게 되는데요..."

(KBS 열린토론, 201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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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의 "자수"라는 표현이 딱 와닿는 것 같아요. 자진신고라 함은 담합 사실에 대해 사업자 스스로가 공정위에 신고하거나 담합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를 제공함으로, 조사・입증에 도움이 되면 공정위에 의한 제재나 고발을 면제해 주는 제도이지요(자세한 내용은 공정거래법 22조의 2호 등을 참조하기로 해요). 유식하게 리니언시(leniency)라고 부를 때도 있고요.

 

사실 자진신고 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효과를 의아해하는 시각도 있었는데, 자진신고가 인정되면 반드시 과징금 등이 감면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된 후 의미있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정위 OB이자 공정거래법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는 분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면 "리니언시 제도는 이제 선진국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유효하게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필자가 알고 지내는(일견 그쪽 조직에 속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중견 건설사의 중견 사원은 "자진신고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는 입찰 가격의 담합과 동시에, 공정위가 담합을 알아채게 되면 누가 먼저 자진신고를 할지도 담합하지ㅋㅋ"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자진신고 제도가 당초 기대된 만큼의 효과를 거뒀는지 평가는 둘째 치더라도 '담합 행위의 인지・증거 수집'에 자진신고가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담합은 자유로운 시장 경제의 순기능, 특히 경쟁을 통한 품질 향상과 합리적 가격 형성을 해치는 핵심적인 행위이지요. 김상조 위원장이 말한 대로 한국은 소위 선진국과 비교해서 자진신고제의 이용률이 낮은 편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국의 기업 사회가 선진국보다 유대감이랄까 연대의식이랄까, 하여튼 사이좋게 지내자는 의식이 강한 방증이기도 해요. 물론 회사끼리 굳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는 없지만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벌이는 마인드는 장기적으로 볼 때 업체들에 있어서도 득이 될 겁니다. 자진신고가 더욱 순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좋겠지요.

 

 

 

5. "재벌"이라는 말은 법에 안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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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공정거래법과 “재벌”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지요. 지난해 가을에 삼성 그룹의 구조조정 관련 뉴스가 화제가 됐었지요. 특히 순환출자가 해소될 거라는 소식.

 

그에 앞서 같은 해 5월에 김상조 위원장이 한 뉴스 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렇게 답변했지요.

 

"동일인으로 공정위가 지정을 했습니다만, 이재용 부회장이 결단을 해야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JTBC 뉴스룸, 2018.5.10.)

 

“동일인”이란 말이 나오지요. 일반적으로 “똑같은 사람” 정도의 의미로 쓰이는 이 “동일인”이 공정거래법 상 재벌 규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개념입니다.

 

아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벌'이라는 말이 공정거래법 제정 이래 단 한 번도 법문에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겪다가 현행법 상 재벌은 포스코 그룹이나 KT 그룹 등 재벌이 아닌 "매우 큰 기업 집단"과 함께 같은 규제를 받고 있고, 원칙적으로 재벌만을 겨냥한 규제는 없는 것이지요.

 

법은 그 “매우 큰”의 내용을 2단계로 나누고 있어요. 그룹 전체의 자산총액이 5조 원 이상이면 공정위가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하며, 그에 소속하는 기업에게 그룹 내 거래 내역을 공시하게 하고, 이에 더해 자산총액이 10조 원 이상인 기업집단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며 그룹 내에서 새로운 상호・순환출자를 형성하는 주식 매입이나 그룹 내 기업을 위한 채무보증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작년 5월에 공정위가 공표한 자료에 의하면 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인 공시대상기업집단은 모두 60개가 있고, 그 중 자산총액이 10조 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32개가 있네요. 예를 들면 삼성그룹은 그룹 전체 자산총액이 400조 원 정도 됩니다. 그래서 공시대상기업집단이기도하고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기도 한 거지요. 한편 카카오 그룹은 자산총액이 8.5조 원 정도 되는데 5조 원을 넘기 때문에 공시대상기업집단이지만 10조원 미만이어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아닌 거지요(2018.5. 공정위 보도자료에 의함).

 

공시대상기업집단이든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든 애당초 법적으로 “기업집단”으로 인정되는 것이 전제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동일인”입니다. 공겅거래법이 규정하는 정의(2조 2호)를 보면,

 

“기업집단”이라 함은 동일인이 다음 각목의 구분에 따라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의하여 사실상 그 사업 내용을 지배하는 회사의 집단을 말한다.

 

가. 동일인이 회사인 경우 그 동일인과 그 동일인이 지배하는 하나 이상의 회사의 집단

나. 동일인이 회사가 아닌 경우 그 동일인이 지배하는 둘 이상의 회사의 집단

 

입니다. 짧게 줄이면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이란 “동일인”이라 불려지는 어떤 개인이나 회사에 의해 지배되는 회사의 집단이라는 거지요. 여기서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동일인이 개인인 경우가 재벌입니다.

 

이렇게 알고 보면 위에 인용한 김상조 위원장의 발언은 "삼성그룹 전체를 사실상 지배하는 자로 공정위가 이재용 부회장을 지정했구나"라고 이해가 되지요. 그럼 부회장이란 직함이 뭐냐고요? 이것은 이재용 씨가 삼성전자의 부회장이기 때문입니다. 재벌 그룹에 잦은 일인데 이른바 총수나 오너라고 불리는 개인(공정거래법에서 말하는 동일인) 같은 경우 거의 다 그룹 내 핵심기업, 아니면 지주회사 체제를 취하는 그룹의 경우 지주회사의 회장을 맡고 있어요. 그래서 직함을 붙이고 부를 때에는 뭐뭐 회장으로 부르는 거지요. 현대차 그룹의 경우 현대모비스가 지주회사 격이 되는데 정몽구 씨는 모비스 회장이고, 에스케이 그룹의 최태원 씨는 그룹 전체를 통괄하는 지주회사인 주식회사 에스케이의 회장을 맡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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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그룹 전체를 사실상 지배하는 동일인이 회사인 경우, 즉 커다란 대기업 집단인데도 재벌로 불려지지 않는 그룹으로 어떤 게 있냐면 포스코 그룹, 농협 그룹, 케이티 그룹, 에쓰-오일 그룹, 대우조선해양 그룹, 대우건설 그룹, 한국지엠 그룹 등이 있어요. 학계에서는 이런 비(非) 재벌 그룹을 재벌과 똑같이 규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소리도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