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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기생충>이 제72회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가히 기생충 신드롬이라 할 만큼 온갖 매체에서 오만가지 리뷰와 평론, 감상이 쏟아졌다. 허나 나란 남자는 삐딱한 도시 남자. 남들이 “예”를 외칠 때 혼자 “아니오”를 외치고 남들이 “대한민국”을 외칠 때 혼자 “나경원”을 외치는, 밑도 끝도 없고 꿈도 희망도 없이 되바라진 남자.

 

개나 소나 다 한마디씩 하는 <기생충>에 대해 숟가락을 얹지 않는 쉬크한 스타일을 고수하려 했으나, 이 타이밍에서 ‘가난 전문가’가 한마디 하지 않으면 대체 언제 하려느냐는 편집부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못이기는 척 금장수제 키보드를 꺼내어 들었다. 여러모로 긴장 타자.

 

 

2.

우선, 영화 <기생충>에 대한 수많은 리뷰 중 가장 얼척 없는 소리가 '가난 포르노'라는 감상평이다. 너네 포르노 본 적 없구나? 그럼 나 같은 좆문가한테 물어봤어야지. 포르노엔 '왜 '(why)가 없어. 오로지 '자극'이라는 일종의 합목적성에만 충실하지. ‘푸드 포르노’를 떠올려 보자. 칼로리고 건강이고 재료고 나발이고 오로지 식욕을 돋우는 것에만 전력을 다하는 게 이른바 ‘푸드 포르노’다. <기생충>을 보고 가난해지고 싶어지디?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가난 포르노'는 아닌 거다. 근데 왜 엉뚱하게도 ‘가난 포르노’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건 아마도 “음란물은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것”이라고 유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세뇌당한 반도의 가련한 엄숙주의자들이 엉겁결에 ‘혐오스러운 그 무엇’을 ‘포르노’란 단어로 갈음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왜 많은 관객들은 영화 <기생충>에서 묘사한 ‘가난’에 대해 혐오를 느꼈을까. 명징하게 직조해두겠는데, 관객들은 영화에서 혐오를 ‘읽은 것’이 아니라 혐오를 ‘느낀 것’이다. 즉, 감독이 가난을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혐오를 드러낸 것을 관객이 읽어낸 게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감정이입되어 혐오감을 느낀 것이다. 세심하게 더듬어보자면, 혹자는 “영화에서 ‘가난’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저 도구로써 전시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느낀 ‘불편함’을 정의하던데 만약 봉준호가 ‘가난’에 천착하는 영화를 찍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른바 ‘가난 포르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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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인터뷰와 평론, 리뷰에서 다뤘듯이, <기생충>은 신분과 계급, 그리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예의에 관한 이야기지, 본격 가난 전문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영화를 두고 왜 감독에게 ‘가난’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짚어내는 ‘진정성’을 요구하는가. 아, 결국 그 얘기다. 봉준호 감독은 각각의 캐릭터에 거리두기를 했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외려 묘사된 ‘가난’에 대해서만큼은 거리두기를 실패하고 ‘나의 것’으로 체화해 버린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기에 요구 되어질 수밖에 없는 그것. 진정성.

 

이건 기실 새삼스런 반응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인 <살인의 추억>, <마더>, <괴물> 등에서 늘상 있어왔던 반응이다. 울 마누라는 <기생충>을 보고 “봉준호 영화는 항상 뭔가 찝찝해”라고 했다. 울 마누라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이건 대통령께서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할, 아니, 토를 달아선 안 되는 것이다. 울 마누라에게 안 맞아봤으면 말을 말아야 한다.

 

봉준호표 영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찝찝함’, ‘불편함’ 혹은 ‘혐오스러운 무엇’의 정체는 그간 영화 전문가들에 의해 수없이 다뤄졌더랬다. 그러니 나는 가난 전문가답게 ‘가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3.

얼마 전,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과 뒤이어 벌어진 ‘봉천동 반지하 음란행위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뉴스에서 그 사건들을 본 순간, 어랏, 하고 20년 전이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마사오가 홍대 바닥을 다 휩쓸고 다녀서 ‘상수동 빗자루’라 불리우던 리즈 시절. 그땐 내가 만화를 그리고 있었기에 작업실 겸 자취방에서 살았다. 합정동 연립주택 반지하였는데 지금은 망원유수지가 생겨서 물난리가 안 난다지만 그 시절 내가 살던 월세 10만 원의 단칸 반지하방은 장마철만 되면 물이 들이차던 동네였다. 변기가 있는 욕실이 정확히 <기생충>에 나온 딱 그 화장실이었다. 방 안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변기. 장마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행여 정전이라도 되면 변기와 하수도를 끌어 올리는 펌프가 꺼지니까 똥도 못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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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에서 장마철에 쓰레받이와 양동이로 물난리와 두어번 사투를 벌이고 나니 다른 곳을 알아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한 곳이 이대 입구 근처 대흥동 산동네였다. 처음 집을 보러 갔는데, 입구는 1층에 나 있지만 집 뒤편은 반지하인 구조였다. 하지만 산동네여서 최소한 물난리 걱정은 안 해도 될 터였다. 벼룩시장에 집을 내놓은 사람은 월세를 살고 있던 자매였다. 여자들끼리만 사는 방이라 내가 쭈뼛거리며 좁은 방 안에 들어서자 두 자매는 무언가 몹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 안에 창문이 없었다. 사실은 없었던 게 아니라 작은 옷장으로 창문을 막아놓은 거였다.

 

앞서 설명했듯 현관은 1층이지만 창문 쪽은 반지하였다. 길가가 아닌 건물 뒤쪽이었기에 사람들의 왕래도 없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둘 다 얼굴만 쳐다보며 우물쭈물 답을 못했다. 수돗물도 잘 나왔고 변기도 시원하게 내려갔다. 월세도 적당하고 위치도 괜찮았기에 스스럼없이 계약했다.

 

 

4.

며칠 후, 이삿짐을 풀어 정리를 마치고 한갓지게 빤스 바람으로 베개를 끌어안고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뒤쪽에서 무언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뒤를 홱 돌아보니 웬 시커먼 사내새끼가 창문을 통해 날 엿보고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푸다다닥 도망갔다. 자매가 왜 멀쩡한 창문을 옷장으로 가려놓고 살았는지,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다.

 

20년 전, 내 방 안을 엿보던 그 새끼한테 일말의 미안함이 있다. 난 그 시절 인싸에 초리즈 무렵이었기에, 머리를 장발로 한껏 기르고 댕겼다. 시나위 시절의 김종서나 락커 김경호의 헤어 스타일을 떠올리면 된다. 머리가 긴 사람이 홀딱 벗은 채 빤스 한 장만 걸치고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뒤태. 그 변태새끼, 입이 얼마나 바짝 마르고 긴장과 스릴과 서스펜스가 몰아치며 리비도가 한껏 자극됐을 것인가. 근데 홱 돌아보는 얼굴이 씨바, 마사오야. 내가 미안해? 안 미안해?

 

사실 지금에서야 이렇듯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당시의 나놈은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아이 씨발 놀래라!” 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더랬다. 컴컴한 골목에서 예상치 못하게 어떤 시꺼먼 그림자가 툭 튀어나와 봐라. 안 놀라고 버틸 재간이 있나. 이게 물경 20년 전 일이다. 자지 달린 새끼들은 이 방면에서 지독하게도 초지일관하다는 얘기다.

 

그 후로, 창문을 가릴 가재도구도 마땅한 게 없고 담배를 많이 피우기에 환기도 절실했으므로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딸딸이도 원껏 치면서 그냥저냥 살았다. 처음 한 달간 오밤중만 되면 창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새 ‘저 방에 머리 긴 사내새끼가 산다’는 소문이 났는지 어느 무렵부턴 별다른 일이 없었다. 좃 달린 자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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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 변태 새끼가 출몰한 장면은 지금 떠올려봐도 기분이 더럽다. 내가 좆 달린 사람이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좆 같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 자매는 어땠으랴. 결국 같은 일을 겪은 자매와 나 사이의 공통점이라곤 ‘가난’ 밖에 없다. 옷이 낡아봤자 잘만 매칭하면 빈티지 스타일이라고 우길 수도 있고 어마무시한 가격의 산해진미가 아니라면야 사람 입에 들어가는 꼬라지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설마하니 이재용은 라면 안 먹을까. 하지만 주거 형태는 신분 혹은 경제적 위치를 드러내는 바로미터다.

 

나는 생식기에서 비롯된 특권으로 처음 몇 번 놀라고 말았지만 자매는 그 상황이 얼마나 섬뜩하고 끔찍했을까. 한여름에도 꼴랑 하나 있는 창문조차 막아놓고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알량한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을까. 이렇듯 가난은 현실의 불편함 뿐만 아니라 심적인 좌절과 절망까지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5.

외부요인이라는 핑계가 있을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나라가 천지개벽되어 변태 새끼들이 싸그리 사라진 1급수 청정수질이 되면 맘 편히 창문을 활짝 열고 살아도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가난은 결코 사변적 추론이 아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했다. 곳간이 비면 나부터 챙기게 되고 주위를 인식하지 않으면 고립감에 휩싸인다. 따라서 실증적 궁핍은 필연적으로 자괴감을 동반한다. 이게 나 자신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개인의 성찰이나 각성 따위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젊으니까 아픈 거고 멈추면 뭐라도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인 거다.

 

헌데 이게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일개 개인으로선 답이 없다. 다 집어치우고 딱 하나만 생각해 보자. 지금 당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보건데, 열심히 노력해서 박사장의 반열에 오르기가 쉬운가. 자칫 삐끗해서 기택네 처지로 곤두박질치기 쉬운가. 아니, 다시 묻자. 언감생심 박사장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 딛고 있는 위치에서 그냥저냥 버티기가 쉬운가, 그 자리에서조차 굴러떨어지기가 쉬운가.

 

흔히 보수층이라 불리우는 수구기득권층은 이런 문제만 나오면 개인의 ‘노오력’을 주문처럼 외운다. 게으른 것들이 노오력은 안하고 다같이 박사장이 되지 못할 바엔 다같이 기택네처럼 되자고 주장한다며, 그게 현실적으로 가당키나 하냐고 일갈한다. 빈부격차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른 결과를 절대적으로 수긍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걸 전문용어로 '쉐도우 복싱' 혹은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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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사회적인 부가 쌓이면 최소한 인간적 존엄을 지켜줄 안전망이라도 갖추자는 얘기다. 독일제 세단을 타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걸어다녀도 좋으니 밖으로 돌아댕기게만 해달란 얘기다. 이건 과장이나 은유적인 수사가 아니다. 고시원에 앉아 한달에 보름 정도 우편물 분리 알바를 하고 매일 저녁 깡소주를 털어넣으며 ‘빌어먹을 세상, 확 전쟁이나 나라’고 중얼거리는 시한폭탄들이 도처에 널렸다니까?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미국 부자님들이 자기들 세금 올리자고 피켓 들고 시위하는 게 괜한 관종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네들은 박사장이 누구 손에 의해 어떻게 되었는지 미리 꿰뚫어 본 것이다. 앞서 서술했듯 가난은 절망과 자괴감을 몰고오며 시스템에서 기인한 절망은 필연적으로 분노를 일으킨다. 그 임계점을 늦추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영화 <로보캅>의 세계관처럼 기업이 도시나 국가를 인수해 군대급으로 자신들을 경호하지 않는 이상, 과연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6.

흔히들 ‘혁명이 거세된 시대’라고 한다. 하루 건너 한번 씩 어떤 개저씨가 술을 처먹고 흉기를 휘두르며 불을 질러서 누가 죽고 또 몇 명이 다쳤다는 뉴스가 터져 나온다. 마치 기택네와 문광네의 대립처럼, 아랫 것들이 아랫 것들 머리채를 잡고 악다구니를 펼친다. 그 개저씨 개인의 쓰레기 같은 인성 탓으로 돌리고 욕하고 처벌하면, 과연 상황이 나아지고 우리는 맘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으려나.

 

기택네 가족은 박사장 내외가 집안으로 들어서니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몸을 숨긴다. 물질적, 공간적으로 박사장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던 기택은 종국에 인간 존엄의 마지노선에서 폭발하며 선을 넘는다. 그 임계점이 사뭇 궁금해지는 저녁이다.

 

아, 여기서 의문 하나. 시나리오를 쓴 봉준호 감독은 과연 박사장과 기택 중 기택에게만 중점을 두고 ‘기생충’이란 제목을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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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