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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방에 등장한 빨간머리의 소녀. 난데없이 날아드는 토마토를 얻어맞으면서도 두서없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음악은 그저 다 좋고, 성적은 충격적이니 말하기 싫고, 남자친구는 잘생기면 좋겠다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뱉어내는 말. <스무살, made in Twenty TTL>.

 

 

1999년, 이 난데없고 느닷없이 등장한 이동통신회사의 광고는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삐삐가 자취를 감추고, 작고 예쁜 핸드폰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모바일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과일도 채소도 아닌 토마토처럼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세대인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대폰이야!”라는 광고의 직관적 메시지는 PC통신과 인터넷으로 소통반경을 넓혀온 젊은 소비층사이를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마케팅에서 대중의 욕구와 결핍을 읽어내는 것은 매력적인 기술이다. 수요 예측은 대량생산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산업의 상품인 방송 프로그램도 그런 마케팅 기법에서 예외일 수 없다. 특히 방송 콘텐츠들은 소비자로부터 시청률로 즉각적인 정산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대중의 욕구와 기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비재다. 그래서 방송제작자들은 대중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각축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동시대인들의 욕구와 결핍을 두고 벌이는 그러한 각축전은 때론 귀중한 기록이 되곤 한다. 18년 전 광고하나가 그 시대를 소환해내는 것처럼, 방송의 시청률 고군분투기는 한 시대의 온도가 오롯이 담긴 사료로 들춰볼 수 있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은 올해의 프로그램들로 2017년을 되짚어보자.

 

 

 

우리새끼는 장가를 못가는 걸까, 안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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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SBS ‘미운우리새끼’다. (이하 ‘미우새’). 지난 24일 방송된 68회의 시청률은 평균 22.5%, 최고 22.8%를 기록했다. 동시간대 1위, 일요 예능 1위, 주간 예능 1위. 압도적인 수치다. 

 

 

‘미우새’는 ‘다시 쓰는 육아일기’다. 나이 든 어머니들은 미혼인 아들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노심초사한다. 중년에 들어선 아들이지만 어머니 눈엔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다. 여전히 부족하고, 철이 없어 애를 태운다. ‘미우새’의 이러한 기획의도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공감지점이 있다. 슬하에서 자식을 떼어놓는 것이 쉬운 부모는 없으며 그런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자식이 없으니 말이다. ‘생후 600개월 김건모’라는 다소 뜨악한 표현도 그런 애틋한 감정의 장치다.

 

 

네 명의 아들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미혼이라는 것. 어머니들의 걱정은 진짜다. ‘미우새’의 두 번째 공감지점은 여기에 있다. 통계청이 2013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김건모, 박수홍에 해당하는 66~70년생 남성의 27.4%가 30대를 미혼으로 넘겼고, 이상민, 토니안의 세대에는 50.2%가 결혼은 하지 않았다. ‘미우새’ 출연자들의 고민은 이미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것의 예능화는 결혼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나만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구나.’ 혹은 ‘그래도 우리 애는 아직 김건모 보다는 어리니까.’같은 세대를 아우르는 촘촘한 위안을 안겨준다.

 

 

짚고 넘어갈 지점도 있다. 아들들의 생활에서 짠한 모습들의 원인은 대부분 ‘짝이 없어서’로 귀결된다. 곰팡이가 잔뜩 낀 토니안의 냉장고에 혀를 차다가도 어머니들은 ‘아들의 위생관념’이 아니라 ‘장가를 안가서’라는 이유를 찾는다. 간간이 언급되는 미혼 여성 연예인들이나 스튜디오에 나온 기혼 여성 연예인들에게서, 어머니들은 참한 며느리상을 찾아내느라 바쁘다. 끊임없이 결혼의 순기능을 역설하고 어떻게 하면 아들들이 장가를 가서 사람구실을 할까 대책회의를 하지만, 사실 매주 아들들의 혼삿길을 막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여성들이 냉장고를 청소하고 시어머니 대신 남편을 보살피기 위해 결혼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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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머니들 세대의 여성관과 결혼관을 지금의 기준으로 비판할 수 없다. 그 역시도 다름 아닌 우리의 부모세대의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미우새’는 다행이도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어머니들의 걱정은 걱정대로 놔둔다. 대신, 부모의 속도 모르고 철딱서니 없이 잘 살고 있는 자식들의 싱글라이프를 보여준다. 혼자서도 야무지게 삶을 헤쳐 나가는 이상민, 싱글 친구들과 소년같이 어울려 노는 토니안, 클럽에서 뒤늦은 해방감을 만끽하는 박수홍, 소주병으로 트리를 만들며 기뻐하는 김건모의 모습을 보라. 정작 본인들은 전혀 장가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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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이 아니라 비혼

 

 

남성이 임금노동을 자신의 몫으로 돌리고 부인에게 가정을 배당하는 성별 분업이 의문시되지 않는 사회에서 결혼은 행복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지만, 그 단순한 성별 분업 자체가 문제로 부각되는 사회에서 결혼과 행복의 행복한 짝짓기는 옛날의 이야기가 된다. 마치 노스탤지어처럼 결혼과 행복의 행복한 짝짓기라는 관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p.126 결혼하지 않을 권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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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非婚)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생겼다. ‘아직 결혼하지 못한’ 미혼(未婚)과 달리 ‘결혼하지 않음’에 대한 자발적인 선택이 내포된 신조어다. 2017년에는 자신의 비혼 의사를 지인들에게 선언하는 ‘비혼식’이라는 새로운 문화도 자리 잡고 있다. ‘미우새’의 아들 중 몇몇도 공개적으로 비혼 의사를 밝혔다. 애타는 어머니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세태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의 단면이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식세대의 새로운 가치관이다. ‘미우새’는 그런 젊은이들의 초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세대의 시선을 최대한 담담하게 담아내며 조용한 세대 교감을 유도한다.

 

 

 

그래서, 나 혼자 산다

 

 

MBC 예능국에게 2017년은 순탄치 않은 해 였다. 장기간의 파업과 ‘우리 결혼했어요’ ‘마이리틀텔레비젼’등 간판프로그램이 폐지되는 부진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산다’만큼은 꾸준한 성적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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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처음 방송되었던 시기에는 다소 부진했다. 결혼 적령기를 넘기거나 기러기 아빠가 된 연예인들의 짠한 삶을 담은 리얼 다큐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1인가구를 진지한 사회현상으로만 다룬 초반에는 그 실감나는 짠함에 큰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대중은 예능에서까지 퍽퍽한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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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기는 싱글라이프의 즐겁고 다채로운 삶을 담아내는 ‘무지개 라이프’체제로 전환되면서 부터다. 전현무, 한혜진. 이시언, 박나래, 기안84, 헨리 등 싱글 ‘무지개 회원’들의 YOLO 라이프 제안은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차츰 희석시키는 효과를 내면서 시청률이 반등하기 시작했다. 2017년 들어 무지개 멤버가 고정되면서 각자의 캐릭터가 부여되고 그들이 교류하는 에피소드가 쏟아졌다. 1인가구 삶의 짠한 모습은 뒤로 보내고 싱글들의 즐겁고 유쾌한 삶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시청률 10%대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YOLO, 달콤한 판타지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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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 번뿐. 미래 또는 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YOLO’라는 단어가 올해 방송가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 것을 콘셉트로 삼은 예능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대중은 화면 속에 흘러넘치는 여유와 풍경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만끽했다. 욜로는 <무한도전>같은 장수 버라이어티 예능에서도 따로 특집으로 다뤘어야 할 만큼 놓칠 수 없는 2017년의 트렌드였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던 예능 장인이 있었으니, 바로 tvN 나영석 PD다. 욜로 라는 단어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그러한 대중의 욕구를 읽어내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연이은 대박행진을 이어갔던 ‘꽃보다’시리즈와 ‘삼시세끼’등의 그의 콘텐츠에는 대중의 퍽퍽한 삶에 대리만족을 선사하면서, 현재의 행복에 대한 가치를 역설하고 지금 사는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욜로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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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yolo라는 단어를 널리 알린 것도 나영석 본인 프로그램의 자막이었다. tvN ‘꽃보다청춘 아프리카편’에서 한 여행객이 던진 그 단어가 나영석PD에게 포착 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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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나영석표 욜로 예능은 역시 특별했다. 한번뿐인 인생 막 질러보자는 단순한 구성이 아니었다. 예능장인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무리 없는 노동’과 ‘자신을 돌보는 충분한 휴식’의 균형을 예능 속에 구현해냈다. 일찍 장사를 마치고 한적하게 해수욕을 즐기는 식당 직원 신구의 모습 (윤식당) 이나, 아침엔 목장을 돌보고 오후엔 느긋하게 낚싯대를 드리우는 균상(삼시세끼 바다목장편)을 통해서 말이다. 나영석PD는 욜로를 넘어 일과 삶의 양립인 워라벨 (work and life balance)을 갈구하는 대중들의 결핍까지 긁어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인간다운 삶을 찾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외딴 섬이나 낯선 이국땅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영석PD의 영상은 하룻밤 꾸었다가 깨어나야 할 달콤한 꿈이다. 그것은 정말로 환상일 뿐이다. 외딴 섬에서 염소 몇 마리 짠 젖으로 무슨수로 워라벨을 실현할 것이며, 모든 걸 쏟아 부은 이역만리의 식당이 망하기라도 하면 정말 골 때리는 일이지 않는가. 시청자들이 현실의 욜로엔 제작비를 대주는 방송국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욜로만 하다가 골로갑니다 스튜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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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허함에 25년차 방송인 김생민이 소환되었다. 그는 사람들의 영수증을 꼼꼼히 뒤지면서 불필요한 소비에 가차 없이 “스튜핏!”을 날린다. 그의 일침은 사람들에게 따끔한 자극이 되었다. 팟캐스트 ‘김생민의 영수증’은 누적 다운로드 1,000만 회를 돌파하면서 2017년 끝자락 KBS에 정식으로 편성되었다. 그의 콘텐츠는 최초에 방송에서 기획된 것이 아니라, 팟캐스트에서 시작되어 지상파로 입성한 케이스다. 그의 소구력이 지금 현재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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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민은 앞선 욜로 풍조의 정 반대 지점에 서있다. 잠깐의 기분을 위해 하는 소비는 바보짓이다. 실제로 그가 프로그램에서 신나게 ‘스튜핏!!’을 먹이는 항목들은 그렇게 유별나지 않은. 작은 행복을 위한, 평범한 소비들이다. 그러나 그에겐 어림없다. 그에게 있어 현재의 행복은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언제든지 유예될 수 있는 인내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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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1분 미리듣기로 듣는 것이다.’ ‘소화가 안 될 때는 소화제 대신 점프를.’ 그가 제안하는 절약방법은 때로는 극단적이다. 가끔은 타인의 소비를 김생민 본인의 기준으로 재단하여 개인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제한하는 억지스러움도 껴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김생민은 미래에 대한 ‘절실함이 있다면’이라는 전제를 둔다.

 

 

 “절실함이 있다면, 작더라도 저축해 도전해보세요. 말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뤄지는 금수저들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어록은 미래의 불안감을 안고 사는 저성장 시대 사람들에게 분명 호소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25년 동안 오직 근면함과 성실함 하나로 대기만성을 이뤄낸 자의 조언이기에 그의 말에 힘이 실린다. 

 

 

 

내년엔, 더 안녕하십시오

 

 

결혼 못한 노총각과 혼자 사는 청년들, 그리고 욜로 와 김생민의 영수증. 올해 방송 키워드들은 개인의 안녕함을 묻는 것들 이었다. 대중은 지쳐있었다. 작년 이맘때,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온몸으로 막아 돌리며 거리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던 시민들은 자신을 돌볼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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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지쳐있었는지 모른다. 애 낳아 기르는 게 큰일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출산과 육아를 포기한 사람들은 송일국의 세쌍둥이들의 재롱을 보며 마음을 달랬고, 출근과 퇴근에 치여 끼니조차 편히 챙기지 못한 직장인들은 백선생이 해주는 화면속의 집 밥을 보며 위안 삼아야 했다.

 

방송의 시야가 개인의 영역으로 좁아진 것은 대중의 누적된 피로감뿐만이 아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같은 민주주의의 후퇴가 건설적인 사회담론을 다루는 방송 역할을 위축시켰다. 그 결과 방송제작자들의 무기력한 자기검열도 이에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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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경규 선생이 양심 시민에게 냉장고를 선물하던 때가 있었다. ‘정의로운 시민의식’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예능프로그램의 재기 넘치는 시각으로 풀어내던 유쾌한 시절이었다. 그런 호방했던 예능대부마저도, 이제 한 끼 얻어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고 동네를 전전하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시민들이 사는 것은 어떤지, 끼니라도 잘 챙겨 먹고사는지 묻고 듣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아직 우리에게는 좀 더 안녕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2018년 방송에 담길 우리의 모습은 좀 더 안녕하길. 그래서 마음에 여유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그리하여 다양한 목소리와 가치들이 발랄하게 방송에서 꿈틀댈 수 있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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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병아리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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