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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망할 놈의’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망할 놈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유신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망쳤을 뿐 아니라 결국 박정희 대통령 본인의 머리를 날려 버려 시신 확인도 못하게 됐던 참사의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중앙청 앞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진주했다. 수도방위사령부 마크가 선명한 장갑차가 광화문을 뒤로 하고 포신을 세종로로 향하고 있었다. 즉, 나라의 군대가 국민을 향해 공격 태세를 갖춘 것이다. 아울러 정권의 마수는 평소에 밉보였던 언론인과 재야인사,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을 긁어들인다. 그 가운데 특별히 박정희가 찍은 사람이 있었다. 이세규 의원이었다.

그는 예비역 준장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육사 7기 출신의 초급 장교로서 용감하게 싸운 이였으며 부패와 횡령이 일상화 됐던 당시의 군대에서 거의 독야백백한 군인으로 유명했다. 그의 별명 중 하나는 콩나물 대령이었다.

대령 시절 자신의 월급을 나눠 불우이웃들에게 전달하는 바람에 살림이 반 토막이 나서 손님이 왔을 때 콩나물국 한 그릇만 내놓는다 해서 ‘콩나물 대령’이라 불리웠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그 부인에게는 안스러울만큼 엄격한 남편이었다.

사단장 시절 임지로 면회를 간 부인과 자녀들은 ‘민간인이 군의 식량을 축낼 수 없다’는 이씨의 고집(?) 때문에 서울에서 쌀과 부식을 가져가야 했으며 군용차량에 발도 못 올리게 해 관사로부터 버스터미널까지 수 Km 길을 걸어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 중앙일보 1993년 7월 26일자)

그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던 장성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집 한 채 없는 장성이었다. 이세규는 3선 개헌에 완곡한 반대 의사 표명을 한 것이 빌미가 돼 군복을 벗은 뒤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서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야당 입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국방 전문가 자원이었다. 영화 〈실미도〉의 실제 주인공들이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 시내에서 자폭한 사건에서 정부의 초기 입장은 일관되게 ‘무장공비’였다. 이 거짓말을 폭로한 게 바로 이세규 의원이었던 것이다.

이랬으니 유신이 선포되자마자 다른 국회의원들과 더불어 이세규 의원은 일착으로 군 정보기관에 끌려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군 정보요원들로부터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왕년의 남로당 군사 총책 박정희의 히스테리는 대단했다. 이세규가 군 내에서 반정부 인맥을 꾸려 자신의 발밑을 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을까, 대통령의 하수인들은 이세규에게 인정사정없는 고문을 가하면서 유신 지지 서명을 강요하는 한편 이세규의 ‘인맥’과 군내 동조자 명단을 집요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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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당하던 중 이세규는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깨문다. 그러나 고문의 고통 중에 혀를 정확히 깨물지 못하고 대신 앙다문 서슬에 의치가 부러져 나간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지자 고문하던 이들도 당황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왕년의 용감한 소대장, 불우이웃들에게 자기 월급 반을 쪼개주던 콩나물 대령, 부인에게 “당신 음식은 당신이 싸가지고 오시오! 민간인이 어딜 군 밥을 먹어!”라며 호령하던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군인. 한때는 박정희가 아끼는 제자이자 후배였던 이세규는 입에 피를 가득 문 채 이렇게 절규한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성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너희 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 프레시안 2002. 10.16 )

이세규 장군은 그 후 1년 동안 7번이나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그 후 지팡이를 짚고 생활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고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일체의 공직을 마다한 채 칩거하다가 1993년 사망했다. 그의 사망을 보도한 위 《중앙일보》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문 도중 한때 혀를 깨물고 자결을 시도할 때 부러진 의치를 이씨의 부인 권혁모 씨(60)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부인은 어떤 심경으로 살았을까. 아니 살아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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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규 사단장 휘하에서 군 생활을 했던 이의 회고를 들어본다.

그의 가족들은 서울에서 처가 집을 빌려 지냈다. 부인이 다녀 갈 때 군수참모가 차비를 좀 보탰다가 어디가 구린지 조사하래서 감찰 검열을 받았다. 그런 사단장은 어디가 구린지(?) 연말에 은행 대출을 받아 사령부 장교들에게 정종 한 병씩 돌렸다. 그는 수시로 본부중대 식당에 들려 하수구까지 챙겼다.

달이 밝은 밤, 이상한 소리에 내다보니 당번병이 종아리를 맞고 있었다.

다음날 알아보니 모처럼 저녁밥을 다 비운 사단장이 “오늘은 못 보던 나물이 있구나” 말을 걸었고 신바람이 난 당번은 “쌀이 조금 남아서 시장에서 나물과 바꾸었습니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밤중에 불려나가 “이놈아 나라 쌀을 내다 팔아?” 피멍이 들도록 맞았다는 것이다.

Korea Daily Sanfransisco 2007.11.29 이재상 논설위원 <이세규 사단장> 기사 중

이런 분들도 있었다. 아니 이런 군인들과 그 군인들의 강직함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하다가 사모님 대접 한 번 제대로 못받고 끙끙 앓다가 간 군인의 아내들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자기들이 데리고 있던 공관병들로부터 폭로당한 육군 대장과 그 사모는 앞서 말한 모두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렸다.

육군 대장이 사병들의 고발로 불명예 제대하는 것이 ‘명예를 먹고 사는’ 군에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으나 도대체 우리 군은 무엇을 지키는 군대인가. 인간의 존엄함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군대다. 육군 대장조차 사람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사실이 폭로된 만큼 그 이상의 불명예가 있는가. 육군 대장 부인이 남편의 부하를 자신의 부하로 여기는 개차반만큼의 치욕이 있는가. 여기서 소중한 것이 육군 대장의 명예인가 민주공화국 육군 자체의 명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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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이세규 장군 얘기로 돌아간다. 이세규 장군의 병적인(?) 공사 구분 속에 그 흔한 ‘1호차’ 한 번 못 타 보고 시골길 수십리 걸어 남편을 만나러 가야 했던 권혁모 여사 역시 돌아가 남편 곁에 묻힌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부인이 평생 보관했다는 이세규 장군의 의치의 행방이다.

평생 명예로운 군인으로 대한민국을 지켰던 그가 독재의 야수 앞에 뱉어냈던 그 의치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군대가 길이 보관하고 기리고 받들어모셔야 할 보석같은 알갱이가 아니겠는가.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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