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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목차

 

1.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 링크

2. 송악의 잠룡 왕건 - 링크

3. 궁예의 관심법과 왕건의 결심 - 링크

4. 패강의 눈물 - 링크

5. 삼국통일 - 링크

6. 광종의 히든카드

7. 고려판 사법고시

8. 고려의 노스트라다무스 최지몽

9. 전쟁의 신 서희

10. 천추태후와 강조의 변

11. 거란의 2차 침입과 몽진

12. 양규와 하공진

13. 강감찬과 귀주대첩

 

 

<지난 편 역사, 한 줄 요약>

 

1. 고려군이 대패한 공산 전투 이후, 고창(현재 안동) 전투에서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다시 맞붙는다.

 

2. 고창의 호족들은 고려군 편을 들었고, 후백제는 대패했다.

 

3. 고창에서 후백제를 몰아낸 고려군은 신라를 위로했다. 

 

4. 견훤은 서자인 금강에게 후계자를 넘겨주려 했으나, 이에 반발한 적장자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유폐했다.

 

5.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귀순했다.

 

6. 신라의 경순왕도 이어 고려로 귀순했다.

 

7. 이후 고려는 (표면적으로는) 견훤의 청에 따라 후백제를 쳤다.

 

8. 창업 군주가 앞장서 오자, 후백제군은 싸울 의지를 잃고 쉽게 무너졌다.

 

9. 후백제의 멸망과 함께 왕건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10. 왕건 이후, 고려는 호족들이 왕의 힘을 능가할 정도로 강했는데 고려 4대 왕 광종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고려를 뒤바꾼 왕, 광종의 즉위

 

949년, 고려 4대 왕 광종이 즉위했다. 그의 이름은 왕소. 2대 혜종(943~945), 3대 정종(945~949)에 이어 태조 왕건의 또 다른 아들이다. 광종은 장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조 왕건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광종 즉위1.png

광종 즉위

출처-<KBS1 드라마 ‘제국의 아침’>

 

고려 초기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고려 왕실은 족내혼(근친혼)을 이어갔다. 광종은 족내혼을 한 첫 번째 왕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즉위 초반 광종의 입지는 별로 탄탄하지 못했다. 선왕인 정종(3대)이 서경 군벌 왕식렴과 또 다른 호족 박수경 등에 정치적 채무를 진 연유로 제대로 된 왕권을 펼치지 못 했는데, 광종 즉위 초기에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즉위 초, 광종은 무난하다 못해 고요한 행보를 보였다. 이런 모습에 성주 또는 장군으로 불리던 지방의 호족들은 안심했다. 즉위 이듬해에는 정월에 있는 거목이 뿌리째 뽑히는 일이 발생했는데, 광종은 이를 자신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자책까지 했다. 호족들의 미소와 함께, 광종은 정관정요라는 불리는 열 권의 책만을 밤낮으로 끼고 살며 7년의 시간을 보냈다. 

 

(당나라 태종(이세민)이 집권하던 시기는 중국 역사 중에서도 최고의 시대로 손꼽힌다. 이 시기 당 태종이 신료들과 정치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책이 ‘정관정요’다. 흔히 제왕학의 교과서로 읽힌 책이다)

 

난 아무것도 모르오.png

난 정치에 대해선 아직 애송이오.

짐은 공부나 할 테니,

정치는 경들이 알아서들 하시오~

 

훗날 고려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시무 28조’의 최승로는 이 7년의 시기를 하, 은, 주 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태평한 시기에 광종의 마음속은 회오리치고 있었다. 광종은 정관정요를 읽고 또 읽으며 호족을 향해 칼을 갈고 있었다.

 

“고려 개국 공신만 3천 명이 넘는다. 아바마마는 그들과 통일을 이루었지만, 나는 그 자식들과 싸워 왕권을 지켜야 한다.” 

 

당시 고려 호족들은 오늘날 미국 주지사를 능가하는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태조 왕건의 고려는 지방 호족들의 연합 위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건이 호색한이라 29명의 부인을 맞이했던 것이 아니다. 호족들의 권력은 고려 건국부터 광종 즉위 때까지 30여 년이 지나며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그들 힘의 원천은 토지와 노비였다. 노비들은 호족들의 사유재산이었으며 세금을 내지 않았고, 국방의 의무도 면제되었다. 노비의 숫자가 많을수록 국가의 재정과 힘은 줄게 되고 호족들의 힘은 커지는 구조였다. 노비는 노동력의 원천이자 환급이 가능한 인적 재산이었으며, 농기구 대신 칼을 쥐여주면 즉시 사병으로 변신도 가능했다. 

 

호족 웃음.PNG

크하하핫~~ 호족 세상이다~

출처-<KBS2>

 

호족 중엔 무려 천 명이 넘는 노비를 보유한 이들도 있었다. 이런 노비 중엔 원래 양민이었던 자들이 많았다. 고려 건국 과정에서 잦은 전쟁으로 인해 양산된 포로와 그 과정에서 생겨난 전쟁고아들 그리고, 경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전쟁 난민들이 돈 있는 호족들의 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호족들의 욕심은 멈출 줄 몰랐다. 그들은 나라의 법을 무시하고 어기며,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갔다. 

 

“오늘이 아랫마을 박가 놈이 작년에 빌려 간 쌀을 갚기로 한 날이 맞으렷다.”

 

“예! 맞습니다요.”

 

“이자를 너무 낮게 쳐 준 게 아닌지 걱정이구나. 오늘이라도 쌀을 들고 오면 낭패인데 말이다.”

 

“염려 마십시오. 며칠 전부터 굴뚝에 연기가 나는 꼴을 못 보았습니다.”

 

“네 놈이 양인의 딸과 결혼하려고 아주 열심이로구나. 껄껄껄~”

 

당시 고려에는 양천교혼(양민과 천민의 혼인)이 금지되었으나, 호족들은 노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불법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남성 노비와 가난한 양인 여성을 혼인시켰다. 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자식은 호족의 노비가 되었다. 이런 일이 계속 자행될수록 국가의 힘과 왕권은 약해졌고, 호족들의 힘은 강해졌다.

 

광종 분노.PNG

 

“아버지 태조 대왕께서도 실행하려다 호족들의 저항으로 끝내 이루지 못한 그것을 내가 해내겠다.”

 

 

광종의 첫 번째 무기, 노비안검법

 

956년, 광종 즉위 후 7년의 세월이 흘렀다. 드디어 광종은 이 고요한 평화(?)를 깨기 시작했다. ‘노비안검법’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링컨의 노예 해방급의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간 나라 사정을 보니, 원래 양인이었으나 짐의 부덕함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들이 너무 많다. 이런 자들은 관아에 가서 본인이 양인이었음을 알리기만 하면 모두 면천해주도록 하라. 태조 대왕의 숙원이기도 하였던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노비안검법은 32살의 광종이 서경 군벌을 필두로 한 전국의 호족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족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침 튀기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호족들.PNG

 

“이런 맹랑한 자를 봤나! 이 나라가 누구 덕에 섰는데, 감히 우리를 건드려!”

 

“우리가 너무 방심했었습니다. 괜히 왕족이 아닐 것인데. 우선 왕후를 앞세워 설득해 보도록 합시다.”

 

광종의 정실부인 대목왕후의 집안 역시 막강한 호족 집안이었다. 그러니 당연 노비안검법을 강력히 반대했다.

 

“폐하! 다른 것은 다 하셔도 되옵니다. 허나,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셨어야지요.”

 

“다른 것?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오? 짐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말해보시오. 노비안검법은 호족이 아니라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오. 나는 죽음을 이미 각오하고 있소이다. 왕후는 나의 편에 설 것이오. 아니면 친정 편에 설 것이오?”

 

젊은 광종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의지는 단호했고, 생각을 실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광종이 준비한 비밀병기는 노비안검법만이 아니었다. 

 

 

중국 관리를 스카웃하다

 

광종은 당시 중국 대륙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던 후주에 꾸준히 사신을 보내 후주의 황제와 정치적 교감을 이어가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의 멸망(907년)으로 5대 10국의 시대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 15개 나라의 평균 수명이 50여 년이었으니 얼마나 혼란스러운 시대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혼돈의 시기는 송나라에 의해 통일되는 979년까지 지속되었다. 광종은 고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불안한 중국 대륙 사정을 적극 이용했다)

 

5대 1010국.PNG

5대 10국

 

후주는 고려보다 먼저 왕권 강화 작업을 마친 상황이었다.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에 경제적 타격은 주었지만, 저들은 분명 반격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반격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빼앗지 못한다면, 왕권 강화는 실패에 그칠 것이다. 저들의 정치적 기반을 빼앗고 나와 같이 싸워줄 수 있는 나만의 정치 친위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조정에는 모두 저들의 사람들로 가득하고, 새로운 인재를 키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구나!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고 얼마 후, 후주의 사신단이 고려에 도착했다. 후주 사신단이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 후주 사신 ‘쌍기’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살을 앓는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사신단은 먼저 돌아가고 쌍기만이 홀로 고려에 남았다. 쌍기가 건강을 회복했을 때쯤, 광종은 친히 그의 문병을 갔다. 

 

광종의 문병에는 목적이 있었다. 이전부터 높은 학식을 갖춘 쌍기를 눈여겨보던 광종이었다. 광종은 쌍기에게 제안했다.

 

광종 문병.jpg

 

“짐은 그대의 학식을 높게 평가하오. 고려에 남아 짐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이끌어주었으면 하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대에게 그에 따른 응당한 대우를 보장하겠소.”  

 

“폐하. 제안을 황공하오나, 소신은 후주의 녹을 먹는 자이옵니다. 후주 황제 폐하의 명이 있어야 귀국에 남아 부족한 제 역량을 펼쳐볼 수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후주 황제는 흔쾌히 쌍기의 귀화를 허락했다. 광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쌍기를 원보라는 관직에 임명했다. 호족을 비롯한 신하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폐하! 우리 고려에도 인재가 넘쳐나는데, 어찌하여 다른 나라의 신하를 들이려 하시옵니까!”

 

물론 고려 조정에도 신하는 많았다. 허나, 능력으로 선발된 인재가 아니었다. 가문의 덕으로 관직에 오른, 호족 등 고려 기득권에 서 있는 사람들만 넘쳐났다.

 

입현무방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 친소나 귀천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맹자의 말이다. 광종이 쌍기를 고려 정계에 데뷔시키며 내건 명분이다. 광종은 쌍기의 등용과 관련하여 호족들의 거센 반발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비안검법에 이어, 기득권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는 강력한 다음 한 방을 쌍기와 함께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계속>

 

 

     

<오늘의 역사, 한 줄 요약>

 

1. 고려 초기 호족들의 힘은 왕의 권위를 능가할 정도였다.

 

2. 이런 상황에서 고려 4대 왕 광종이 즉위했다.

 

3. 광종은 즉위 초반, 정치는 대체로 신하들에게 맡겨두고 조용히 지냈다.

 

4. 광종은 즉위 7년 후부터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서며, 첫 번째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노비안검법이었다. 

 

5. 호족들을 향한 다음 공격을 노리던 광종에게 중국(후주)에서 온 사신 쌍기가 눈에 들어왔다.

 

6. 광종의 제안에 쌍기는 고려로 귀화하고 광종과 함께 다음 개혁 정책을 준비했다.

 

 

※ 역사의 빈틈은 개연성을 고려하여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꿨음을 알린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한 편 한 편 이야기로 엮는다.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재연(?!)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어주자...!

 

유튜브 채널 <역사킹> 링크

 

 

 

 

 

 

필자의 지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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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찌라시 한국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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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찌라시 세계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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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 아직 안 죽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