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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된 사실

 

1. 6 9홍콩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가 열렸다홍콩 인구는 약 740만이니 웬만한 사람은 다 나온 셈이다. 2014년에 홍콩 행정장관 후보 제한에 반발해 있었던 시위는 우산혁명으로 불리며 유명해졌는데당시엔 70여 일에 걸쳐 일어나 정확히 셀 수 없지만최고조일 때와 비슷한 인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2. 시위의 명목은 홍콩에서 입법 상정된 범죄인 인도법의 수정안 때문이다주된 쟁점만 소개하자면그간 홍콩은 자체 조례에 의거해 협정을 맺은 나라들만 대상으로 범죄인을 체포 인도해왔는데그 대상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제외가 명기되어 있었다그러다 4 3홍콩 입법회에 수정안 초안이 올라왔고 여기엔 제외 지역이 빠진다수정안의 명목은 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나라의 범죄자도 체포 인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이지만홍콩의 자치권을 의미했던 중국 제외’ 조항이 빠졌다는 것이 키포인트다또한 해당인물이 범죄자임을 입증하는 근거 서류도 법원이나 재판관당국의 서명이 필요했던 이전과 달리 소정의 방식으로 인증만 하면 되어 상당히 약식화되었다즉 중국 당국이 범죄자로 지목한 인물을 영장이나 정식서류 없이도 구금 인도받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홍콩 입법회 역시 우리나라 국회처럼 법사위 같은 기구를 두어 법률 심사를 하게 되어 있다초안이 4 3일에 상정됐고 민감한 사안이니 본회의에 오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5 20일 홍콩 행정부는 빠르게 본회의에 상정할 것을 요구했고 내무위원회에서 이를 표결로 처리해, 6 12일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었다상정되면 친중파가 많은 입법회 구조상 통과가 무난할 것으로 본다이후엔 수정안 추가 및 확인 절차 정도만 남게 되고행정장관의 서명으로 새 인도법은 법적 효력을 갖는다.

 

3. 따라서 본회의 상정, 현지에서는 二讀이라 불리는 절차가 진행되는 6 12일이 시위의 최대 분수령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다행히 상정이 미뤄지면서 눈앞의 고비는 넘겼다. 홍콩 당국에서 시위 규모와 확산에 매우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미 국무부 대변인은 6 10일 브리핑에서 홍콩 정부의 개정안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한 국가 두 체제’, 일국양제의 지속적인 침해가 홍콩의 지위를 위태롭게 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중국과 홍콩의 매체들에선 이를 두고 내정간섭이라며 비판하며, 시위 세력을 부추기는 미국의 획책에 선동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동방일보(Oriental Daily) 11일자 뉴스에서 시위로 부상당한 경찰기동대원의 사연을 전하며,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폭도들을 감싸주는 사람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5. 홍콩 매체는 이번 시위를 다루면서 친중적인 논조가 우세하다. 그나마 홍콩에선 다루기라도 한다. 중국엔 아예 없다. 바이두든 시나든 逃犯條例’ (범죄인 인도법)을 검색하면 6월 뉴스가 없다. 분위기의 차이를 전달하고자 이렇게 비교해보았다.

 

구글에서 逃犯條例검색해서 이미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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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홍콩에서 逃犯條例검색해서 이미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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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바이두에서 逃犯條例검색해서 이미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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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신호탄인가?

 

폭도들의 준동이라고 낙인찍는 홍콩의 매체들도, 이번 시위를 범죄인 인도법에 국한한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 배경엔 빈부격차와 실업, 갈수록 쇠퇴해가는 홍콩 경제에 대한 우려가 있고, 미래를 꿈꾸기 힘든 홍콩인들의 불만이 누적돼 왔다고 지적한다. 홍콩은 여전히 부유한 지역이지만 1997년 중국 반환 이전에 누렸던 명성을 잃어버린 게 사실이다.

 

그러나 홍콩인들의 불만을 경제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때에도 홍콩에선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고 얼마 전 30주년 추도식에도 많은 사람들이 빅토리아 파크에 운집했다. 중국의 간섭이 점점 강해지면서 사람들이 누리고 있던 자유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홍콩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민주화 열사를 향한 추도사는 곧 홍콩 스스로를 향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로서도 홍콩 사람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자유를 누리다가 정권에 의해 침해당하는 느낌이 어떤 건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홍콩의 문제는 그것을 자의로 되찾기 어려운 구조라는 데 있다. 홍콩의 행정장관은 투표로 뽑지만, 사실상 중국 정부에 의해 내정된 후보들에 한정돼 있다. 누굴 뽑으나 어차피 친중파란 얘기다. 더군다나, 50년으로 기약된 자치권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뭔가 하지 않으면 곧 중국 인민과 같은 꼴이 된다는 절박함이 홍콩 시위의 근본적인 동인이다.

 

 

미중 무역전쟁의 변수

 

며칠 전인 6 7, 미국 국방부가 발간한 전략보고서에서 대만을 국가(Country)’로 표현한 사실 때문에 난리가 났다. 사실 대만을 콕 집어 국가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함께 우방국가로 지적하며 ‘All four countries’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하나의 중국원칙 하에 대만을 지역(region) 취급하도록 요구한 이래, 이 원칙을 깬 사례가 없다. 당연히 중국을 도발하는 한편 대만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국의 꼼수로 보인다. 꼼수라고 한 건, 보고서 상의 표현이기 때문에 추후 미중 협상에 따라 취소할 여지도 많기 때문이다. 정작 대만은 내부에서도 친중파와 독립파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고, 전면적 긴장 관계를 초래할 우려 때문에 생각보단 반응이 어정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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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우지아롱(吳嘉隆)이란 경제학자는 미중 무역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분석과 가설을 내놓았는데, 미국의 진짜 의도는 중국의 현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면 예상 지점을 남중국해, 대만, 북한 3곳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남중국해와 북한은 미국이 공격함으로써 충돌이 시작되지만, 역으로 대만은 중국이 선제공격해야 시작된다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면 미국은 대만을 이용해 중국에 도발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예측 이후에 미국의 전략보고서 사건이 터졌다)

 

중국이 먼저 무리수를 쓰고 이에 대응하는 방식이 미국에 더 유리한 조건인 것은 분명하다. 이를 감안하면 미국 국무부가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또한 홍콩 사람들도 국제적인 반중 분위기에 힘입어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은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자치가 보장된 50년 내에 홍콩에 체제 이상이 생기면 개입 가능한 단서조항을 남겨 놓았다. 정말로 영국이 개입한다면 중국과의 충돌을 감내하겠다는 의미이므로 당초엔 현실화되기 어렵다고 보았지만, 미국이 나선 지금은 또 얘기가 묘해졌다. 따라서 홍콩 시위를 선전에 주둔한 중국군이 진압하는, 2의 천안문 사태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홍콩 사람들로선 어쩌면 이 시국이 최후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강호의 남방, 관제의 북방

 

여기부터는 개인적인 해석과 억측이니 재미로 보아주시라.

 

<일대종사>란 영화가 있다. 왕가위가 감독하고 양조위가 엽문 역할로 나오는, 쿵푸 영화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예술영화다. 엽문이 아직 젊은 시절, 북쪽에서 무술계를 평정하고 중화무술회를 창립한 궁() 노사가 남쪽으로 내려와 불산(佛山, 황비홍의 고향으로 유명)을 방문한다. 그는 중국 무술을 통합할만한 남방 무술계의 고수를 찾아 자신의 뜻을 계승하길 바랬다. 남방 무술인들은 회의 끝에 엽문을 추천하고, 궁 노사는 그를 초대한다 다들 궁 노사가 한판 붙으리라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그는 밀떡을 하나 집어들고 엽문에게 쪼개보라 한다. 일종의 무공 테스트 겸, 엽문의 됨됨이를 알아보려는 속셈이었다. 한동안 춤사위 같은 몸놀림이 이어진 후, 젊은 엽문은 노사의 밀떡에 손가락을 얹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 큰데 어찌 남북에 그치겠습니까. 애써 하나되려 함은 곧 스스로 발을 묶는 일. 선생께서는 이 떡을 무림으로 보시겠으나 저에게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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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남방은 북방과 다르다. 북방이 통치와 통제의 역사라면, 남방은 협력과 견제의 역사다. 이런 이분법적 관점이 때로는 중국 문화를 이해하는 힌트를 주기도 한다. 이 차이를 느끼고 싶다면 삼국지연의에서 위와 오의 차이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 위의 인걸들은 조조의 인선에 의해 뽑혔고 점차 관료제로 정착되지만, 오의 장수들은 손씨 가문의 가신들을 제외하면 강동 호족들이 천거한 인물, 혹은 그 자제들로 구성돼 있다.

 

아니면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파()와 가()의 구별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태극권으로 유명한 무당파(武當派)를 예로 들어보자. 처음엔 장삼봉 같은 시조가 두각을 나타내어, 이를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며 근처의 소규모 도장과 무인들이 흡수된다. 이후엔 시스템이 체계화되면서 내용과 형식이 갖춰지는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무협지에 단골로 나오는 남궁세가(南宮世家)는 지역 호족이고 집안에 내려오는 절예가 있다. 무술은 친족에게만 전수되므로 인물에 따라선 지독히 약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세가를 지탱하는 근본은 무예가 아니라, 그 지역을 관장함으로써 획득한 정치경제적 토대다. 무당파는 계승자 후보군이 있으므로 일정 수준의 고수 집단이 보장되지만, 제자들의 수가 반드시 많지는 않으며 환경 변화에 따라서 핍박받아 굶주리기도 한다. 반면 남궁세가는 고수가 없을 때도 있지만 군사적 병력의 규모에선 무당파보다 낫고, 정치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한다.

 

이러한 차이가 반드시 남북에 따라 나타나지는 않는다. 또한 양쯔강이든 황하든 어떤 지리적 기준으로 남북을 가르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북은, 중국의 중앙정부가 위치한 곳이 전체적으로 중국의 북부에 위치했기 때문에 생긴 개념이다. 특히 원과 청이 베이징을 수도로 하면서, ‘지배자의 통합이란 의미가 북에 덧씌워졌다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남은 기존의 한족 문화를 아우르는 개념이며, ‘공존과 견제의 의미를 갖는다.

 

객가촌(客家村, Hakka)은 남방 문화의 양태 중 하나다. 집들은 담벼락 또는 성벽의 역할을 담당한다. 중앙에 텅 빈 공용공간을 확보한 경우도 많다.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성채와 달리, 객가촌은 생활공간 자체가 도적을 막고 기후에 대비하는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다. 학자, 무술가, 농사꾼 등 직업군도 많고 객가촌의 형태, 거점 지역도 너무나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객가촌 출신의 인재, 객가인들은 중국 역사의 변혁기에 자주 등장한다. 19세기 태평천국의 난에서 주동 인물은 거의 객가인들이다. 쑨원 역시 객가인이란 설이 있으며, 마오쩌둥, 덩샤오핑, 리콴유 모두 객가인이라고 하니 이상한 느낌까지 든다. 객가인 항목을 검색해보면 중국 근현대사의 웬만한 주동인물이 다 망라되어 있다. 도대체 객가가 뭐길래 이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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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가촌의 한 형태. 원통형, 정방형, 직사각형 등 촌락의 형태는 다양하게 발견된다.

 

객가는 딱 잘라서 뭐라고 정의내리기가 곤란하다.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하자면, 지역 호족으로부터 유래된, 그러나 더 이상 호족이 존재하지 않는(그런 환경에서 멀어진) 현실에서 그 후손들이 이합집산하며 한족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해온 것이 객가다. 규모가 큰 세가들은 정치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점차 관부의 시스템에 흡수되었다. 재상이나 장수를 자주 배출한 소위 명문가들이다. 그러나 중국 남부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객가들은 많은 뜨내기들과 소규모 가문의 공동집합체로, 출신 인재들에게서 한족 문화란 모호한 특징 말고는 일관된 정체성을 찾기가 어렵다. 어떻게 보면, 객가 출신이란 그냥 강호인이란 무협지적 표현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강호인들도 ()’라는 가치관으로 묶을 수 있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객가를 표현하자면 결국 ()’라는 추상적인 말로 귀결될 것이다. 본토의 지배자가 누구든 간에 이 정체성은 다르지 않다. 때문에 명나라 패망 이후에 흩어진 한족들로 인해 객가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매한 이 정체성은 중국이 격변을 맞이했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 평화시엔 그 모호함 때문에 눈에 띄지도 않고, 공존과 견제의 가치관이 몸에 배어있는 덕분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환경이 급변하고 균형이 깨어진다 싶으면, 특히나 관부의 통치 시스템이 잘못 작동한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인재들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마오쩌둥의 경우에서 보듯, 권력을 잡고 나서 소위 ()’의 시스템으로 바뀌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중국의 기저에 공존과 견제라는 ()’의 세력이 늘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근대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가능해진 중앙집권 방식이 순조롭게 정착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건 민간의, 무형의 세력이므로 시진핑이 상하이방이나 태자당을 누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중국 정치가 지금까지도 민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를, 나는 이 오래된 전통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지배자 입장에서, ‘은 무형의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이 곧 평화다. 옛 성인들은 모두 좋은 정치를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충고했다. 중국의 윤리 철학을 조금만 달리 해석하면 다 군주학으로 보이는 이유라고 나는 짐작한다. 만약 정치에 문제가 생기고 이 물리적 근거를 얻게 되는 조건이 갖춰지면, 중국은 다시 분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인위로 통합하지 말고 놔두어라, 목표보다 삶 자체가 중요하지 않느냐는 것이 서두에 엽문이 한 말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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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민주화는 곧 분열이다

 

홍콩에 대한 중국의 우려가 무엇인가? 민주화? 물론 그렇긴 하다. 그러나 홍콩의 민주화가 의미하는 현실은 분열이다. 한국인인 우리는 가끔 한족이나 광동어같은 요소로 중국과 홍콩을 묶거나 구별한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진짜 명분은 누가 중화를 대표하는가이다. 대통합과 굴기를 내세운 중국 공산당의 억압은 본토에서 어느 정도 먹힐지도 모른다. 홍콩은 그렇지 않다. 논어에 따르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가혹한 세금이라고 했다. 여기서 세금은 개인의 자유와 성과를 의미한다. 지금 홍콩은 딱 그렇게, 중국으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요구받는 처지에 놓여있다. 여인이 세금을 피해 도망가듯이, 홍콩은 민주화로써 중국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그 물리적 상태는 독립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홍콩은 중국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충분한 경제적 여건을 갖고 있다. 홍콩에 결여된 것은 군사적 역량일 뿐이다. 그러니 미중 갈등 와중에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격화된다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다. 지금 추세라면 홍콩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을 때 중국을 편들 나라가 전혀 없으며, 특히 홍콩 인근의 동남아시아 쪽에선 독립을 쌍수로 환영할 것이다. 만약 정말로 홍콩 독립이 가시화된다면 이것이 대만에, 티베트에, 위구르에 끼칠 영향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는 한족 중심의 중국인들에게 내재된 전통적 중화의 관점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다. 공존의 가치를 침해한 쪽은 중앙이고, 대통합을 전제로 하는 억압엔 견제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이다. 세계에 퍼진 화교들이 중국 정부를 지지하겠는가, 아니면 홍콩의 명분을 따르겠는가? 홍콩 시위 문제가 중국의 정통성 헤게모니까지 번진다면 비약이 심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런 인식이 중국을 변혁시키는 무의식적 동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현재 미중 갈등에서 홍콩 문제가 매우 첨예하게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이 정말로 중국을 조질 생각이라면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입장은 지속적으로 표명될 것이다. 반대로 중국은 최대한 미국을 구슬려 화해 무드로 접어든 뒤 홍콩에 중국군을 투입하려 할 것이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 홍콩 시위는 이미 중앙이 용인할 선을 넘었다. 법률 본회의 상정이 시위 때문에 연기되다니, 중국에서 생각할 수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어쩔?

 

홍콩에 관심이 집중될수록 남북한 통일에는 이롭다. 홍콩과 비교하면,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 주도하에 남북한이 통일되면 중국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겠지만, 홍콩이 독립하면 중국은 치명상을 입는다. 미국과 딜을 한다면 당연히 홍콩을 선택할 것이다. 서글픈 현실은 이 주도권을 결국 미국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얼마나 조지려 하는가, 아예 망가뜨리려 하는가 아니면 이익을 얻는 선에서 그칠 것인가, 이에 따라 홍콩이든 우리든 운명이 달라진다.

 

때문에 이전 화웨이 기사 때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어떤 입장을 표명하거나 행동을 취할 때가 아니다. 중국이 확실히 힘을 쓰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까지 한국은 미국의 발자국만 밟는, 그것도 최대한 떨어져서 밟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중국과 미국이 힘을 겨루는 전장에 서 있다. 화웨이가 망해서 얻는 반사이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6.25 세대인 옛 어른들과 달리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당연히 여기고 살았다. 그런 우리가 곧 역사적 격변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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