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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요하지 아니한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이래요

 

난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한글 맞춤법 강의>를 전공필수로 들은 국문과 졸업생이다. 하하. 그런데다가 맞춤법을 헌법처럼 여기는 기자 출신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맞춤법에 좀 예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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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에서 맞춤법 지적질하는 사람. 지적질까진 안 한다만, 맞춤법 틀린 걸 보면 은근히 신경 쓰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러는 너님 글은 완벽하느냐고? 절대 아니다. 여전히 헷갈린다. 내 글에도 맞춤법 틀린 거 투성일 거다. 여전히 난, 이 세상에서 한글 맞춤법이 제일 어렵다.

 

그런 내가 ‘노가다’라는 단어는 고집스럽게 쓴다. 표준어가 아닌 줄 알면서도 말이다. 더욱이 이런 예민한 시기에, 일본어에서 파생한 단어를! 이번 편에서는 그 이유를 좀 말해볼까 한다.

 

노가다판 용어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노가다라는 단어도 일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어 중 ‘ど-かた[도가따]’라는 단어가 있다. “토목 공사 또는 그것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발음은 변형되고, 뜻은 좀 확장됐다. 우리가 아는 그 ‘노가다’로 재탄생한 거다.

 

근데, 이 단어가 아주 골 때린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노가다를 찾아보면 “막일의 잘못”이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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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노가다’라는 단어는 일본어의 잔재로, 잘못된 단어니까 쓰지 말라는 거다. 여기까진 오케이! 대신, 표준어 ‘막일’이라는 단어를 쓰라는 거다. 막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막일’을 이렇게 정의한다. 

1. 이것저것 가리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 ≒막노동.

2. 중요하지 아니한 허드렛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딱 저렇게 나와 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연관 단어도 정리해 놨다. “비슷한 말=막노동 / 잘못된 표현=노가다”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노가다꾼이 직업인 나는, 이것저것 가리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일 하는 노동자이거나, 중요하지 아니한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게 도대체 말인지 방귀인지 모르겠다. 막일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이미 멸시가 가득 담겨 있다고 말하면, 좀 오버스럽다고 하려나. 모르겠다. 난 그렇게 느껴진다.

 

언어는 의식을 지배한다고들 한다. 저런 뜻이 담겨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도저히 막일, 혹은 막일꾼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었다. 차라리 노가다 또는 노가다꾼이라고 쓰고 말지. 해서, 더 고집스럽게 노가다라고 써왔던 거다.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표준어가 아님에도 ‘노가다’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것에 관한 변명 아닌 변명. 두 번째는 이 글을 혹시라도 읽을지 모를 언어학자, 혹은 표준국어대사전 관계자, 혹은 그런 자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부탁이다. 노가다를 대체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표준어 좀 만들어달라고. 그럼 얼마든지 기분 좋게 써주겠다고. 허드렛일이 뭐냐 진짜.           

 

 

Worker가 아니라, A diligent worker라고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얘기해보련다. 얼마 전, 퇴근하고 현장을 나오는데 몇 사람이 전단을 나눠줬다. 받아보니, 건설근로자공제회라는 곳에서 주는 전단이었다.

 

건설근로자공제회가 뭐 하는 기관인지는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 중요한 건 ‘근로자’라는 단어다. 가끔 보면 근로자=노동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근로자가 노동자보다 고급스러운 단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사전에서 근로자는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뜻만 놓고 보면 얼추 비슷하다.

 

문제는 근로자라는 단어에 담긴 의도다. 근로자(勤勞者)를 하나하나 뜯으면 부지런할 근(勤), 일할 노(勞), 사람 자(者) 다. 직역하면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이다. 그냥 ‘Worker’가 아니라, ‘A diligent worker’다. 

 

이게 뭐가 문제냐고? 문제다. 아주 심각한 문제다. 5월 1일, 다들 아는 것처럼 근로자의 날이다. 이날이 원래는 노동절이었다.(1957년, 대한노총 창립일에 맞춰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었다. 날짜를 5월 1일로 바꾼 건 한참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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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지식채널e>

 

노동절이었던 걸 근로자의 날로 바꾼 건 박정희 군사정권 때다. 1963년 4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군사정권은 관련 법률을 개정하면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전부 ‘근로’로 바꿔버렸다.

 

노동을 근로로 바꾼 데엔 두 가지 의도가 숨어 있었다. 우선, 노동이라는 단어에 담긴 ‘사회주의적 냄새’가 맘에 안 들었던 거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치자. 냉전 시대였으니까. 해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없애버리고 싶은데, 그러자니 대체할 단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가져온 단어가 근로다. 다. 시. 가져온 거다. 어디서? 일제강점기에서! 1941년 일본은 ‘국민근로보국령’을 발효하고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 가 근로보국대를 조직했다고 기록한다. 

 

짐작컨대, 여기에는 “일본대제국을 위해, 천황폐하를 생각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부지런히 일만 하라.”는 아주 나쁜 의도가 담겨 있었을 거다. 그런 나쁜 단어를 그대로 가져온 게 군사정권이다. 아마도, 비슷한 의도였을 거다.

 

“암~ 노동자라면 마땅히 부지런하게 일해야 하는 사람이지. 이제부터 너희들은 근로자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 부지런히 일만 해!!! 괜히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푸하하하.”

 

2018년 3월, 청와대에서 개헌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개헌안에는 근로라는 단어가 노동으로 일괄 교체되어 있다. 환영할 일이다. 그에 앞서 2017년 8월, 박광온 의원이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관심 갖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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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지만,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 노동자가, 사용자를 위해 부지런히 일만 해야 하는 기계는 아니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건설근로자공제회는 ‘근로여건 및 소득수준이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고용이 불안정한 건설근로자들 간의 상호부조 및 복리증진을 도모하고 노후생활 안정을 위하여 1997년 설립된 기관’이다. 한마디로 노가다꾼 복지 챙겨주는 공공기관이다. 그런 공공기관이 근로자라는 단어를 쓰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전단을 받으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무슨 뜻인지 알고나 좀 썼으면 해서 덧붙여봤다.

 

다시 말하지만, 언어는 의식을 지배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