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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0. 일요일

 

 

필독

 

 

 

 

 

 

 

 

 

 

 

 

 

 

 

 

 

 

 

 

 

 

 

 

대철학자 칸트는 다음의 문장으로 유럽 기독교 사회의 맹공을 받았다.

 

 

 

 

 

 

 

 

 

“신의 존재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요청되는 것이다.”

 

 

 

 

 

 

 

 

 

즉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실재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인류가 신의 선량하심과 정의 없이 이 세상을 살고 있다면 너무 불행하므로, 신은 실재하는 편이 좋겠다는 뜻이다. 그는 신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았다.

 

 

 

 

 

 

 

 

 

[caption id="attachment_117017" align="aligncenter" width="1280"] 임마누엘 칸트[/caption]

 

 

 

 

 

 

 

 

 

 

 

 

 

 

칸트는 많은 철학자들에게 아마도 무신론자였을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물론 칸트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밝힐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잔존한 중세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였다.

 

 

 

 

 

 

 

 

 

칸트는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면서 자신의 신념과 기독교 사회의 요구를 절묘하게 절충했다. 그 하나가 ‘도박사 논증’이다.

 

 

 

 

 

 

 

 

 

전제 : 신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선택 : 우리는 신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1) 신의 존재와 믿음이 조합될 때 : 천국에 가서 행복한 영생을 즐기면 된다.

 

 

 

 

2) 신의 부재와 믿음이 조합될 때 : 천국이 있는 줄 알고 신앙 생활을 했지만 죽음 후에 아무것도 없다. 조금 손해 본다고 할 수 있다.

 

 

 

 

3) 신의 부재와 불신이 조합될 때 : 애초에 얻을 것도, 투자한 것도 없으니 공평하다.

 

 

 

 

4) 신의 존재와 불신이 조합될 때 : 실로 큰일 난다고 할 수 있다. 불신자로 죽었으니 영원히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것이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

 

 

 

 

 

 

 

 

 

 

 

 

 

 

 

 

 

 

 

 

 

 

 

칸트는 경우의 수 4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신의 존재를 믿는 편이 좋겠다고 논증한다. 이 논증에 경건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어쩌면, 기독교에 대한 맹신을 조롱하는 칸트만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칸트에게 진리란 인간과 사물 사이에 있었다. 거기에 종교가 끼어들 틈은 협소했다. 심지어 신앙을 음주와 같은 일종의 취향으로 해석했는데, 칸트는 ‘적당히 마신다’는 평생의 철칙이 있었다. 그는 과음하는 사람이나, 술을 아예 안 마시는 사람이나 동시에 경멸했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세속적이어서 경건함이 없는 사람과 종교를 맹신하는 사람을 동급으로 봤다.

 

 

 

 

 

 

 

 

 


 

 

 

1

 

 

 

 

 

 

 

 

18대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칸트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요청을 경험했다. 져서는 안 되었다.

 

 

 

 

 

 

 

 

 

야권세력은 유래 없는 총집결을 이뤄냈다. 여기에 안철수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해 판을 키워주었다. 나꼼수 등 대안 언론이라는 새로운 우군이 함께했다. 거기에 야권은 웹, 특히 유행일 뿐 아니라 이미 소통 방식의 주류로 등극한 SNS로부터 거의 무차별적인 지원사격을 받았다.

 

 

 

 

 

 

 

 

 

 

 

 

 

“우리는 편파적이나, 편파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 김어준

 

 

 

 

 

 

 

 

 

당위성도 확고했다. 독재자의 딸이, 독재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딸이기 ‘때문에’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인 요구가 있었다. 적어도 2012년 진보의 목적은 진보를 이루는 게 아니라, 퇴보를 막는 것이었다. 이는 훨씬 절박한 요구다. 그래서인지 투표율도 높았다. 투표장에 모인 2, 30대층의 비율은 충분했다.

 

 

 

 

 

 

 

 

 

이 구도에서도 진다면 진보 세력은 희망이 없을 터였다. 따라서 승리는 예상되거나 기대된다기 보다는, 실로 강력히 요청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패배했다.

 

 

 

 

 

 

 

 

 

박근혜 당선자의 득표는 과반이 넘었다. 총 투표자의 과반이 박정희의 독재를 선(善)으로 간주했다. 박근혜의 정치적 정체성은 박정희에게 모두 귀속된다. 박근혜에 대한 5, 60대 층의 압도적 지지는, 유신 독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그 시대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진보진영에게는 패러다임의 패배이며, 게임의 방법론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패배이다. 당연한 악(惡)으로 전제했던 것이, 이 민주주의 사회의 다수 구성원에게는 당연한 선(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선 결과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시작부터 이미 진 게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투표율이 80%를 넘겼어도 야권이 패배했으리라는 예측이 나온다. 투표의 가치니, 욕망이니를 떠나 애초에 머릿수에서 지고 있었다. 한국의 기득권층은 실로 유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욕망을 노골적으로 포장해 마트 전단지마냥 뿌린 이명박의 승리는 떠들썩한 할인행사와 비슷했다. 일회성 이벤트였다.

 

 

 

 

 

 

 

 

 

박근혜의 승리는 다르다. 박근혜는 그 주변은 독재로 배태된 폭력과 부조리를 극복하기는커녕, 포장지를 씌우지도 않았다. 시대교체니, 여성시대니 하는 표현은 어쩔 수 없는 요식에 불과했다. 구태는 청산되거나 개량되지 않고, 구태 그 자체로 승리했다. 그로테스크한 존재 증명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때로는 가장 안 좋은 방식으로.

 

 

 

 

 

 

 

 

 

 

 

 

 

 

더불어 위의 이유로, 문재인은 “역사에 죄인이 되었다.”는 말로 패배를 선언했다.

 

 

 

 

 

 

 

 

 


 

 

 

2

 

 

 

 

 

 

 

 

이 와중에 게임의 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수구 기득권층으로 완전히 넘어간 주류 언론의 응원이나, 검찰 등 공권력의 노골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애초에 게임이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옳다. 현 정권에서 천안함 사건을 포함, 조작과 은폐의 혐의가 짙은 사안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최소 3개 시/도를 아우르는 불법 선거운동 현장이 드러나기도 했다.

 

 

 

 

 

 

 

 

 

소신 있는 기자들을 대량 방출한 방송계는 최선을 다해 박근혜를 지켰다. MBC의 행태를 보면, 상식적인 사회에서라면 감옥에 있어야 할 김재철 사장이 방송권력의 한 축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죄를 지음으로써 면죄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있기에 더 적극적으로 양심을 팔아야 하리라. 김재철은 공영기업의 사장으로써 숱한 배임을 저질렀지만, 부와 권력에 대해서만큼은 한결같이 충절을 지켰다.

 

 

 

 

 

 

 

 

 

 

 

 

 

 

 

 

 

 

"혹시 김재철 사장님 되세요?"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김재철은 자신을 부정했지만, 그의 존재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회적 규범을 부정한다.

 

 

 

 

 

 

 

 

 

 

 

 

 

 

우리는 김재철이, 그리고 김재철과 같은 인간들이 공익을 해한 죄로 벌을 받기는커녕 그 죄만큼이나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들은 당당히 어깨를 펴고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

 

 

 

 

 

 

 

 

 

김재철의 경우는 야권 지지층이 박근혜의 당선에 절망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힘이 힘을 양산하는 사회를 인정해야 하는 것. 우리는 정의와 노력에 점수를 부여한다고 믿었지만 실은 부가 부를, 권력이 권력을 양산하고 그 과정은 아무리 부정해도 상관없다는 것. 18대 대선은 진리의 반열에 들 자격이 없는 것이 백주에 진리로 등극하는 광대극이었다.

 

 

 

 

 

 

 

 

 

공정하지 않은 방식이 승리했다. 애초에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패배하는 정의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룰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야권은 게임의 룰을 탓하는 데 심각한 핸디캡이 있다. 게임의 룰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상대를 악(惡)으로, 아군을 선(善)으로 치환해 18대 대선을 성전(聖戰)으로 설정할 근거의 상당 부분을 잃었을 것이다.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면 민주당의 무엇이 새누리당과 달라서 진보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겠는가.

 

 

 

 

 

 

 

 

 


 

 

 

 

 

 

 

3

 

 

 

 

 

 

 

 

 

언제부터인가 뉴라이트 계열의 몇몇 집단들은 스스로를 ‘근대화 세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해방 후의 근대화가 아니다. 이들은 왜정시대를 근대화가 진행된 시기로 본다. 물론 여기서 ’근대화’는 긍정적인 의미다.

 

 

 

 

 

 

 

 

 

친일로부터 시작된 기득권 세력의 정체성은 역사적 오류일 수밖에 없다. 친일파가 살아남았어도, 살아남은 것에 더해 부와 권력을 누렸어도 정체성을 수정할 수는 없다. 과거란 고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사회 일반의 시야를 ’교정’하면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고 한다. 친일파는 생존했고, 번영했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 일부, 또는 상당수는 이제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제 존경을 받고 싶은 것이다. 욕망은 그 자식 중에 하나인 자본처럼 스스로 증식한다.

 

 

 

 

 

 

 

 

 

그 끝없는 욕망을 우리는 과연 편안히 조롱하고 경멸할 수 있을까? 일본 천황에 두 번이나 혈서를 바치고 항일 운동 토벌의 최일선인 만주군에 장교로 입대한 박정희 혹은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 국민 다수의 선택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역사를 국민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누가 심판할 수 있겠는가.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삽화.

 

 

 

 

국가정신이란 국민 의지의 총합이다.

 

 

 

 

 

 

 

 

 

 

 

 

 

 

또한 명예의 상벌마저 없다면 공의를 위해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나마 들일 이유가 있을까. 예컨대 민족이 다시 외세의 침략을 받는다면 이제 대체 무슨 이유로 매국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나서야 하는가?

 

 

 

 

 

 

 

 

 


 

 

 

 

 

 

 

4

 

 

 

 

 

 

 

 

 

국민들은 역사를 심판하지 않았다. 면죄부를 주지도 않았다. 그 이상이다. 국민들은 친일과 쿠데타, 독재, 폭력의 역사를 지지했다. 과연 진보 진영의 생각대로,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무지할까. 그들은 과연 언론과 권력에 세뇌당한 피해자들일까. 우악(愚惡)을 저지른 역사적 채무자들일까.

 

 

 

 

 

 

 

 

 

그러나 유권자의 소양에 선거의 책임을 돌리는 소위 ’국민 개새끼론’, ‘20대 개새끼론'은 표현 자체로 모순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은 전적으로 유권자의 투표에 의거한다. 국가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국민 개새끼론은 현실 포기론과 동의어다.

 

 

 

 

 

 

 

 

 

마찬가지로 역사 역시 국민들의 의지를 벗어난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진보’로 한정한다-는 칸트가 신에 대해 고찰했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칸트 :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진보 : 역사의 지향점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밑의 질문은 다음의 말로도 전환 가능하다.

 

 

 

 

 

 

 

 

 

진보 : ‘가치’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도박사 논증을 대입해보자.

 

 

 

 

 

 

 

 

 

1) 가치를 지지한다 - 역사의 지향점과 가치는 존재한다

 

 

 

 

2) 가치를 지지한다 - 역사의 지향점과 가치는 부재한다

 

 

 

 

3) 가치를 포기한다 - 역사의 지향점과 가치는 존재한다

 

 

 

 

4) 가치를 포기한다 - 역사의 지향점과 가치는 부재한다

 

 

 

 

 

 

 

 

 

18대 대선만 놓고 보면, 우리의 상황은 2번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박사의 입장이라면 가치를 포기하는 편이 낫다.

 

 

 

 

 

 

 

 

 

 

 

 

 

 

 

 

 

 

 

 

 

 

 

 







 
 

기사의 결론도 과연 지금까지의 내용처럼 절망적이진 않을런지,

 

무규칙 이종매거진 <더 딴지>에서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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