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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신라는 본디 삼국 중에서 가장 취약한 나라였어. 고구려의 속국 비슷한 신세였고 왕의 아들들이 고구려로 왜국으로 볼모로 가야 했던 약소국이었지. 그런데 그런 나라가 갑자기 급성장해서 한반도의 중심을 차지했고 급기야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거꾸러뜨렸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던 당나라마저 끝내 몰아내는 저력을 발휘하게 됐단 말이지.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백제를 멸망시켰던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말을 빌려 보자.

“신라 왕은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백성은 윗 사람을 어버이와 형같이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지만 쉽게 점령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하나라 할 김유신의 악전고투나 일본과 당나라를 제 집 드나들듯 했던 김춘추의 대장정, 그리고 관창, 반굴로 대변되는 화랑의 희생 등 신라 상층부의 솔선수범은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해당할 거야. 그런데 당시 신라 역사를 보면 하층민들이 기꺼이 나라를 위해, 또는 자신의 상전 대신 목숨을 바치는 일들이 자주 보여.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김춘추가 고구려 수군에게 들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김춘추의 부하 온군해는 김춘추의 옷을 대신 입고 죽음을 맞이하지. 적진에 돌진하여 군의 사기를 드높이라는 김유신의 명령을 받고 적진에 뛰어든 비령자 부자(父子)와 그 종 합절의 이야기는 이후 조선 시대 삼강행실도에 실릴 만큼 유명해.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신라인들의 충성심이 선천적으로 높았던 것일까? 귀족들의 솔선수범이 그만큼 커서 아랫 사람들을 감응시켰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열기와 구근의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이유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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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해, 당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평양성을 공격해. 그러나 겨울이 오고 양식은 떨어졌다. 또 한 번 ‘쌀 배달꾼’ (영화 <황산벌> 기억나지?) 김유신이 나서야 했어. 김유신은 쌀을 싣고 신라 군대와 함께 평양으로 향해. 그런데 고구려군은 수송로를 막아서면서 시간을 끌었어. 무엇보다 낭패인 건 쌀 배달을 받는 쪽과 연결이 끊긴 것이었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파악하고 기간이라도 정해야 목숨을 걸고 쌀 배달을 하든 말든 결정할 거 아니겠어. 쌀 싣고 부득부득 평양까지 갔는데 당나라군이 깨끗이 철수했다면 신라군 전체가 오도가도 못할 위험에 처하는 거고 말이야.

그때 열기라는 용사가 나서서 구근 등 15명만 이끌고 고구려 수비대를 돌파하여 평양성에서 배 곯고 얼어 죽어 가던 소정방에게 소식을 전하고 복귀하는 데 성공해. 김유신은 크게 기뻐하여 급찬 벼슬을 내린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조카인 임금에게 말한다. “(급찬 벼슬도 모자라니) 사찬 벼슬을 더해 주소서.” 그러자 임금은 사찬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고개를 꼬았어. 우리가 알다시피 신라는 골품제 사회, 아무래도 그들은 신라 17관등 중 8등급에 해당하는 사찬 벼슬에는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김유신은 벌떡 일어나 조카이기도 한 임금에게 두 번 절하고 말한다.

“벼슬은 공기(公器)로 공에 보답하여 주는 것인데 어찌 과하다 하십니까.”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공적에 따라 보상하는 것이 당연하지 어찌 신분에 따라 보상하겠느냐는 것이 김유신의 항변이었어.

함경남도 마운령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에는 “공(功)이 있으면 상작(賞爵)을 더할 것(可加)”이라는 내용이 등장하고 단양 적성비에도 공훈을 세운 사람을 칭찬하고 앞으로도 신라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에게 같은 표창을 내리겠다는 포고가 나와. 그리고 신라 정부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그 약속을 지켰어. 앞서 말한 온군해, 김춘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이는 대아찬으로 추증됐어.

대아찬은 골품제도상 진골에게만 주어지는 벼슬이었지. 김씨도 아니었고 당연히 진골도 아니었을 온군해에게 대아찬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돌격 명령을 죽음으로 수행한 비령자와 그 아들 거진, 종 합절의 시신 앞에서 김유신은 자신의 옷을 덮어주며 통곡했고 왕이 나서서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어. 그 외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가 죽어간 사람들이나 공을 세운 이들은 대개 보상을 받았단다.

적어도 이 시기, 또 한창 발흥하던 신라는 골품제와 꽉 얽매였던 사회가 아니라 누구든 공을 세우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던 사회가 아니었을까.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던 그 시대 유달리 신라 사람들의 DNA에 임전무퇴가 새겨지지는 않았을 터, 자신이 책임을 다하면 자신의 후대에게라도 보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목격한 사람들이 당나라 소정방이 감탄할 만큼 충성스러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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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분통을 터뜨리면서 어느 인터넷 서명에 동참한 적이 있어. 세월호 사건 당시 제 자리에만 머물렀으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자신이 가르치던 반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두 기간제 선생님에게 ‘순직’(殉職), 즉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최소한의 형식적, 법률적 인정을 받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지. 정규직 교사가 아니니 그 임무를 다하다가 죽어도 ‘순직’이라는 단어를 그 죽음에 붙일 수는 없다는 게 이 나라 정부의 입장이라고 하는구나. 고인의 아버지를 어깨 너머로 뵌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은 이렇게 울먹이며 말씀하셨어. “훈장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아이가 했던 대로만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작년 초 교육부는 지난 5년간의 교권 침해 사례가 2만 6천건에 달한다고 발표한 바 있지. 그런데 놀라웠던 건 이 2만 6천 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례 가운데 기간제 교사가 당한 교권 침해는 들어 있지 않다는 거였어. “일반 교사들 경우 교권 침해를 당했을 경우에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해서 학생을 징계한다든지 해결이 가능한데 기간제 교사 같은 경우.... 그냥 채용이 중단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신고를 하기가 쉽지가 않고 통계도 아마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비정규직 교사 협의회 공동대표 김민정 선생님) 는 거야. 그러고 보니 2015년 말에 불거진 한 사건이 떠오르더구나. 아이들에게 욕설을 듣고 빗자루로 머리를 맞는 동영상이 공개됐음에도 불구하고 “교권 침해로까지 볼 사안은 아니었다.”며 아이들의 처벌을 원치 않았던 기간제 교사의 너그러움(?)이 서글펐던 사건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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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임무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어도 ‘순직’, 그 한 단어조차 그 영정 앞에 놓이지 못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를 송두리째 들어 메치기 당해도 행여 더 큰 불이익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숨겨야 하는 이들에게 도대체 이 국가는 무슨 충성을 요구할 수 있으며 미래의 동량이라는 아이들을 맡겨놓고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일까.

도대체 기간제,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이 무엇이기에 신라 시대의 낮은 평민들조차 보장받았던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면 포상이 따른다.”는 평범한 순리마저 맥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김유신 장군이 이 꼴을 보면 아마 “그 백발이 꼿꼿이 곤두서고 칼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올” (억지를 쓰는 소정방 앞에서 김유신이 보인 행동) 만큼 분노하여 외칠 것 같구나. “네놈들의 나라가 어떻게 제대로 된 나라란 말이냐.” 그리고 소정방은 그 뒤에서 키득거리고 있겠지. “쥐뿔이라도 가진 놈들은 제 앞가림에 바쁘고 목숨 바쳐 임무를 다한 자들더러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그 공을 인정조차 않으니 세계 몇 대 무역 대국이 어쩌고 해도 입김 한 번 불면 날아갈 나라로다.”






편집부 주


참여연대에서 김초원, 이지혜 선생님의 순직을 인정받기 위해

재판부에 보낼 서명을 2월 말까지 받고 있습니다.


'세월호 기간제 선생님 순직인정 소송 서명'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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