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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주저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가장 중요한 책이며 니체 사상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니체를 접하는 사람들마다 이 책을 먼저 펼쳤다가 포기하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니체의 전작들을 읽지 않고는 이해가 힘들다. 한편으로는 환상적인 문장력에 이끌려 펼치고 덮기를 반복하게 만드는 마력의 저서이기도 하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가 생각해도 너무 함축적이어서, 그는 <짜라투스트라...>를 일반적인 철학서의 형태로 풀어서 논증하고 설명해줄 책을 따로 기획했다. 이 책의 제목으로 낙점한 것이 <Der Wille zur Macht>였다.


Wille zur Macht는 'Macht에의 의지'를 뜻한다. Macht는 권력, 권세, 지배력, 힘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힘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힘에의 의지는 니체가 인간과 세계의 존재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쓰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엄밀한 철학적 글쓰기는 해 본 적도 없을 뿐더러, 금새 피로해지는 약한 뇌로는 이런 치밀한 작업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걸핏하면 찾아오는 터질 듯한 두통에 자지러지는 니체였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란 책은 없다. 그런데 왜 이 책이, 그것도 한국어로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이상한 번역으로 오랫동안 니체의 책으로 남아있었던가. 여동생 엘리자베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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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동생 엘리자베스는 극우주의자인 남편이 추종하는 남성의 권위니, 힘이니 따위에 휘어 잡혀서 남편의 사이비 사상을 추종하게 되었다. 남편 베른하르트 푀스터는 '누에바 게르마니아(Nueva Germania)라는 정신나간 계획을 세웠다.


누에바 게르마니아의 내용은 이렇다. 유대인 없는 순수한 아리안족의 거주지를 건설하기 위해 파라과이의 적당한 땅을 산다. 거기서 번성하여 독일민족의 생존공간을 확보하는 동시에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정말로. 1887년, 베른하르트는 14가구의 독일인 가족을 모아 파라과이 정부에서 산 땅으로 정착을 시작했다. 당연히 엘리자베스도 세트로 딸려갔다. 잘 되었을까?


우수한 독일인의 우수한 농법은 파라과이의 기후에 맞지 않았다. 파라과이 땅을 잘 안 건 원주민이었다. 그렇다고 열등인종인 원주민의 지혜를 빌리는 굴욕을, 아리안족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가 없었다.


독일인들은 순식간에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실패했으면 재빨리 고국에 돌아가면 그만인데, 그러기도 싫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삶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한 법이다. 베른하르트는 정착 2년 후에 음독자살했다. 남은 독일인들은 자살하기도 하고 그냥 죽기도 하는 등 와르르 몰락했다.


과부가 된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죽고 4년을 더 버티다가 독일로 돌아왔다.


이때쯤 니체는 어머니의 보살핌과 정신병원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늙고 지친 어머니 대신 혼자만 독점적으로 오빠를 케어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숙원의 콤플렉스를 풀게 된 것이었다. 여자들이 오빠 하나를 둘러싸고 암투를 벌였던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이제는 자신만이 승자로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니체는 정신병에 걸린 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니, 지식인들은 엘리자베스만 쳐다보게 되었다. 니체의 남은 원고가 혈육인 그녀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짜릿했을까?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니체의 유일한 여자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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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희열에 넘쳐 선언했다.


“프리드리히는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나의 남자다.”


“오빠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그녀 때문에 니체는 나치 독일의 정신적 선배로 오인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에게 이식된 극우주의 사상에 따라 니체의 유고를 짜집기해서 <Der Wille zur Macht>를 출판했다. 나중에는 나치 간부들도 손을 댔다. 즉 엘리자베스의 입맛대로 <권력에의 의지>라 부르든, <힘에의 의지>라 하든 이책은 정본이 아니라 위서다. 범죄행위의 결과다.


나치 독일 기간 이 책은 '독일 정신'의 교과서였다.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 압도적인 힘은 아리안 종족과 히틀러로 설명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나치당 초창기부터 나치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존경받았다. 그녀가 1935년 사망했을 때에는 독일 제 3제국 총통 히틀러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엘리자베스는 '니체 문서 보관소'를 설립해 생전에 위서를 둘 끼워 넣고 니체 전집을 발간했다. 다른 하나의 정체는 <나의 여동생과 나>이다. 이 책을 보면 니체는 엘리자베스를 여자로서 그러니까 성적으로도 사랑했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여동생의 흔적을 지운 니체 전집 정본이 수립된 상태이다. 이거 복원한다고 유럽의 문헌학자들이 꽤나 고생했다. 당연히 <권력에의 의지>와 <나의 여동생과 나>는 삭제되어 있다. 니체는 문헌학자들을 '두더지'라 경멸했지만 결국은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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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상승, 지배, 강화를 위한 에너지다. 중력은 물질을 지상에 붙잡아놓으려고 쉼 없이 작용하는 중이다. 이것이 중력의 의지다. 뜨거운 물질은 계속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이 때문에 대류현상이 생긴다. 생물은 생존과 생식과 번성을 향해 끊임없이 욕망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이성이란 게 있어서, 한 마디로 똑똑해서 원하는 것도 참 많다. 주목받고 싶어 하고 육체적으로는 건강하고 싶어 하고 심리적으로는 남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하고... 이 모든 것이 ‘일부러’ 단순화시키면 상승, 강화, 지배의 의지로 수렴된다.


힘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각하고 활용할 일이지 추종할 게 아니다. 이걸 오해하면 나치즘으로 빠지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로 움직이는 세계에 신이 설 자리는 없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정오는 그림자(허상)가 가장 짧은 시점이다. 이 그림자는 또한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빛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이기도 하다. 즉 현실세계다.


니체가 살해한 신은 종교의 신 만이 아니다. 신의 그림자까지 포함한다. 신을 대체한 헤겔의 '절대정신'도 살해 대상이다. 이데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니체의 타격대상은 이원론적 사고방식 자체다. 도덕관념마저도 파괴한다. '선 그 자체'와 '악 그 자체'의 개념도 형이상학적 이원론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엔 현실의 인간이 존재한다. 인간은 초인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 Übermensc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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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는 인간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위버멘쉬는 영어로 직역하면 overman이 되고, 의역을 하면 superman이다. 일본에서는 슈퍼맨을 받아서 초인으로 번역했었다. 한국은 이 셋을 다 거치다가 지금에 와서는 그냥 위버멘쉬라고 부르는 추세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고 있는, 심연 위에 걸쳐진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은 위버멘쉬일 때만 온전한 인간.”


“보라, 나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려네. 위버멘쉬는 대지의 뜻이네. 그대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할.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대지에 충실하라.”


대지는 현실이자 인간 세상이다. 인간이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공간이다.


힘에의 의지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다. 왜냐하면 힘에의 의지는 곧 욕망이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것이 있을 거라 착각하지만, 실은 없다는 게 니체의 설명이다. 걷잡을 수 없이 불온해 보이지만 바로 여기서 근대 시민윤리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동성애를 하고 싶든,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든, 그건 다 힘에의 의지고 충동이다. 이 세계는 가치중심적이지 않고 욕망중심적이다. 내가 소중하다는 것은 곧 내 욕망이 소중하다는 뜻이다. 타인이 소중하다는 건 그들도 욕망의 주체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버멘쉬로 만드는 것도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다.


타인을 왜 존중하는가? 알고 보면 착하고 잘하는 게 있어서가 아니라 나처럼 비린내 나는, 나와 똑같은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도 당당한 세계의 구성원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을 만드는데 동등하게 참여한다. 예컨대 지금 이 순간의 세계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이 세계이다. 내가 죽으면 나 없는 세계로 '변질'된다. ‘지금 이 순간의 세계’에 창조주가 아닌 이는 없다. 고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니체는 선언한다.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현실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인 자신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타인에 대한 긍정과 떨어질 수가 없다. 사회구성원은 괜찮은 사람이고, 정의의 편이고, 우리 편이라서 인정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누가 가치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누가 감히 정하는가? 니체의 철학에서는 '내가 뭔데'와 '네가 뭔데'가 동의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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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도덕을 부정하지도, 도덕적으로 살면 안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객관적이고 선험적인 도덕 원칙, '선 그 자체'라는 허상을 지웠을 뿐이다. 그에게 도덕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끝임없는 해석의 대상'이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할 때, 전쟁을 갈등으로, 갈등을 타협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해석으로서의 도덕'이다.


니체는 미소지니적 언어를 함부로 썼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았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똑같은 인간이며, 자신의 인격으로 위버멘쉬를 추구하면 그의 책 제목 그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다.


유대인도 혐오하지 않았다. 다만 유대인 비판은 진심이었으니, 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거꾸로 난 경사는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이 누리는 기득권, 즉 ‘고리대금업’이라는 삶의 방식을 혐오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하는 모든 일을 불쌍하다고 정당화해주면 이거야말로 유대인을 노예 취급하는 행동이다.


위버멘쉬는 세계와 타인, 자기 자신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기에 자기의 현재를 넘어 언제나 그 다음을 추구하는 존재다.


“보라,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이 믿고 기댈 언덕, 신과 질서 그리고 <선악의 저편>에서 도덕원칙마저도 부숴버렸으니 이제 인간은 스스로에게 기대야 한다. 초월자는 더 이상 없다. 그래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초인이 필요하다.


니체는 인간 개인의 문제에 천착했기에 공동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민주주의를 싫어했고 민족주의는 더, 제국주의는 더더욱 혐오했다.


니체는 자신의 사상을 미완결인 채로 세상에 던져놓았다. 그가 남긴 과제는 아직도 난망하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로, 하이데거는 현상학으로 각각 그의 선언에 답했다. 20세기 서양 사상은 니체가 피운 불씨가 피어오른 결과다.


니체는 예민한 폭탄과 같아서 숙련자가 아닌 한 자칫하면 불온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숙제는, 우리가 어떻게 풀든 목표가 분명하다.


'인간성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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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삶2 : 어머니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3 : 헤겔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4 : 무명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5 : 강아지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6 : 인간의 그늘


니체의 삶1: 인간의 탄생

니체의 삶2: 남자의 삶

니체의 삶3: 철인의 탄생

니체의 삶4: 비극의 탄생

니체의 삶5: 광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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