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3. 월요일
좌린
전날 세 개의 집회를 돌아보고 추위와 피곤에 찌든 채 잠들었다 일어난 일요일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트위터를 열었다.
허거덕!
이건 쫌 아니다 싶어 아침도 안 먹고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지도 앱에서 '민주노총'을 검색해 보고 5호선 서대문역에서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나는 이미 대충 2호선 쪽으로 가고 있었고...
그냥 시청으로 가기로 결정.
"언제까지 점잔 빼며 안녕씩이나 바라고 앉았겠는가"라는 뭔가 비장해 보이는 척하는 트윗을 날려 보았지만 '늦게 도착해서 상황이 끝나 있으면 어떡하지? 그냥 집에 와야 하나'라는 걱정도 드는 것이 사실.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분향소를 향한 줄이 끝없이 이어지던 그 길이지만, 추운 일요일 아침이라 도심답지 않게 무척 한적했다.
인적 발견, 오오 반가워~
갑자기 어디 가냐고 묻길래 "정동길.. 정동극장요.."라고 소심하게 대답.
정동길 초입에 두 번째 저지선이 있다. 이번에는 "경향신문사에 친구 만나러 가요~"라고 잠깐 동안 준비해 본 답을 해맑게 읊어 보았다. 평소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지 경찰 아저씨들이 뭔가 질문하면 항상 긴장된다.
경향신문사 사옥 앞 세 번째 저지선. 전경 하이바 뒤로 사진으로 보았던 에어매트가 보인다. 이번엔 영장 집행 중이라 기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기자증이나 명함을 보여달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받았다. 길을 막고 선 명확한 근거가 뭔지 따지고 들 말빨은 없고, 그렇다고 등빨은 더더욱 없고, 명함도 없으니 잠시 망연자실.
심심해서 길 막고 서 있는 앳된 전경들을 찍어 봄. 요즘은 아무 종교행사 가도 커피 마실 수 있니? 나 군대 훈련소 있을 땐 교회 가면 초코파이, 절에 가면 녹차와 담배, 성당에 가면 커피를 주길래 매주 성당을 나갔단다.
멀쩡한 도로를 막고 서 있는 경찰에 심기가 불편해지신 시민이 따지고 들기 시작. 약간 어수선해진 틈을 타 저지선 안으로 슬쩍 들어갔다.
경향신문사 입구로는 가지 못하고 맞은 편 건물 옥상에 올라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것들은 뭘 해도 민관군 합동에 육해공 상륙 준비까지 성실하게 퍼부어 댄다.
근데 난 이 은행나무 가지들 어떡할까나.
민주노총 사무실 쪽에서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 옆에 자리잡은 종편 방송 카메라. 주말에는 손석희 씨가 안 나온다던데 뉴스 내용이 어떨지 아주 잠깐 궁금해졌다.
소방관이 대치중인 유리 현관문 쪽으로 다가간다.
근데 난 이 은행나무 가지들 어떡할 거냐고...
진짜 깰꺼야?
헉, 깼다!
와장창 소리가 길 건너 옥상에까지 들렸다. 이 컷은 두 번째 유리벽마저 마저 깨지는 장면.
스크럼을 짜고 막아보지만 한 명씩 뜯어가고 있어서 역부족.
한 분 한 분 뜯겨 나간다.
방해가 되는 것들에 불과하기에 저렇게 가볍게 치워진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 안전한 대한민국, 경찰.
저지선 밖에서는 항의의 외침이 간간이 터져나오고, 얼마 되지도 않는 시민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는 위협 방송이 계속 되고 있다.
옆에 채널A 기자가 현장 멘트로 ‘경찰이 유리를 깨고 진입하자 노동자들은 물을 뿌리는 등 격렬히 저항’ 운운 하고 있다. 운율을 맞추려는 건지 '대등'한 대치 구도를 만들려는 건지, 저 병력 앞에서 저항 참 격렬하기도 하다.
또 뜯겨 나간다.
철도는 국민의 것
아니, 철도는 '몇몇' 국민의 것.
나머지 국민은 그냥 승객.
금속노조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옆 건물 옥상에서 "시민 통행을 방해하고 있는 경찰에게 경고합니다. 즉각 해산하십시오. 시민 여러분, 모여주십시오!" 라고 맞불 방송 시작.
민중가요가 울려퍼지니 임투 기간의 공장 점심시간이 떠오른다. 아 배고파.
끌려나오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이렇게 1층 로비가 치워지고.
민주노총은 조합원 총 동원령을 발동했다.
딴지질과 트윗질을 모두 하는 잉여 오브 잉여들도 현장에 오겠다는 멘션을 날리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나는 "폭력정권, 뒤집어야 합니다.."
라는 개그 트윗이나 날리고 앉았다. 개그인 줄 모르고 진지하게 알아듣는 분이 더 많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
폭력정권, 뒤집어야 한다니까요.
국회의원들이 현관으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막혀서 살짝 삐지셨다.
야당 의원들이 제법 오심.
웬만하면 중단 해라. 딱히 말이 통할 넘들 같아 보이진 않는다만.
의원님들 재차 진입 시도중. 불통이 특장점인 '말이 안통하네뜨아' 정부인데 의원 나리라고 곱게 넣어 주겠나.
소통이 안 될 땐 쪽지~
아 근데, 민주노총이 침탈당하다니, 이게 말세 아니고 뭐임?
게다가 여기는 신문사 사옥이기도 하지 않은가?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들. 백골단도 많이 세련돼졌다.
문 뜯을라고?
서대문역 쪽에서 시위대가 도착했나보다. 근데 나는 어쩌다 채증요원 자리에 서 있네.
좀 안녕하게 살아보겠다고 아침도 안 먹고 기어나왔다가 담배도 떨어지고, 전화기, 사진기 밧데리도 떨어져가고, 배도 고프고.. 제발 해 지기 전에 철수해라 이거뜰아ㅠㅠ
일개 인터넷 언론 기고자의 그딴 바람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압 물총 분사 장면을 보여 주심.
"저기, 문 따는 건 열쇠집에 연락하심 안될까요?"
민변에서 경찰들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이 왜 불법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계심. 안 열어주면 힘(읭?)으로 밀고 들어가겠다고.
이게 그냥 물총이 아니래매? 이 농약 같은 머슴아들아.
그 와중에 신규 메시지 한 개, 있습니다.
단문메시지는 아니네.
커피숍, 편의점, 화장실에서 각종 충전과 정비를 대강 하고 돌아오니 이런 분들이 왔다 가심. 다음 행선지는 남대문경찰서라고 함.
이번엔 경향신문 별관 창문에서 물을 틀었다.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엄청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사단 규모의 경찰 병력들.
물을 뿌리는 장면을 걱정스러운 듯이 지켜보는 흔한 주간지 기자의 모습.
추우면 지는 거다.
찬물로 대열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변호인 접견권 보장을 요구하며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변호사들
"나, 변호사란 말이야..."
남대문서를 갔다오신 의원님들. 밤에는 민주당이 이 앞을 지킬 테니 경찰은 철수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 하고 오셨다고.
옥상으로 이동한다는 무전소리가 들린다. 농약 아저씨들도 건물 안으로 추가로 들어가심.
법이고 원칙이고 아랑곳 없이 탈탈 털어볼 심산이구나.
정동길쪽 인파도 점차 불어나고 있다.
오오 이번엔 돌파하나?
다시 밀려남. 하지만 구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태. 여기서 와- 소리를 지르면 건물 반대편 저 너머에서 다른 대오의 와-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트위터에서 “눈에 들어가면 아프다기에 눈을 감았는데 귀에 들어가서 귀가 아프더군요.”라는 제보를 받았다.
군중은 자꾸자꾸 불어나고 있다.
왠지 이 아저씨들 포위되는 분위기?
금속노조에서 개발한 초강력 장거리 물 분사공격 무기. 너무나도 강력해서 오금이 막 저려올 지경이다.
노동자들의 치명적인 저항 무기에 맞서기 위해 '경찰장비의 사용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했다고 주장하는 살수차 등장.
그랬더니 사람들이 에어매트로 살수차를 막음.
하지만 에어매트로 트럭을 막을 순 없지. 시위대 앞에 떡하니 나타남.
또 야당 의원들 기자회견 준비. 옥상까지 탈탈 털어본 경찰이 드디어 14층 사무실을 뜯고 들어가서 100여 명 인원들 죄다 신분증 및 인상착의 대조 작업 및 전리품 노획중이시라고.
"지도부 새벽에 건물 나간 듯"
이 거대한 헛X질을 어쩔거냐...
드디어 철도노조 깃발 등장.
환한 웃음
맛있는 저녁 식사 약속이라도 잡힌 듯한 표정의 철도 노조원들. (파란 잠바 아저씨의 사모님이 “신랑이 얼굴 안 나와서 서운해 해요.”라는 멘션을 주심. 다음에는 멋지게 찍어 드릴게요~)
늬들도 하루종일 고생 많았다. 행여 사고라도 나면 개인적 일탈행위 했다고 뒤집어 쓸 신세들인데.
아, 개인적 일탈행위를 하긴 했구나. 커피믹스...
불법 집회라서 물대포를 사용하겠다는 여경 방송 십여 차례, 남대문 경비과장 방송 수차례를 하고서도 결국 사용하지 못한 것이 바로 오늘 사건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어느 쪽이 불법인지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저지선 바깥으로 이동.
정동극장 앞.
체온 떨어질까봐 목 말라도 찬물 못 마시며 보낸 하루였기에, 돌아오는 지하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한 병 사 먹었다.
엄청 시원했다, 끝~
아니, 시작.
글, 사진 : 좌린
트위터 : @zwarin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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