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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추천14 비추천-21






이야기 하나,


신입사원 시절 직장동료들과 함께 짧은 연수 중 영국에 들른 적이 있다. 피카디리 광장 근처 어느 이탈리아 가게 (국기가 걸려 있어서 알았다) 에서 음식 주문해 먹는데 영어 잘하는 똑똑한 동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주인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나직하고 차갑게 물었다. 


"Why am I a monkey?" 

  
영어 몰라도 분위기는 알아먹는다. 동기 녀석이 주인장이 우리를 두고 뇌까리는 소리를 캐치하고 그에 항의하는 상황이다. 이 이탈리아 자슥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덩달아 얼굴에 사포 깔고 주인 앞으로 다가가 쏘아보는데 주인이 펄쩍 뛰었다. 
  

노노노노노노 네버네버네버 애브솔루틀리 낫 


그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어 이 동양인들이 영어 알아먹네’ 에서 온 당혹인지 자기는 정말 그런 말 한 적 없다는 억울함이 빚어낸 빛깔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얼굴이 하얘져서 절대 그런 말 한 적 없노라며 손을 저었고 다음의 말을 연거푸 했다.


I don't like racism. 


절대로 안했다는 데야 별 수 있나. 모자란 영어를 쥐어짠 항의용 단어들과 산너머 배추에 f로 시작하는 넉 자 단어까지 혀에다 걸고 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짐짓 근엄한 얼굴로 가게를 나서는 수 밖에. 



이야기 둘,


1997년 대통령 선거 즈음. 막 꼭지 연출 맡아 동분서주하던 무렵 당시 내 직속 상사는 회사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공은 나에게 과는 아래로 보내는 불량상사의 모습을 종종 보였고 아래 사람들에게 무리한 요구도 여러 번 해서 인심을 잃었던 것이다. 술 마실 때면 마른안주보다 더 좋은 안주가 그분이었다. 


어느날 비슷하게 그분을 씹고 있는데 한 선배가 새로운 레파토리를 꺼냈다.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뭔가 비밀 얘기를 한다는 듯. 


"아 우리끼리 얘긴데 말이야. 진짜 그 인간은 딱 전라도 티를 내요.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 안하는데 말이지. 니라니라......하여간 전라도 인간들은......"


아 이 선배 좌중을 스윽 간을 봤던 게 고향이 어디인가를 셈하고 있었구나. 얘는 부산 이넘은 서울 쟤는 강원도 뭐 이런 식으로..... 


상사의 평소 불만스런 행태부터 사내에서 좀 심하다 싶은 김대중 전폭 지지 호소까지 ‘전라도’에 갖다붙여 험담을 구성하는데 듣다듣다 못 들어주겠다 싶어 입을 달싹이는 참에 옆에서 맥주 마시던 후배 여자 PD 하나가 호프잔을 탕 내려놓고는 꼬챙이로 찌르듯 말을 끊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나쁘면 나쁘지 왜 그 고향을 얘기하세요. 나빠요. 선배님 이런 말씀하실 줄 몰랐어요. 그럼 아무개 선배(전라도 말 꺼낸 선배가 도움을 받던 전라도 출신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그 선배도 전라돈가요?” 


아이고 잘코사니야. 안 그러면 내가 정색을 했을 것 같고 분위기 험악해졌을 듯 한데 여자 후배가 ‘선배 나빠요’로 나오니 선배 꼼짝을 못한다. 기분 좋은 속사포를 들으며 선배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니 그때 선배의 표정은 바로 몇 년 전 영국의 이탈리아 피자집 주인의 얼굴이 씌워져 있었다.


“아니 아니 아니 내 말뜻은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야 말이 그렇지.... 그래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아하 이거 내가 말이 헛나왔네. 아니 그..... 지역감정 뭐 얘기가 아니라..... 그래 전라도라 다 그런 거.....는 아니.... 아니 그 양반이 워낙 행동이 그래서 그 지역을 욕먹인다는 거지 뭐..... 지역감정 그런 거 아니야.”


그 하얗게 허둥대던 얼굴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삐져 나온다. 하지만 이탈리아 음식점 주인이 몽키 운운을 했든 그렇지 않든, 선배의 본의(?)가 어디에 있었든 그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며 지역감정의 체현자가 아님을 강변해야 하고, 그들 자신 속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까지의 역사를 생각하면 웃음은 곧 숙연으로 바뀐다. 그들이 제 발을 저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강고한 혐오와 편견의 벽 앞에서 피눈물을 쏟아야 했을까. 얼마나 몽키 또는 깽깽이 소리에 속을 저며야 했을 것인가. 


나는 영국의 식당 주인이나 내 선배 같은 사람들이 ‘제 발을 저리게 만든’ 역사가 인류가 성취한 가장 큰 진보 중의 하나이며,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보내는 부당한 혐오와 편견을 줄여 가는 과정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인종에 대한 것이든 지역에 관한 것이든 종교의 문제이든 성적 정체성의 문제이든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시작은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며, 최소한 속으로는 불쾌하더라도 그를 드러내지 않는 일이며,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삐져나왔을 경우 주위의 눈총을 의식하고 면구스러워하는 분위기의 조성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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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나는 걔들을 싫어하는데 차별에는 반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다. 차별 철폐의 첫발은 혐오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인종들은 싫은데 차별받으면 안되지.” 그리고 “전라도 애들 싫은데 불이익받으면 안되지”라는 말을 듣는 황인종들과 전라도 사람들의 심경을 짐작한다면 “나는 동성애 싫은데 차별에는 반대해” 소리를 해서는 곤란하다. 정말로 곤란하다. 


그건 인권 변호사 문재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우리 사회 인권의 현주소를 옛 지번으로 바꿔 버리는 일이며, 우리 스스로 뻔뻔해지는 일이고,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타고 발버둥치는 일이다.


우리는 왜 정권을 교체하고 싶어하는가. 누구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서는 아니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꾸고 싶어서가 아닌가. 부당한 권력과 금력의 횡포로부터 인권이 보장되고 보다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인 인간의 존엄성이 구현되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소망이 아닌가. 


이 모두를 위해서라도 지금껏 권리가 제한되고 차별받아 온 사람들, 편견과 혐오의 제물임을 감수해야 했던 이들이 받아온 고통에 대한 책임감을 공유하는 일 또한 절실하게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존엄한 권리를 가진 인간을 그들 본연의 정체성을 이유로 혐오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또한 그 혐오를 고의든 무심코든 노출하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대놓고 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부끄러움이다. 우리는 부끄러움에 좀 더 민감해져야 한다. 최소한 정말이지 최소한 “나는 너희들이 싫은데 차별에는 반대해 줄게” 류의 비열한, 정말이지 비열한 형용 모순은 삼가야 한다. 


누가 물었다. “도대체 (일본에서)조센징이 받는 차별하고 동성애자하고 어떻게 비교할 수 있나요?” 어이가 없었다. 대관절 무엇이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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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후보는 명백한 실수를 했다. 동성결혼 법제화에 반대하는 뜻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그의 워딩은 '동성애에 반대한다'였다. 사과했다, 그러면 된다. 그런 뜻이 아니었으며 성 정체성 문제로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하면 된다. 


문제는 그 실수를 쉴드치고 그 논리를 대변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명백한 혐오발언들이다. “나는 동성애 졸라 싫은데 차별에는 반대해.” 이게 자그마치 ‘더불어’ 민주당의 부대변인 출신 인사의 포스팅이었다. 우리는 몇 년 후 그가 ‘과거의 오늘’에서 그 포스팅을 보고 얼굴이 벌개져서 쥐구멍을 찾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포스팅에 호응하여 “맞아. 내가 싫은 걸 우짜라고.”를 부르짖는 사회, 그건 바로 지옥의 전 단계다. 









산하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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