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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목차

 

1.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 링크

2. 송악의 잠룡 왕건 - 링크

3. 궁예의 관심법과 왕건의 결심 - 링크

4. 패강의 눈물 - 링크

5. 삼국통일 - 링크

6. 광종의 히든카드 - 링크

7. 고려판 사법고시 - 링크

8. 고려의 노스트라다무스 최지몽

9. 전쟁의 신 서희

10. 천추태후와 강조의 변

11. 거란의 2차 침입과 몽진

12. 양규와 하공진

13. 강감찬과 귀주대첩

 

 

<지난 편 역사, 한 줄 요약>

 

1. 쌍기를 주축으로 개혁을 진행한 광종은 노비안검법 이후, 두 번째 개혁 정책을 내놓는다. 과거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2. 이전에는 음서제로, 사실상 세습 관리제도였는데, 이제는 시험을 본다는 것이었다.

 

3. 광종 재위 중 8차례 과거가 열렸지만, 대부분 호족의 자제는 합격하지 못했다.

 

4. 광종 개혁에 힘을 보탰던 신하는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 과거 급제자들과 기존 세력 중 하나였던 신라계 인사들이었다.

 

5. 광종은 관복 시스템도 도입하여, 신하들의 옷을 통일했다.

 

6. 그러나 광종 집권 말기가 되면서, 왕권 강화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광종은 과도한 의심병이 생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옥에 갇혔다. 왕권 위협 의심 받는 사람 중엔 광종의 아들 경종도 있었다.

 

7. 975년 광종의 죽음으로 공포시대가 막을 내리고, 경종이 즉위했다.

 


 

경종 즉위.jpg

출처-<SBS>

 

고려 4대 왕 광종의 아들 '왕주'는, 재위 말년 광기 어린 폭주로 아들마저 라이벌로 여겼던 아버지 광종 아래서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광종이 975년 서거하자 그가 2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고려 5대 왕 경종이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심리적 트라우마뿐 아니었다. 원한을 품은 정적들도 남겼다. 

 

경종이 즉위할 당시 살아남은 호족 공신의 수는 오십 명이 채 안 되었다. 경종은 아버지와 다른 행보를 걷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아직 권력이 공고하지 않은 경종이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선왕 때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이제 대통합의 시대를 열 것이다. 현 시간부로 전국에 걸쳐 사면령을 내린다.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이를 풀어주고, 파직된 자들을 복권하도록 하라.”  

 

이어 경종은 호족 출신 ‘왕선’을 재상인 집정에 봉하고, 호족 세력과 화합을 시도했다. 성이 왕씨라 왕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진 않다. 왕선은 왕건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받은 호족 가문의 사람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태조 왕건은 호족 포섭 정책의 일환으로 혼인을 택했고, 그 결과 부인만 29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혼인만으로 유력 호족 가문을 모두 포섭할 순 없었다. 부인이 많아지면서 왕건이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딸이 없는 호족 가문은 혼인으로 포섭할 수 없었다. 왕건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들에게 왕의 성씨를 하사하여 자신을 지지하도록 포섭했다.

 

왕선은 이렇게 왕씨 성을 받은 호족 가문의 사람이었다. 광종이 서거한 후, 왕선은 그동안 당한 호족들의 복수를 도모했다.

 

 

복수를 허용한 법, 복수법

 

왕선 호족.PNG

출처-<KBS2>

 

“지난날 우리가 당했던 수모에 대한 복수를 반드시 해야 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우리 호족 어르신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들은 죄다 과거를 통해 입궐한 새파란 관료들이나 귀화인들의 사주를 받은 천한 것들 아닙니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과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쉰다는 것조차 역겹소이다. 내 폐하께 고하여 꼭 그 법안을 시행하도록 청을 올리겠소.”

 

집정 왕선이 호족 세력을 등에 업고 경종에게 한 법안을 주청했다. 그 법은 너무나 일차원적이어서 선사시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원시적이었다. 

 

“복수법이라 하였소?”

 

경종 물음.jpg

 

경종이 매우 놀라 되물었다. 말 그대로 복수법. 공적 체계를 통하지 않고 개인이 사적으로 단죄하거나 처벌하는 '사적 제재' 허용하자는 법이었다. 

 

경종의 물음에 왕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선대왕 말기에 저질러진 참혹한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저희 호족과 절대 앞으로 함께 나아가실 수 없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때의 일이 분명 잘못된 것이기는 하나, 사적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은 좀 과하지 않소? 짐이 대대적인 사면과 복권을 이미 실행하였는데, 아직도 분이 안 풀리시오?”

 

“폐하! 이것은 결단코 사적인 감정이 담긴 것이 아니옵니다. 또한 소신이 집정입니다. 철저한 조사와 진상 규명 후에 복수를 할 수 있도록 진행하겠습니다.”

 

복수법은 놀랍게도 무려 일 년간 지속되었다. 억울한 희생자가 필연적으로 양상 되었다. 경종 집권 초기는 또다시 피로 물들며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왕선은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고, 자신의 종착역이 다가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왕실의 종친까지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경종은 폭발했다. 민심도 왕선에게 등을 돌렸다.

 

“네 이놈! 감히 왕명도 없이 왕실의 종친을 네 마음대로 죽여? 이것이 네가 말하던 모두를 위한 복수법이란 말이냐!”

 

분노분노.PNG

 

경종은 왕선을 파직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으로 안심할 순 없었다.

 

“결국 아바마마께서 옳았던 말인가? 화합과 공존은 서책에나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그자를 부를 수밖에 없겠구나. 여봐라. 최지몽을 불러오너라!”

 

“폐하? 최지몽은....”

 

 

고려의 노스트라다무스 최지몽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최지몽(907~987)의 본명은 최종진이다. 공부를 좋아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학문을 익혔는데, 여기에는 천문과 주역 그리고 점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님. 저는 하늘의 별을 보고 앞날을 예측하는 일이 즐겁기도 하고, 제가 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일로 인해 저는 장수를 누리고 집안에 복을 불러올 것입니다.”

 

최지몽은 자신의 앞날뿐 아니라 마을의 대소사를 정확히 예측했다. 천재 소년의 능력은 과장되고 부풀려져 마침내 왕건의 귀에까지 들렸다. 왕건은 최지몽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훗날 삼한을 통일할 고려 태조 왕건과 18세 천재 소년이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뤄졌다(당시 왕건은 고려는 건국했으나 아직 삼한 통일을 이루기 전이었다).

 

태조 왕건.PNG

출처-<KBS1>

 

“네 이름이 최충진이라고 하였더냐? 내 요 며칠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어 기이하다고 여기던 차에 네가 용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리 불렀다.”

 

왕건은 소년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잠시 후 소년이 대답했다.

 

“장차 삼한을 통일할 길몽입니다.”

 

“참으로 그러하단 말이냐? 너의 해몽이 반드시 들어맞기를 바라며, 너에게 지몽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라.”

 

그날 이후로, 소년은 왕건의 측근으로 머물렀고, 모두 아는 것처럼 소년의 해몽은 사실이 되었다. 

 

 

광종 때까지 탄탄대로였던 최지몽

 

고려 2대 왕 혜종 2년, 사천관으로 재직 중이던 최지몽은 매우 불길한 점괘를 들고 급히 혜종을 찾았다. 

 

최지몽.PNG

 

“폐하! 지금 급히 처소를 옮기셔야 하옵니다. 폐하를 시해하고 역모를 일으키려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선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최지몽은 혜종의 처소를 옮기는 것을 최 측근에게만 알렸다. 그날 밤, 경기 광주의 호족 왕규가 보낸 자객이 혜종이 머물던 처소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최지몽은 그곳에 미리 무사들을 대기시켰고, 자객들은 어렵지 않게 제압되었다.

 

“경이 아니면 큰 변을 당할 뻔했다.”

 

이후 최지몽은 광종 때까지 탄탄대로를 달렸다. 음주 사고로 스스로 커리어를 망치기 전까진 말이다. 광종과 함께 귀법사에 동행했을 때 술주정을 한 것이다.

 

“폐하, 꺽... 어찌하여 제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태조 대왕 때부터 줄곧....”

 

“저 늙은이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뭣들 하느냐! 저자를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보내버려라.”

 

 

최지몽 컴백하다

 

최지몽은 한직으로 밀려나 10년 넘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최지몽을 경종이 다시 중앙정계로 불러들였다.

 

최지몽을 부른 경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경종 마지막.PNG

 

“아직도 천기를 읽는 눈이 밝으시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별을 보고 천기를 읽는 것은 눈이 아니옵니다. 몸은 이미 늙었으나 총기만은 여전하니 심려 마십시오. 폐하께서 신을 이리 부르실 줄 알고 얼마 전부터 별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래, 어떤 점괘가 나왔소?”

 

“폐하, 왕승을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최지몽의 점괘는 왕승이 꾀하던 모반을 잡아냈다. 역모를 미리 예견한다? 

 

최지몽은 과연 천기를 읽어내는 능력과 세상을 보는 식견을 가졌던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흐름을 읽는 처세술에 뛰어났던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경종은 치세 동안 최지몽에게 신임을 줬다. 그는 경종에 이어 고려 6대 왕 성종 대에도 주요 관직에 머무르며 지신의 쓸모와 능력을 입증했다. 태조 왕건부터 총 6명의 왕을 모신 그는 성종 6년인 987년,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여섯 명의 왕이 내 말을 듣기 위해 귀를 열었다. 이만하면 왕보다 나은 삶이 아니었나?”

 

<계속>

 

 

<오늘의 역사, 한 줄 요약>

 

1. 광종 서거 후, 고려 5대 왕 경종이 즉위했다.

 

2. 권력이 공고하지 않았던 경종은 호족과 화합을 시도했다. 또한 호족 출신인 왕선을 재상에 임명했다.

 

3. 왕선은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복수법'을 만들어, 광종 시대에 호족들이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했다. 

 

4. 복수의 대상 중엔 왕실의 종친도 있었는데, 왕선은 왕실 종친도 복수법으로 죽였다.

 

5. 격노한 경종은 왕선을 귀양 보냈고, 고려의 노스트라다무스 최지몽을 다시 등용했다.

 

6. 최지몽은 천기를 읽을 줄 알았거나, 왕의 마음과 정치판을 정확히 읽는 처세술의 대가였다. 그 능력으로, 그는 왕건부터 시작하여 6명의 왕에게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 역사의 빈틈은 개연성을 고려하여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꿨음을 알린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한 편 한 편 이야기로 엮는다.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재연(?!)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어주자...!

 

유튜브 채널 <역사킹> 링크

 

 

 

 

 

 

필자의 지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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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찌라시 한국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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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찌라시 세계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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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 아직 안 죽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