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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 우리는 동티모르로 간다.

1999.10.11.월요일
딴지 인도네시아 특파원 가람

 현지 정서

한국 전투병력의 동티모르 파병이 사실 어느 방향으로 불똥을 튀길지, 어쩌면 아무런 후유증도 일으키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9월 21일자 국내 주요일간신문의 인터뷰에서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자우하리 나타아트마자 대사가 밝힌 바 한국군 파병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요청한 것이고 한국군과 인도네시아군과의 충돌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한국교민에게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설득력이 너무도 빈약하다.

 

 첫째로 현재 하비비 대통령이 이끄는 인도네시아 정부나 현 집권여당인 골카르(Golkar)에 대한 인도네시아 일반 국민들의 지지는 미미하기 이를 데 없어 하비비 정부가 파병요청했다는 사실이 교민들에게는 전혀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기 못할 것이고 더욱이 교민들이 우려하는 대상은 인니 정부가 아닌 일반 국민들이며

 

 둘째로 교민들의 한국군 vs 인도네시아군과의 충돌보다는 한국군 vs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와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동티모르 파병결정이 나온 후 자카르타의 대학생들과 시민 일각에서는 상대가 유엔군이라도 일전을 불사해야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더욱이 75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합병할 당시 제재는 커녕 오히려 동티모르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환영일색이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번에는 동티모르의 독립을 쌍수를 들고 지지하며 다국적군 파병을 주도하는 모습에 대해 인도네시아인들의 역겨움은 극에 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사관들이 몰려 있는 꾸닝안(Kuningan) 지역에서 대대적인 데모가 줄을 잇고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 앞에서 국기를 불사르는 시위가 연일 계속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유엔 평화유지군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보세요. 평화유지군의 상징인 파란색 철모도 쓰지 않았고 중무장한 채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살벌할 뿐이잖아요."

 

오스트레일리아군 선발대가 동티모르에 첫발을 딛던 날부터 사무실 여직원을 포함한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하는 이야기다.

 

하비비 대통령의 동티모르 독립시사발언 때부터 우리 영토를 왜 포기하느냐며 불만이 많던 대부분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제 하비비 대통령의 평화유지군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제외시켜 달라던 요청성명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며 오스트레일리아군 중심의 다국적군을 파병하기 시작한 유엔의 처사를 못마땅해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를 명백한 적국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 그동안 많은 동티모르인들이 죽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네시아도 그동안 동티모르를 많이 개발하고 투자도 해서 제반 생활여건을 많이 향상시킨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동티모르가 독립을 원하니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모두 나가라고 하는 건 분명히 불공평한 일이에요. 오스트레일리아 입장에서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꽉 버티고 있는 인도네시아가 눈에 가시같은 존재인지도 모르죠.

 

그러니 이번 기회에 유엔을 내세워서 동티모르에 교두보를 만들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이라크와는 달라요. 최악의 경우에 경제봉쇄조치를 당하더라도 사막만 있는 이라크와는 달리 우린 자원이 풍부한 나라니까 얼마든지 버틸 수 있지요."

 

일화의 인삼드링크 진생업을 인도네시아에 대대적으로 홍보, 유통하고 있는 반유아르타(PT. Banyuarta Distrindo)의 여사장 시스카(Ms. Frieda Siska)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태어나 화교라는 인종적으로 제한에 한때는 좌절하기도 했다가 이제 훌륭한 상인으로 성공하겠다며 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이 여사장의 말은 누군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 고위관리나 정치가들이 이따금 내뱉는 망언과 많이 닮아 있지만 어쨌든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넘쳐 흐르는 반대의사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교민들의 파병반대 결의문에서처럼 동티모르의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들을 애국자로 생각하며 그들의 만행에 갈채까지 보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물며 화교들까지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티모르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의 대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지의 화교들은 60년대에 일어난 수카르노대통령 시절의 PKI(인도네시아 공산당) 구테타가 수하르토 장군에 의해 진압된 후 사회가 혼란할 때마다 정부와 일반 국민들에게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따돌림당하는 계층이 되어 왔다.

 

중국어를 탄압하여 차이나타운의 상점들도 중국어 간판을 쓰지 못하고 화교학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아 다른 동남아국가의 화교들과는 달리 중국어를 제대로 쓰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여차하면 외국으로 달아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부유한 비겁자들, 돈만 아는 중국인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리 부유하지도 않고 오히려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지닌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따라서 동티모르에 대한 한국군 파병과 이에 따른 민병대와의 충돌은 이들과 한국교민들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지도 모른다.

 

98년 폭동이후 사회가 혼란해 질 때마다 주요 주택단지에서는 자경단이 조직되어 주민들이 죽창, 일본도, 못박은 야구방망이 등을 들고 단지 내를 돌며 불침번을 서고 경비를 서기도 했고 그때마다 나 역시 그 일부가 되어 대부분 화교나 부유한 인도네시아인들인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곤 했다. 

 

매번 폭동의 주 타겟이 되어 막대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 그들 화교, 즉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 이제 한국교민들이 테러의 타겟으로 지목되는 순간 그들 역시 우리의 적이 되어 어쩌면 지난 자카르타 폭동 때의 그 가공할 파괴력으로 밀려들 폭도들 앞에서 우리에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교민들은 정말 안전한가?

 

한편, 앞서 언급한 인도네시아의 흉흉한 사회분위기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폭동의 불씨를 튀길 가능성을 안고 있다. 과거 일종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누렸던 외국인들도 이제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불능력과 부로 인해 강도와 납치 등 범죄의 주 대상이 되고 있고 일전에 단속과정에서 경찰과 일대 총격전까지 벌인 한 납치단은 당시 한 독일인을 납치해 둔 상태였고 한국인 한명을 납치 살해했다는 자백도 했다. 

 

밤늦게 만취한 상태에서 가라오케를 나오다가 훔친 택시에 의해 납치된 그 한국인은 그 후 자카르타 외곽의 어느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바 있다. 굳이 파병때문이 아니라도 한국교민들은 이미 그렇게 현지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티모르에 대한 한국 전투병력의 파병은 한국정부나 일반 한국인으로서는 국력상승의 척도로서 자랑스러워 마지않을 일이며 김대중 대통령 개인으로서도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공으로 국제사회질서와 인권보호에 앞장선 지도자로서 후세 만대와 노벨평화상 심의회에 그 업적이 영롱하게 빛날지 모르나 인니 한국교민들의 정서와 그 처한 상황 역시 잘못된 정보로 인한 오해로 매도하기엔 너무도 현실적이며 외면해 버리기에는 그 파장이 치명적이다. 

 

적지에 버려진 심정이라고나 할까.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은 최근 별도의 안전대책을 다시 세우지는 않았지만 98년 5월 자카르타 폭동 당시의 혼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난 6월 7일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동포안전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소요사태 발생시의 집결지와 수송계획 등을 명시한 이 안전대책이 그러나 실제상황이 닥쳤을 때 얼마나 실효를 거둘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있어 한국은 무엇인가

 

인도네시아의 분쟁지역은 단지 동티모르 뿐이 아니다.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Aceh) 지역은 인도네시아 독립초기부터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정부의 갖은 탄압을 받았고 동티모르 못지 않은 학살과 악행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격렬한 양상은 아니지만 파푸아 뉴기니 섬의 서쪽인 이리얀 자야(Irian Jaya) 역시 독립움직임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곳으로 하비비 대통령의 동티모르 독립시사 발언이 나온 직후 우리도 독립하겠다며 나선 이리얀 자야 지도자들의 성명서는 인니정부에 의해 단번에 묵살되었다. 수많은 인명피해을 낸 종교분쟁이 이미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암본(Ambon) 역시 대표적인 분쟁지역 중의 하나다.

 

이들 지역에 대해 우리 정부나 교민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이 지역에서 박해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인니정부와의 반목으로 인한 교민들의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우린 모두 그런 데에 신경을 쓰기에는 그동안 먹고 살기만으로도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린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러니 이제 와서 동티모르의 민병대를 애국자들이라고 찬양하는 것도 낯간지러운 일이지만 인도네시아 인권에 별 관심도 없었던 것이 틀림없을 한국정부가 동티모르의 인권수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도 앞뒤가 잘 맞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87-89년 한국의 의류/신발공장들이 인도네시아를 가장 적합한 해외투자국으로 간주하고 대거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싼 물가와 호의적인 투자여건도 크게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정권의 안정성 때문이었다. 

 

민주국가의 형태를 갖춘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이 이미 장기집권의 가도에 들어선 지 오래된 시점이었고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당시 전무해 보였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한국기업들은 사업의 안정성을 위해 수하트로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희망했으니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 민주화에도 그리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들 공장에 대거 몰려든 한국인 생산관리자들은 처음 언어의 장벽에 맞부딪히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여 빠른 속도로 공장들을 안정시켜 갔다.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한국의 공단들이 혹사와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악명 드높았던 시절에 일을 배워 관리자로 성장한 이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이 배워왔던 체제와 방식을 현지 공장에 강요함으로써 인도네시아인 근로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고 때로는 대규모의 파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이런 경향은 도처에 엿보인다. 지금도 이력서에 한국업체에서 수년간 일한 경력이 있으면 다른 한국업체들은 물론 현지업체나 여타 외국업체에 취직하는 것이 훨씬 쉬어진다. 그 막무가내, 무대포에 빨리빨리 만 외쳐대는 한국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했다는 사실은 성격이 어지간히 무던하고 업무능력도 탁월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버릇들

 

일상생활에서도 일부 교민들은 한국인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곤 했다. 한때 사이판이나 괌처럼 자카르타에도 한국인 출입금지의 팻말이 걸린 업소들이 등장했었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2-3배 큰 목소리로 옆 테이블의 대화를 교란하면서 급기야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예쁘장한 여종업원의 손목을 더듬고 더 나아가 그들이 알아 듣지 못할 것이 분명한 한국말로 폭언과 음담패설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지금도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가라오케와 환락가를 전전하는 소위 자카르타의 황태자 들도 만만찮은 사람들이다. 그전에도 가라오케 룸 바닥을 고액권으로 빽빽하게 깔아놓고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지만 경제위기와 IMF 상황에 편승해 한때 연리 55-65% 까지 치솟은 예금금리에 돈을 맡기고 희희낙락하며 일반 인도네시아인들의 몇 달치, 때로는 몇 년치 봉급을 하루 밤에 써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IMF 상황 속에서 자카르타에 유입되는 한국인 숫자가 늘어난 것 만큼 한국인 가라오케들은 수도 늘어났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그 시설의 사치를 더해갔고 망가 두아(Mangga Dua)지역의 한국인 가라오케 아궁(Agung)에서는 사실상 회교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본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스트립쇼까지 진출하여 현재도 성업중이다.

 

또한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모든 기업들이 마찬가지지만 많은 한국업체들도 뒷거래, 편법, 줄잡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도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의 인상을 흐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인도네시아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다 싶은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한동안 수하르토 대통령의 자녀들을 통하지 않으면 인도네시아에서의 주요 입찰이나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인도네시아를 도시바(Toshiba)가 망쳤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일견 반일문구처럼 들리는 이 말은 사실은 인도네시아를 수하르토 대통령의 자녀들인 Tommy, Sigit, Hardiyanti(Tutut), Bambang이 망쳤다는 뜻이다. 이들이 간여하지 않은 사업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다들 막강한 재벌을 형성하고 있어 사업가들은 이들에게 줄대기에 여념이 없었고 한국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현재자동차의 엘란트라와 엑센트는 둘째아들 밤방(Bambang)이 소유한 비만타라 그룹(Bimantara Group)을 통해 각각 비만타라(Bimantara)와 챠크라(Cakra)라는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고, 기아자동차의 세피아는 막내아들 또미(Tommy)의 소유인 훔푸스 그룹(Humpuss Group)을 통해 티모르(Timor)라는 브랜드로 소개돼 급기야 일본 경쟁업체들의 WTO 제소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세계적인 스캔들을 거치며 인도네시아의 국민차로 선정된 끝에 지난 자카르타 폭동 때 성난 폭도들의 주요 타겟이 되기도 했다. 

 

다른 경쟁사에 비해 수입관세가 반도 안되는 특혜를 받던 국민차 지정이 이미 무효화된 것은 물론이다. 95년 당시 인도네시아 경찰청 경비정수주 입찰에 참여한 한 저명한 한국기업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다른 한국기업과 합작으로 막내아들 또미를 자가용 비행기에 태워 한국으로 모셔가 한국의 진미(?)를 맛보게 한 바 있고 당시 자가르타 지사장은 또미와 찍은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 주며 자신의 활약을 자랑하곤 했다.

 

세단인 세피아가 평균 가족수가 6-7명은 될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던 도요타 끼장(Kijang)같은 8인승 밴을 제치고 국민차로 지정된 것도 그 직후의 일이다. 이 정도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화교계 대기업들에 비해 한국기업들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교민사회의 폐쇄성

 

어느 나라의 어느 교민세계든 어느 정도의 폐쇄성은 있다. 하지만 현지 화교들이 곧잘 인도네시아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에 의한 부의 독점, 불공정한 관행 뿐 아니라 그 사회의 폐쇄성에도 적지 않은 이유가 있기 때문임을 감안할 때 그 못지 않은 한국교민사회의 폐쇄성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교민사회의 규모가 1만명을 넘어서고 그들 대부분이 상당한 구매력을 보유하고 또한 관련 기업들이 수백개에 이르게 되면 사실 현지 타 업체들을 무시하고 교민들만을 상대로 사업을 하더라도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상당한 이익도 남길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교민상대의 사업이 폭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자카르타 폭동당시 7천명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한국교민 인구가 어렵지 않게 원래의 수준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기업들끼리만 재하청을 주고 받는 봉제업체들, 현지업체나 제 3국 업체의 제품이 제아무리 가격이나 조건이 좋다고 해도 한국업체로부터의 구매만을 고집하는 관리자들. 한국에서 막 도착한 한국인 출장자를 처음 데리고 가는 곳이 한국식당이고 2차는 한국인 가라오케, 한국인 사우나에서 맛사지를 받고 한국인 브로커를 통해 한국업체들을 소개받아 한국어, 한국어로만… 

 

따라서 한국인 직원이 없는 현지업체는 결코 그들의 거래상대가 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부산출신 신발공장들은 밉던 곱던 반드시 부산출신 특송업체인 맥트랜스(McTrans)만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자연히 주부들은 십년을 넘게 살아도 인도네시아어를 거의 할 줄 모르고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과 사업과 생활의 단순한 파트너를 뛰어 넘어 진정한 동반자의 단계까지 결코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전체를 상대로 사업을 하는 코린도그룹이나 종합상사 현지지점들의 절절한 노력이 빛을 잃는 대목이다. 그나마 코린도그룹 역시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승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주지 않은채 모든 관리자급 직위는 한국인들이 독점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미 십수년을 살아오면서도 우린 그래서 아직도 영원한 외국인 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단편적인 행동양태의 배경이 단지 일상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배후에는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경멸적인 시각도 다분히 깔려있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95년 당시 자카르타 연합교회 남선교회 회보에서 한 여집사는 운전사들도 사람이니 교회주부들 식사모임이나 골프모임 때 땡볕에서 장시간 기다리는 운전사들에게 물이라도 한 컵 가져다 주고 식사라도 제공하자 라는 요지의 기고문을 올린 적이 있다. 

 

훌륭하고도 인도적인 취지였지만 결국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주는 운전사들에 대한 한국인들, 특히 한국부인들의 평소 처우가 얼마나 열악했는가를 거꾸로 미루어 짐작케 해주는 글이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잘 대해주면 기어오른다라는 논리를 근거로 가족들 외식 때 유아를 위해 함께 데리고 다니는 현지인 유모(일반적으로 간호사라고 부르나 간호사면허는 있을 리 없음)에게 풍성한 식탁에서 밥 한톨, 물 한컵 나누어 주지않는 대부분의 현지화교들에 비해서는 실천적 행동면에서 한국인들이 분명 더 호의적이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서는 화교들과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꾸랑 따우(Kurang = 모자라다, Tahu = 알다)라는 말은 잘 모르겠다는 의미로서 모른다는 의미인 띠닥 따우(Tidak Tahu)와 회화적으로는 같은 맥락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전임 창고장은 인도네시아 놈들은 거만하기 짝이 없고 자존심만 엄청 쎄서 몰라도 모른다고는 죽어도 하지 않고 아는 게 좀 부족하다며 끝까지 우기고 다닌단 말야 라며 자카르타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멸 가득찬 말투로 말해 주곤 했다. 무지의 소치였지만 이 역시 인도네시아인들을 바라보는 한국교민들의 한 단면이었다.

 

화교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시각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앞뒤 꽉 막힌 천박한 장사치로 치부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웃음을 띄고 한 발 양보하는 듯한 그들이 한국교민들을 보는 비판적인 시각도 한번은 짚어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또 한번 시스카 여사장의 말을 빈다.

 
 

" 한국사람들은 일할 때엔 그렇게 적극적이고 친절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왜 그렇게 변해 버리는 거죠? 우리 옆집에도 한국사람들이 살아요. 그 사람들은 전혀 웃지도 않더군요. 

 

그렇게 오래 같은 동네에 살면서 자주 지나치면 인사라도 한번 걸어올 법 한데 눈만 마주치면 홱 고개를 돌리거나 집안으로 들어가 버려요. 원래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건방진 건가요? 아니면 듣던 데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깔보는 건가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가끔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는 동티모르로 간다.

 

인도네시아의 영원한 이방인 한국인들은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공포에 떠는 진정한 이유는 자카르타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의 동쪽 끝 동티모르에 파병되는 우리 군인들때문이라기 보다는 날로 험악해지는 현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발벗고 감싸주며 힘이 되어 줄 진정한 친구들을 그동안 만들어 두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제 교민들이 아무리 아우성을 치고 국내 주요일간지에 수십면 씩의 전면광고를 때려 반대결의문 할아버지를 내더라도 이미 결정된 파병은 예정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진행될 파병이라면 좀더 이해 당사자들의 충분한 의견을 수렴하고 원만한 합의를 거쳤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파병에 관하여 세계평화와 인권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만큼 오늘 우리의 조국이 그런 평화공화국, 인권국가였다면 더더욱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또한 지난 8월 14일 마지막 교민안내문을 발표한 후 파병반대의 목소리가 교민사회를 뒤흔드는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재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울 뿐이다. 설마 현지 한국교민 전부가 자스민 9호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처음에 우려했던 것처럼 이미 많이 늦어져 버린 일이지만 동티모르와 한국교민의 내일에 대해 다 같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 하지만 그 결과에 관계없이 우리 병사들은 동티모를 향하고, 나와 현지교민들의 운명 역시 모두 함께, 이제 우리는 동티모르로 간다...

 

 

 

 

- 동티모르파병과 암 상관없이 다시 자카르타에 
파견된 딴지일보 인도네시아 특파원 가람.
( donsbay@thrunet.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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