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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증인, 당신은 죽어서 천당 가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반성 많이 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어린 아이들이 수장이 돼서 배 속에 시신으로 있는데 시신을 인양하면 안 된다, 시신을 인양하는 건 정부에 부담이 가중된다, 그래서 세월호 인양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 이런 말이 대한민국의 비서실장으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얘기입니까?”

 

- 김경진 국민의당 의원, 2016년 12월 7일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연재를 시작하며


2016년 12월 7일, 우리는 어느 “악마적” 인간의 민낯을 보았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의원들의 추궁을 요리조리 피해가다가 자신의 알리바이만큼은 천재적인 기억력을 보이며 따박따박 자기 할 말을 다 해낸다. 위기에 처하면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모시던 “윗분”부터 울분을 못 참고 분사한 부하직원, 비명횡사한 아들까지 모조리 팔아버리며 기어코 빠져나오려 온갖 발버둥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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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전까지 우리는 텍스트와 사진만을 통해 김기춘을 접해왔다. 그가 한국 현대사의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설마 인간이 그렇게까지 할까…’ 생각했다. 우리가 그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동화 속에서 봐왔던 괴물을 현실에서 보았다. 그야말로 악마였다.


평전문학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에서 프랑스 정치가 조제프 푸셰의 생애를 그렸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세계 전환기의 한복판에서 모든 당파를 이끌었고, 이 세계 전환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한 남자”였다.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다가, 루이 16세의 사형을 외치고 ‘리옹의 도살자’로서 수천 명의 인민을 학살하며 로베스피에르의 옹립에 앞장서기도 하고, 테르미도르 반동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그를 단두대로 보내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과 국민의회,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나폴레옹의 등장과 유럽 전쟁, 나폴레옹의 몰락과 왕정복고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이 격동기를 배경으로 푸셰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라마르틴, 폴 바라스, 탈레랑, 나폴레옹 등 온갖 영웅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오직 “태어날 때부터의 배신자, 시시한 음모가, 미끈미끈한 파충류, 타산적 변절자, 비열한 경찰근성, 배덕한”의 정신과 기질로 생눈길을 헤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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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년 뒤의 한국. 유신 쿠데타, 무수한 간첩조작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초원복집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세월호 참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한국 현대사의 흑역사마다 김기춘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사냥개로, 노태우 정권의 해결사로, 그리고 박근혜 정권의 왕실장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해내며 위로 또 위로 올라갔다.


이 사실들만 놓고 봤을 때 푸셰와 김기춘은 얼핏 흡사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 하나가 존재한다. 푸셰는 ‘역사의 칼’에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루이 16세의 딸이었던 앙굴렘 공작부인은 푸셰의 기회주의적 행각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푸셰는 ‘왕실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채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외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츠바이크는 “한 번도 이상에 봉사한 일 없이, 인류의 도덕적인 정열에 헌신한 일도 없이 언제나 찰나와 인간 사이의 사라져버리기 쉬운 덧없는 총애에만 봉사한 죗값을 뒤늦게 높은 이자를 붙여 지불하게 된 것”이라 평한다.


그렇다면 2017년의 대한민국은 김기춘에게 그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김경진 의원은 김기춘이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 일갈했다. 그러나 엄연히 말해, 그 말은 틀렸다. 쿠데타와 시민 학살의 피를 묻힌 손으로 권력을 잡은 독재자들에 부역해도, 온갖 비인간적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해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정당하게 선출된 대통령을 탄핵해도, ‘미스터 법질서’라는 칭호까지 얻으며 여전히 ‘민주공화국’에서 권력을 움켜쥐고 호의호식할 수 있다는 이 현실 자체가 이미 지옥이요 ‘헬조선’이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고 노무현이 부르짖은 지 14년이 지났다. 지금 김기춘으로 상징되는 반칙과 특권, 기회주의의 역사를 확실히 청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비극이 될 것이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실패가 그러했듯. 민주화 이후 미진했던 군부 독재 일당에 대한 심판이 그러했듯.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가, 제대로 적폐를 청산하지 못했던 우리의 지난 역사가 김기춘이라는 ‘악마적 인간’을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려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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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연대기: 프리퀄


경남 거제도의 장목면에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대금산이라는 우람한 산이 있다. 신라시대에 쇠를 생산했던 곳이라 하여 ‘대금산(大金山)’이라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풀과 진달래가 온 산을 덮고 있는 모습이 크게 비단을 두른 것 같다 하여 ‘대금산(大錦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해발 438m의 정상에 오르면 부산ㆍ마산ㆍ진해가 눈 아래 펼쳐지고, 저 멀리 대마도가 아련히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풍수쟁이들 말에 따르면, 에베레스트 산에서 시작된 정기가 백두산을 거쳐 백두대간을 따라 일본으로 뻗쳐나가는 그 길목에 대금산에 있다고들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이 산의 기운이 심상치 않은 건 맞는 듯하다. 이 조그만 동네 장목면에선 유난히 정치인들이 많이 나왔다.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이 이곳 출신이고, 노무현이 자신의 책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던 김정길 전 의원도 이곳 출신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현대사의 ‘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1928년 이곳 장목면의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939년 11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에서 5km 떨어진 시방리에서 아버지 김석윤과 어머니 강신방의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니,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김기춘 어르신 되시겠다. 당시 아버지가 대구 잡이 어장을 경영한 데다 약간의 농사까지 지었다고 하니 꽤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의 든든한 뒷받침으로 김기춘은 외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부산ㆍ경남 지역에서 명문으로 꼽혔던 마산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김기춘이 법관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 이때였다. 고시에 여러 번 실패하고 역사교사로 주저앉은 선생님에게 “너는 공부도 잘하고 논리적이니까 고시 공부를 하면 틀림없이 훌륭한 법관이 될 거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은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훌륭한 법관이 될 거라는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고 법을 악용하는 도적 ‘법비(法匪)’가 되었으니….


법관을 지망하던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아들이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부산사범학교에 지원하여 합격 통보까지 받았으나, 김기춘은 ‘내가 택한 길로 가자’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경남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입학하게 된다. 법관이 되기 위해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를 목표를 열심히 공부해서 또 다시 보기 좋게 합격한다. 무슨 시험만 봤다 하면 그야말로 ‘합격’, ‘합격’, ‘합격’의 연속이다.


그렇게 입학한 서울대 법대에서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에 몰두하며 3학년 때는 동기 중 유일하게 사법고시(12회)에 합격한다. 이때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ㆍ15 부정선거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혁명으로 분연히 일어서던 때다. 시위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 서울대학교 또한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껴나갈 수 없었다. 4월 19일 하루에만 서울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7명이 사망했다.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서울대학교 문리대 4월 혁명 선언문)”을 부르짖으며 거리에 나선 자신의 동기와 선후배들을 도서관에서 바라보며 김기춘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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