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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청은 극히 심플

 

일반적인 보너스 항공권의 절반으로 국내선 보너스 항공권(왕복)을 끊을 수 있는 일본항공(JAL)의 "어디론가 마일리지" 서비스. 행선지로는 4개가 제시되는데 이 중 어디로 가게 될지는 항공권이 나올 때까지 모르는 겁니다.

 

신청절차는 매우 쉬워요. 발착지(도쿄 아니면 오사카), 가는 날짜와 시간대, 오는 날짜와 시간대만 입력하면 끝입니다. 행선지를 입력하지 않는 게 꽤 생소하더라고요. 

 

묘한 어색함을 안으며 갑자기 시간이 생긴 4월 첫 주, 4월 4일(목)부터 7일(일) 일정으로 검색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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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마일리지 검색 화면.

비행기 시간대를 선택할 수 있는 게 은근히 고맙더라고요.

 

4개의 후보가 마음에 안 들면 재검색도 가능합니다. 우선 가고 싶었던 "우동 왕국" 카가와현이 포함되었으면 좋겠고, 오사카나 삿포로, 후쿠오카 등 대도시는 가지 말자는 방침으로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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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로(북해도)와 오키나와가 함께 있네요.

 

검색을 하다보니 필자의 우유부단이 발병. 재검색을 되풀이하다 지쳐버렸어요. 12번이나 재검색을 반복한 결과, '타카마츠'가 떴어요. (생각해보니 딱히 타카마츠에 고집할 이유도 없는데) 매력적이었지요.

 

쿠마모토는 간단한 소개글에 본 온천가가 괜찮을 것 같고, 야마구치 우베도 왠지 모르겠지만 괜찮아보이고, 아오모리는 생각해보니까 소설 <인간실격(人間失格)>으로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작가의 고향이잖아요. 갑자기 괜찮아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아니 그냥 지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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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우베 소개글의 하나.

킨타이쿄(錦帯橋)는 나무로 만든 독특한 구조를 가진 다리로 꽤 유명한데 야마구치에 있군요.

야마구치도 한번 갈 만한 것 같아요(아니 그냥 검색을 반복하다 지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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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딱히 땡기는 요소가 없었던 아오모리지만,

갑자기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이 생각나서 괜찮아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가리비 된장구이도 맛이 있어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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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모토에 7가지 온천탕을 즐길 수 있는 동네가 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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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가고 싶어 하던 카가와.

사누키 우동(讃岐うどん)의 본고장에서 진짜 사누키 우동을 먹고 싶네요.

 

마음을 먹었습니다(라기보다 지쳤습니다). 이 4곳 중 하나로 떠나기로 하고 신청을 클릭!!

 

신청버튼을 누르면 바로 접수 확인 메일이 날아와요. 3일 안에 행선지를 알려준답니다. 이제 JAL의 연락만 기다리면 되니 마음놓고 두근거릴(?) 수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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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에 신청했더니 3/18까지 알려준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디론가 마일리지를 신청한 바로 다음날 JAL에서 "JAL 국내선 '어디론가 마일리지' 탑승편 결정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메일이 왔습니다. 깜짝이야 하면서 두근두근...어디로 가게 될까...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일을 클릭했더니...에이씨. "'어디론가 마일리지' 탑승편이 결정되었으니 JAL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네요. 뭔가 놀림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JAL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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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마일리지 행선지 "결정" 알림.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오~!! 타카마츠로 결정돼 있네요!! 무심코 아싸~!! 외쳤다가 잠깐, 왠지 마음 한 구석에 외로움이 남은 듯한 이 느낌. 옛날에 누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동시에 포기를 쌓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던가요. 들었을 당시에는 하나도 안 와닿았지만 설마 보너스 항공권을 발급받으면서 인생의 진리를 실감할 줄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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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지는 타카마츠로 결정.

이제부터는 일반 보너스 항공권과 비슷한 기능을 쓸 수 있는 모양.

좌석지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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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선의 경우 JAL 마일리지 뱅크와 연결된 신용카드나 선불카드로도 탑승할 수 있어요.

물론 종이로 출력하거나 핸드폰에 보존해도 되고요.

필자는 단연 종이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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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마츠는 시코쿠 동북부에 위치한 카가와현의 현청 소재지입니다.

참고로 카가와현은 일본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광역 지자체이지요.

 

 

2. 여행 일정은 넉넉하게

 

야마구치, 쿠마모토, 아오모리에 대한 미련은 깔끔하게 버리고 카가와 여행을 준비하겠습니다. 실은 필자의 절친 중에 다카마츠에서 온 놈이 있어요(이것도 타카마츠에 가고 싶어 하던 이유입니다). 먼저 그 친구한테 추천 관광지가 어디 없냐고 물었습니다. 친구는 '야시마지(屋島寺)'라는 사찰, '모모타로신사(桃太郎神社)'라는 신사, 그리고 '히다리진고로(左甚五郎)의 무덤'을 알려주었어요.

 

실은 시코쿠는 쿠카이(空海, 공해)라는 유명한 스님이 옛날에 걸어다닌 길을 따라 88개 영장(霊場, 신사나 절, 유명한 스님 등의 연고지)를 순례하는 "오헹로(お遍路)"로 유명합니다. 야시마지는 그 중 84번째 영장이라네요. 모모타로 신사는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 모모타로(桃太郎)를 모시는 신사. 모모타로에 관한 신화나 전설로는 세토나이해(瀬戸内海)를 사이에 두고 카가와현 맞은 편에 있는 오카야마(岡山)현이 유명한데, 타카마츠에도 모모타로를 모시는 신사가 있는 모양이지요. 히다리진고로(左甚五郎)는 에도시대 초기에 활약한 목공•조각 장인이라고 합니다. 닛꼬 도쇼구(日光東照宮)에 바쳐진 "네무리 네코(眠り猫 ; 잠자는 고양이)"라는 작품을 제작한 이로 전해져 있답니다. 다 가볼만 한 곳 같으니 일단 다 가보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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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마지는 시코쿠 88영장 순례의 84번째 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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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타로 전설로는 오카야마가 매우 유명한데 타카마츠에도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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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리진고로의 작품으로 전해져 있는 닛꼬 도쇼구의 조각 작품 "잠자는 고양이"

 

일정은 3박4일. 좀 여유가 있어보이지만 말입니다, 여행에선 생각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욕심을 부려 무리하게 일정을 넣어버리면 놓치는 데가 생기거나 너무 피곤하거나 바빠서 원래 목적인 '여행을 즐기는 여유'가 사라지기 마련이지요. 넉넉하게 일정을 잡아 기차 창문을 통해 흘러가는 풍경도 즐길 여유가 필요합니다.

 

때문에 필자는 하루에 대충 두 군데 정도 구경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기준으로 꼭 갈 곳을 정해놓고 나머지는 적당히 기대감을 고조시킬 정도로 돌아다닙니다.

 

이번 카가와 여행에서 필자가 꼭 가고 싶은 데는 역시 온천입니다. (약간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본은 온나라가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어디에나 온천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카가와에도 반드시 괜찮은 온천이 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카가와, 온천(香川, 温泉)"이라고 검색해 보니 역시나였지요. 교키노유(行基の湯 ; 교키의 탕)라고, 일본 나라시대(약 1,300년 전)에 활약한 교키라는 스님이 발견한 온천이 유명하다고 하네요. 교키노유 근처에도 평판이 좋은 노천온천인 '사누키온천'이 있다니 여기도 가기로 결정. 첫날에는 교키노유가 있는 시오노에 온천가(塩江温泉郷)에 숙소를 잡았고, 교통편이 안 좋은 것 같아 타카마츠 공항에서 렌트카도 예약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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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키노유는 시오노에 온천가(塩江温泉郷)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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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에 온천가에서 좀 더 들어가면 사누키온천이 있습니다.

당일치기로 노천온천을 이용할 수 있다니 한번 가봐야지요.

 

또 하나 가고 싶은 데는 코토히라구(金刀比羅宮)입니다. "콩피라상(こんぴらさん)"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유명한 신사입니다. 엄청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되는 곳으로 알려져있고요. 검색해보니 본전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786단. 내려가는 게 딱 하나 있어서 모두 785단을 오르는 셈이랍니다. ("콩피라 후네후네 오이테니 호카케테 슈라슈슈슈~♪"라는 노래는 여기 콩피라상에 유래한 노래일 겁니다. 가사 의미는 잘 모르겠는데 한번 들어보면 귀에 남는 독특한 멜로디예요. 콩피라상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링크) 자동재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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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히라구 공식 웹사이트.

 

카가와 하면 뺄 수 없는 것이 우동이죠. 이번에는 차를 빌리기로 했으니 깊은 곳에 있는 제면소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카가와현 공식 관광 안내를 보고 깜짝 놀랐지요. 관광안내에서 우동을 이만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이거 밖에 없을 겁니다. 우동을 잇따라 먹으면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우동버스"까지 있다니 참 놀랍네요. 우동을 좋아하시는 분은 한번 열람해 보시지요(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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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와 우동집의 세 가지 스타일 중 일반 점포 스타일.

일반 식당과 비슷하게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고 주문하는 거지요.

편하지만 재미는 좀 떨어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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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셀프 스타일.

스스로 면을 데우고 국물을 퍼야되는 모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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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제면소 스타일이자, "우동 사리를 제조하는 제면소를 찾아가 거기서 먹는" 스타일.

그릇과 수저, 국물/양념류를 내가 챙겨가야 된답니다.

설거지를 손님이 하는 것도 기본.

원래 제면소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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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마츠공항에는 우동 국물이 나오는 수도(가 아닌데)꼭지가 있다네요.

종이컵도 비치돼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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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코스와 반일코스가 있고, 우동집하고 관광지를 돌아다닌답니다.

식비 등은 별도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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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모델코스의 하나로 "영화 <UDON> 촬영지 순례"가 있네요.

우동집/제면소를 다섯 군데 돌아다니며 오로지 우동을 먹는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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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에서는 영화 <UDON>에 나온 집 소재지도 알려주네요.

 

카가와 여행을 가기 전에 꼭 갈 곳은 대략 이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그때그때 결정하도록 합시다. 단 현지에서 틈이 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관광안내를 보면서 꼼꼼히 예습해놓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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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와현엔 통역 콜센터가 있더라고요.

전화를 하면 무료로 통역서비스를 제공해준답니다(한국어 가능).

 

 

3. 이제 출발~1박째는 온천가에서~

 

이렇다 할 준비 없이 멍하게 지내다 어느새 출발일. 평소대로 츠쿠바(つくば)익스프레스선 야시오(八潮)역 앞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하네다공항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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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네다 공항이 보입니다

 

미리 탑승 체크인을 마쳐놨기 때문에 카운터에 짐만 맡기면 보안검사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셀프 체크인 카운터(수하물 기탁 전용 카운터)'이 '수하물 태그도 스스로 붙이게끔' 셀프화가 심화됐던 겁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체험하느라 약간 흥분하면서 스스로 발행한 수하물 태그를 캐리어에 달고 접수대로 갔는데요. 접수대 직원분이 "아, 고갱님, 죄송합니다만..."이라는 겁니다. 어? 흥분 상태에 있는 게 들켰나...하면서도 "에이 평생 처음에 카가와로 가는데 이 정도는 봐주면 안 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고객님은 카가와로 출발하시는 거라 다른 카운터로 가셔야..."라고?

 

맞습니다, 카가와현은 시코쿠(四国) 지방이고 여기 카운터의 행선지엔 시코쿠가 없었어요. 당황하는 필자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이면서 "괜찮습니다, 이 우선카드를 들고 가시면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직원분. 필자는 감사와 사과를 동시에 담아 쓸 수 있는 만능 인삿말인 "스미마센..."을 발사하고, 심기일전 시코쿠행 카운터로 향했습니다. 앞으로가 걱정되는 실수인데 일단 돌발사태에 대한 면역을 높인 것으로 여겨 기분 좋게 이륙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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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내려 건물에 들어가면 바로 수하물 카운터가 있어요.

행선지에 시코쿠(四国)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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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물 태그는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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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 직원분이 건네준 "우선카드".

시코쿠 행 카운터는 구내 상가(Market Place) 건너편에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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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여유가 있어서 휴게실에 들러 우유를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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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탑승구에서 탑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약간 불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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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슬슬 이륙할게요!!

 

필자는 비행기를 탈 때 창문에서 보이는 경치를 즐깁니다. 특히 날씨가 좋은 날 낮 비행기를 탈 때에 후지산(富士山)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는데요. JAL481편은 후지산 바로 위를 날아간답니다(옆자리에 앉은 분한테 물어봤어요). 대신 이번에는 얇게 눈이 쌓인 히다산맥(飛騨山脈, 별칭 "북 알프스". 키소산맥(木曽山脈), 아카이시산맥(赤石山脈)과 함께 일본 알프스를 이룸)을 볼 수 있었어요. 조종사가 "오른쪽에는 북알프스가 보이며..."라고 알려주더라고요.

 

또 하나 신기했던 것은 무료 와이파이 서비스입니다. 옛날에는 유료였는데 지금 무료로 쓸 수 있게 됐나봐요. 그냥 와이파이 접속 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비행지도(비행 경로랑 현위치 표시), 날씨 서비스도 핸드폰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의 앞 좌석 등받이에 스크린이 설치되지 않은 대신 그 역할을 승객이 갖고 있는 핸드폰이나 태블릿PC가 해주는 꼴이지요(기내모드로 한 채 전파를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해보니까 신기하네요). 이렇게 마치 "평생 처음에 비행기 탑니다!!"라는 분위기를 풍기면서 신나게 하늘 여행을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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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은 보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비다산맥을 봤습니다.

아직 눈이 남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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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소메 스프"는 JAL 국내선 기내서비스 명물로 유명하지요.

 

다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면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입니다. 일본 혼슈(本州 ; 일본을 이루는 가장 큰 섬)와 시코쿠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지요. 아, 참고로 육지로 낀 바다는 여름철에도 강수량이 적은데 세토나이카이 기후 역시 그렇거든요. 그래서 카가와현은 저수지(일본어로 "타메이케(ため池)"라고 함)가 엄청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가와현 명물로 올리브가 있는 것도 유럽 지중해 비슷한 기후 때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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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성 기후의 카가와현엔 크고 작은 저수지가 엄청 많습니다.

 

세토나이카이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내 쇼도시마(小豆島)가 보입니다. 소설 <24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의 무대로 알려져 있지요. 물론 관광지로서도 전국적으로 유명하고요. "와~ 쇼도시마가 보이네!!"하며 (물론 마음 속에서) 외치고 얼마 안 돼서 드디어 타카마츠공항에 도착.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코쿠 땅을 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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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도시마가 보였습니다.

작은(小) 콩(豆)이라는 이름인데 실물은 되게 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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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시간에 오후 3시에 타카마츠 공항에 도착.

 

 

4. 도착하자마자 우동세례(그리고 예상밖의 충격)

 

도착로비에 나가자 눈앞에 우동집. 으으, 복싱으로 비유하면 경기 시작 직후에 치는 가벼운 '잽'이 되겠습니다. 벌써부터 박력에 압도되어버린 필자. 자신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는 것을 자각하기까지 잠시 걸렸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아직 3시 좀 넘어서였지요. 렌트카 예약까지 좀 여유가 있습니다. 공항 안을 구경하는 겸 돌아다니다 2층 편의점 옆 복도 끝에 몇몇 사람이 모여 있는 모습을 발견. 뭐지? 싶어서 다가갔다가 무심코 "앗!!". 이게 바로 "우동 국물이 나오는 수도(가 아닌데...)꼭지"였습니다! 우동국물이 나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도 엄청 신기하더라고요. 한입 먹어 봤더니 국물이 마치 "네 놈 카가와에 왔구만"이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필자도 드디어 우동왕국의 입국심사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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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로비로 나오자마자 우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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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건 알았는데 역시 신기한 우동국물이 나오는 수도(가 아닌데...)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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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왕국 입국심사중.

 

이제 렌트카를 빌려 바로 숙소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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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발견한 카가와현의 유루캬라(ゆるキャラ, 기업이나 지자체가 홍보를 위해 만든 캐릭터).

우동뇌(脳)라고 하는 모양인데 약간 그로테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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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에 맞춰 렌트카 접수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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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된 차는 혼다 FIT였네요.

차 크기에 비해 공간이 넓어서 편합니다.

 

머무를 곳은 시오노에 온천가(塩江温泉街)에 있는 작은 여관입니다. 숙박비가 싼 대신 방은 그때 상황을 감안해서 숙소가 알아서 결정한다는 플랜으로, 여행 사이트를 통해(당연히 마일리지가 쌓이도록) 예약해놨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아주 좋은 방을 줬네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 조금 전이었는데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주변 식당들(이라고 해도 2, 3곳 정도밖에 없는데)이 슬슬 문을 닫더라고요. 사실 시골의 사정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 자체가 딱히 유효하지 않은데 아무튼.

 

이럴 때에는 현지 사정에 밝은 주민에게 물어보는 게 최선이지요. 숙소 주인분한테 어디 식사할 수 있는데가 없냐 물어보니 "아, 그럼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아카마츠식당 가세요. 저녁 식사도 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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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 도착(사진 중 뒤쪽 건물).

도쿄 근교에 사는 필자의 첫인상은 "어, 공기가 맛있다..."였어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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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비가 1박에 5,000엔 정도였는데 꽤 넓은 방을 배정해줬어요.

 

으음, 친절한 인상이었지만 관광객 마음을 생각해주지 않는구나 싶었어요. 절반 포기하는 마음으로 식당을 찾아더니 예상대로 아무것도 아닌 그냥 식당. 어쩔 수 없지. 카가와 음식은 내일부터 즐기기로 하고 오늘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한 끼를 먹고 넘어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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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시오노에 온천가.

 

그런데 말입니다. 식당 문을 열었더니 느껴지는, 낡았지만 "살아 있는" 식당만이 풍길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벽에 달린 메뉴의 종류가 많지도 적지도 않은 것도 좋은 인상. 가장 잘 나가는 메뉴를 물어보니 '츄카소바(中華そば ; "중화소바"라는 뜻으로 아주 일반적인 된장맛 라멘)'라는 답이 돌아오더라고요. 으음, 단순한 메뉴일수록 재료나 솜씨의 좋고 나쁨이 나타나는데 제일 인기있는 게 츄카소바라니...

 

식당 외관과 전혀 달리 알맹이는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실력파 아닐까 메뉴를 훑어보다가 "챠아동(ちゃあどん)"이라는 메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음식이라 물어보니까 이른바 앙카케(あんかけ ; 탕수육 소스처럼 녹말을 걸쭉하게 풀어놓은 소스를 끼얹은 요리)식 덮밥이랍니다. "챠아"는 앙(あん)에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챠슈(돼지 목살을 통째로 표면만 구웠다가 간장, 파 등으로 만든 양념으로 끓여서 간을 한 요리) 조각을 섞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챠슈에 배어든 양념이 앙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 맛이 있긴 해요, 라고 냉정하게 설명해주더라고요. "있긴 해요"라고? 깊어지기만 하는 고민. 일단 챠아동이 생소하고 설명을 듣다보니 너무 맛이 있게 들리는데 가장 잘 나가는 메뉴는 츄카소바라니...

 

필자가 뭘 시킬지 흔들리고 있는 동안 심심하셨는지 주인분이 "우리 집은 챠슈를 잘 만드는 것 같더라고요"라는 말. 잠깐만요, 그러면 챠슈멘(챠슈를 많이 얹은 츄카소바)도... 아아, 우동 경계 경보는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발동시켜 놨었는데 설마 이런 산속의 낡은 시골 식당에서 챠슈 공격을 당할 줄은 몰랐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이번에는 생소함을 우선으로 해 챠아동을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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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지만 깨끗하고 살아 있는 분위기.

메뉴의 종류가 많지도 적지도 않은 것은 자신감의 표출입니다.

 

츄카소바를 포기하지 못한 마음에 살짝 후회하던 중 주문한 챠아동이 나왔습니다. 한눈에 음, 역시 앙카케는 박력이 있다 싶으며 입에 첫 투입을 했더니 이, 이것은...! 일반적인 앙카케계 덮밥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결례가 될 정도의 깊은 맛. 잠시 숟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주인 분이 "혹시 입에 안 맞아요?"라고 물어오더라고요. 아닙니다. 체험해 본 적이 없는 맛에 놀라다 잠시 정신이 나가버린 겁니다. 주인님은 안심했듯 "아~ 챠슈 양념 맛이 계란이랑 섞여서 나름 맛이 나는 것 같아요"라고 했지요. 나, 나름...!? 츄카소바 맛이 더더욱 궁금해지더라고요(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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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영업시간 조금 전에 들어갔는데 흔쾌히 맞이해준 아카마츠식당의 챠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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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입 먹는 순간 잠시 움직일 수 없는 충격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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챠슈 양념의 깊은 맛, 그리고 그 힘을 부드럽게 감싸준 계란의 절묘하게 단맛.

맛이 있어요(자신도 A+).

 

 

5. 사누키온천(さぬき温泉) 당일치기 이용

 

아카마츠식당에서 의문의 1승을 거두었으니 이제 온천타임입니다. 숙소에도 온천이 있는데 24시간 이용할 수 있고, 모처럼 차도 빌렸기에 (술 마시기 전에) 차가 있어야 갈 수 있는 사누키온천(さぬき温泉)을 먼저 가기로 했습니다. 숙소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호텔의 온천탕을 당일치기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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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누키온천은 시오노에온천가 중심부에서 좀 떨어진 데에 있어 차로 가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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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분위기의 로비.

온천만을 목적으로 한 여행이었으면 여기에 숙박해도 될 것 같아요.

 

남탕에는 실내욕탕이 하나 있고, 노천탕이 두 개 있다네요. 몸을 씻고 욕탕에 들어갔더니 물이 매우 진득진득한 겁니다. 깜짝 놀랐지요.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탕수육 소스 비슷한 느낌(아무래도 이건 좀 과언이지만요). 어쨌든 물은 진득진득, 피부는 매끈매끈. 음료수 자판기와 무료 휴게실도 있어서 잠시 쉬었다 가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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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잠글 수 있는 신발장도 있는데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입니다.

필자도 노출형(?) 신발장을 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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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을 안 가져온 실수를 저질러 수건을 사야했습니다(하나에 200엔).

보통 온천에서 파는 수건에는 온천 로고가 있으니 선물용으로 사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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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에 웬만하면 후르츠우유가 있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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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르츠 "오레" 밖에 없네요.

이건 "오레", 즉 au lait(프랑스어, with milk 라는 뜻)라고는 하지만

우유감이 전혀 없고 싱겁기만 하더라고요.

완전 외도. 공식 항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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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휴게실에서 후르츠우유가 없는 슬픔을 딛고 후르츠오레를 마셨습니다.

 

제1노천탕의 강렬한 인상을 머릿속에서 쫓아내지 못한 채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시원한 기분으로 오늘의 홀로 반성회용 맥주를 조달하러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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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밤에 벚꽃을 라이트업하는 일은 어떨까 싶기도 한데 예쁘긴 하네요.

 

 

6. 물자 조달, 그리고 반성회

 

배도 부르고 온천도 만끽했으니 맥주를 조달해서 여관 방에서 홀로 반성회를 치르는 차례입니다(싸구려 위스키하고 땅콩은 캐리어에 챙겨왔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관 안에서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되는 1층에서 근처에 있는 마트나 편의점을 검색해보니, 여관에서 5.6km 거리에 있는 세븐일레븐만 딱 하나 뜨더라고요. 설마설마 여관 주인한테 근처에 이 시간에 영업하는 마트나 편의점이 없냐 물어봤더니 필자가 검색한 편의점을 알려주더군요.

 

어쩔 수 없지요. 술 마실 때에는 "일단 맥주부터"라는 국민정서를 주체화한 필자에게는 5.6km 정도면 갈 만한 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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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펀의점을 검색해봤더니 꽤나 박력있는 결과가 뜨더라고요.

 

낯선 시골길에서 목적지인 세븐일레븐을 놓치지 않을까 불안했는데 완전 기우였습니다. 주변에 빛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세븐일레븐 간판이 압도적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인적이 드문 산길에 만든 듯 산과 길을 빼고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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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대비는 과장이 아니고 실제로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항상 편의점 간판이 보이는 환경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르겠네요.

 

맥주는 세븐일레븐에서만 파는 기린 이치방시보리(一番搾り)의 스페셜 버전인 "타쿠미노 사에(匠の冴 ; 장인의 날카로움)"를 선택(망설임 없음). 저녁을 일찍 먹은 바람에 밤에 배고플지 모르겠다 싶어서 빵이나 사둘까 빵 코너에 가봤더니 4월 4일은 팥빵의 날이라고 합니다(이유는 불명). 팥빵 하나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잊으면 안 되는 하이볼을 만들기 위한 탄산수하고 얼음을 구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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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은 팥빵의 날이라던데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어요.

 

다시 5.6km 거리를 운전해서 여관에 돌아오면 드디어 반성회 타임입니다. 방에서는 인터넷을 못 쓴다는 정보는 미리 입수했었기 때문에 넷플릭스에서 동영상을 몇 개 다운 받아놨지요.

 

첫째 날은 역시 고독한 이노가시라 고로(井之頭五郎) 상이 카가와에 와서 우동을 먹는 (것으로 예상된) "고독한 미식가 2017년 섣달그믐 스페셜~시코쿠 출장 편~"을 봐야겠지요. 드라마는 고로 상이 타카마츠에 있는 한 비즈니스호텔에서 일어나는 아침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도 하기 전에 우동을 먹었네요.

 

여기서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밤에 배고파지는 사태에 대비해서 팥빵을 사놨는데 갑자기 우동이 먹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영업하는 집이 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달달한 빵으로 겨우 배고픔을 해소한 뒤(컵우동이라도 사둘 걸 그랬어...) 아마 사누키우동은 등장하지 않을 "스파이더맨 홈커밍"으로 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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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맛이 있게 우동을 먹는 모습은 이 상황에서는 독이 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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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스파이더맨 홈커밍"에 사누키우동은 안 나오겠지요?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던 것 같아요. 24시간 이용 가능하다던 온천은 내일 아침에 들어가기로 하고 오늘은 이를 닦고 이부자리를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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