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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은 누구보다도 미국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자서전적인 에세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에서


“새롭고 낡은 모든 주제와 사물을, 미국과 민주주의의 도래가 비추는 빛으로 반성해볼 때가 되었다”


라고 썼다.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다. 이제 세상의 중심은 미국이며 미국적 가치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선언이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의 전망>에서


“민주주의만이 아주 다양하고 멀리 떨어진 지역의 나라들과 사람들을 형제관계, 한 가족으로 묶을 수 있으며, 묶도록 모색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오 민주주의여 너를 위하여>라는 시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이렇게 노래한다.


자, 나는 난공불락의 대륙을 만들 것이다,
나는 태양이 지금까지 비춘 적 있는 가장 빛나는 민족을 만들 것이다,
나는 성스럽고 매력 있는 나라를 만들 것이다,
동지애로,
동지의 남성다운 사랑으로.


나는 미국의 모든 강을 따라서, 큰 호수들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모든 평원 위에 나무처럼 빽빽하게 우애를 심을 것이다,
나는 서로의 목에 팔을 걸고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도시들을 만들 것이다,
동지애로,
동지의 남성다운 사랑으로.


내게서 이런 것들을 네게 바친다, 오 민주주의여 나의 여인 너를 섬기기 위해!
너를 위해, 너를 위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노래를 부른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섬겨야 할 여인이며 남성들끼리의 동료애에 바탕을 둔 강고한 연대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물적토대는 거대한 자연과 민중이다. 그는 많은 시에서 민중에 대한 아낌없는 신뢰를 보내며 남성들 사이의 연대를 강조한다. 민주주의를 여성으로 비교하고 남성 사이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 지극히 남성 중심적 사고이긴 하지만, ‘미국은 그 자체가 시’라고 외칠 만큼 자신의 나라에 대한 확신은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


민주주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이 아닐까?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영국에서 생겨나 미국에서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우리가 의원내각제라고 부르는 영국식 정치제도와 대통령중심제라고 부르는 미국식 정치제도는 같은 나무에서 난 다른 열매다. 영국의 민주주의가 왕에게 독점된 권력을 더 많은 국민에게 분배하는 과정이었다면, 미국 민주주의는 개개인에게 분산되어 있는 권력을 대표자들에게 위임하는 형식으로 성립되었다.


영국의 의원내각제는 한마디로 왕권의 해체과정이었다. ‘왕권신수설’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던 절대권력을 영국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해체해 국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누구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존의 자리에 오르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왕이 되는 순간 그의 모든 행위는 신의 뜻이기에 인간이 심판할 수 없다. 그가 책임질 존재는 오로지 하나, 신이다. 신이 명한 일을 인간이 어떻게 심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근대 이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믿었다. 그 생각을 뒤엎은 것이 ‘계몽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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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을 촉발시킨 사건 중 하나인 <테니스 코트의 서약>.

프랑스 혁명도 계몽주의가 촉발한 혁명이다.


미국의 독립과 건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계몽주의자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태어날 때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타고 난다. 그 권리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부여받았다. 자연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평등한 권리를 존중하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면 자연 상태야 말로 가장 행복한 상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소수의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고 남의 권리를 침해하려 하기 때문에 자연 상태는 쉽게 전쟁 상태로 전락한다. 선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계약을 맺어 서로를 보호할 정부를 조직하고, 대표를 뽑아야 하며, 조직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대표들에게 개개인의 권리를 일부 양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때조차도 개인은 권리의 본질적인 가치까지 위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부도 피지배자의 상호 동의에 의해 성립되지 않는다면 정당성이 없다. 어떤 정부도 정복이나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성립되었다면 구성원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피지배자의 동의에 의해 성립된 정부라도 그들에게 위임된 것 이상으로 권한을 행사해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때는 정당성을 잃는다. 시민은 그런 정부를 타도할 권리가 있다. 즉 사회는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왕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 사이의 계약’으로 성립된다. 미국은 바로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미국 건국의 주역들은 독립전쟁과 헌법제정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나 믿음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 대다수는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민중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에 부와 지위를 획득한 상류층과 중산층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립과 건국을 하는 과정에서 흑인, 계약노동자, 하층민, 여성을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다.


미국 헌법 제정에 깊숙이 관여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연방주의론>에 실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민은 난폭하고 변덕스럽다. 그들은 좀처럼 올바른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최상층 계급에 정부에서의 분명하고 영속적인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인민대중에 의하여 매번 바뀌는 민주적인 의회가 과연 지속적으로 공공의 선을 안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겠는가? 오직 영속적인 기구만이 민주주의의 무분별을 억제할 수 있다.”


미국은 독립을 선언한 후 재빨리 주정부와 중앙정부를 구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건국의 주역들은 영국의 왕정을 대신해 공화정을 실시하며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합의하고, 주정부와 중앙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미국에 영국과 같은 전제 권력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와 중앙정부 사이, 주와 중앙정부의 기관들 사이에 권력을 분립하고, 권력의 행사범위를 문서로 명확하게 규정하며, 권력은 문서에 위임된 범위에서만 행사하도록 하였다. 그게 ‘헌법’이다. 즉 미국 헌법은 13개의 나라가 하나의 나라로 뭉치면서 맺은 계약서다.


대륙회의는 1777년에 미국 최초의 성문헌법이라 할 연합헌장을 채택하고 이 헌장에 따라 중앙정부를 구성했다. 이 정부는 입법부만으로 구성된 정부로, 정부의 권한은 전쟁을 수행하고, 다른 나라와 외교를 맺고, 화폐를 발행하고, 예산을 편성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국민과 각 주들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178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1787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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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기초위원들은 로크의 삼권분립 이론에 따라 정부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분리하고 그 사이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며 상호 감시와 견제를 하게 만들었다. 어느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의 위에 있거나 횡포를 부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만든 헌법은 민중에 대한 불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대통령은 국민의 직선이 아니라 선거인단을 통해 간선으로 뽑으며, 연방의회의 상원은 주 의회에서 선출하며, 연방 대법원 판사는 대통령이 추천해서 의회에서 뽑았다. 하원은 유일하게 국민이 직선으로 뽑았지만, 일정한 재산이 있는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해 하층민의 투표를 막았다. 한마디로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최대한 억제한 헌법이었다.


미국 헌법은 세계 최초의 성문헌법이다. 그 후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은 이 헌법을 모범으로 삼아 헌법을 제정했다. 미국의 모든 권력은 이 헌법에서 기원하며 국민의 의무와 권리 역시 이 헌법에서 나온다. 오늘날 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헌법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그 이상의 아무런 제한이 없다.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어떤 조항도 없다. 그런데 그 부실한 헌법이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발휘하며, 세계 헌법의 모델이 되었다. 헌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헌법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끝없이 재해석하고 수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살아 있게 만들었다. 미국 헌법은 좋은 법이 문제가 아니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문제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무리 좋은 법도 지키려는 의지가 없으면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앨빈 토크빌은 미국 헌법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것과 따로 떨어진 전체를 형성하는 것으로서, 전체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은 물론 입법자에게도 구속력이 있지만, 일정한 절차에 따라 미리 심의된 사안들에 관해서는 국민의 의사에 의해서 개정될 수 있다. 따라서 아메리카에서는 헌법을 바꿀 수 있지만, 헌법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모든 권위의 원천이 되며 지배 권력의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토크빌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애초부터 인간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를 선택했다. 법의 최정상에 헌법이 있었으며 헌법의 잦은 수정을 막기 위해 절차를 까다롭게 정했고, 수정할 때도 ‘수정헌법(Amendment)’이라 하여 필요한 조항만 고치거나 제정해 제헌헌법에 추가하였다. 헌법의 영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미국은 지금까지 26개의 새로운 수정헌법 조항을 만들었다. 그 중 수정헌법 제1조부터 제10조까지는 1791년 1차 개헌으로 제정되었다. 제헌헌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미처 정하지 못해 추가했다. 오늘날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실려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 여기에 명시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흔히 이것을 ‘권리장전’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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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조항은 종교‧언론‧출판의 자유, 집회 및 청원의 권리, 무기 휴대의 권리, 군인의 민가 숙영 금지, 수색 및 체포 시 영장 제시 의무, 형사사건에서 동일범죄에 대한 반복 처벌 금지, 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생명‧자유‧재산 박탈 금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과다한 보석금‧형벌‧벌금 금지 등이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1789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옹립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가 두 번 연임하고 8년 후 후배들을 위해 물러났고, 그것이 대통령 임기 8년의 관례가 되었다. 초대 대통령도 8년밖에 안 했는데 감히 누가 그 기록에 도전하겠는가? 아무도 그 기록을 깰 생각을 못 했다.


미국에서 워싱턴의 기록을 깬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그가 바로 디어도어 루즈벨트다. 그는 1930년대 경제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국의 유일한 4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죽고 난 뒤 비로소 미국은 1951년에 수정헌법 22조에서 대통령의 임기를 2회 8년으로 제한했다. 그들은 150년 이상 대통령의 8년 임기제를 관습으로 지킨 것이다. 그들은 그만큼 무섭도록 헌법을 지키고 만들어갔다.


워싱턴의 자발적 퇴임은 미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왕정이 지배하던 시대에 공화정을 실현한 것도 정치사에 혁명적인데, 하물며 권력자가 스스로 그 자리를 내놓는다니. 대단한 결단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는 물러나면서 미국의 미래에 대해 많은 우려와 고언을 했다. 연방정부만이 국민의 안전과 번영과 자유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토대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고별사에서 연방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이며, 그것을 위협하는 지역적 분파주의, 정치 이념에 따른 파당, 외세의 간섭을 경계하도록 호소했다. 어쩌면 그는 당시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지역과 정치적 이념에 따른 분열을 충분히 인식했는지 모른다.


미국은 여러 나라가 뭉쳐 하나의 연방국가를 만든 만큼 건국 초부터 국가의 방향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핵심은 흔히 연방주의와 공화주의로 불리는 두 개의 사상적 흐름이었다. 연방주의는 워싱턴 정부의 재무장관을 지낸 해밀턴과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로 대표되었으며, 공화주의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저자이자 3대 대통령을 지낸 제퍼슨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두 이념은 미국의 장래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지녔으며 서로 다른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었다.


먼저 연방주의를 지지한 사람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지향했다. 그들은 북부의 상인과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공업과 상업을 국가 부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민중을 불신했으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므로 본성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동선과 평등 같은 가치를 혐오하고 사유재산과 계약의 자유를 신성시하였으며, 정부는 재산을 가진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엄중한 법률의 집행, 세계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강한 국가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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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제퍼슨은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선하며, 자연은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 도덕적 본능을 심어놓았다고 믿었다. 그는 땅에서 노동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의 토대라고 생각했다. 공화주의자들은 권력을 각 주에 분산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은 군주제를 향한 퇴보로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상업은 인간의 건강한 정신을 파괴하고 약탈적이며 인간을 자본에 예속시켜 건강한 시민을 양육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농업에 바탕을 둔 경제, 신축성 있는 법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공민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사상은 주로 남부에 바탕을 두었다.


워싱턴은 대체로 연방파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그의 정부에서는 두 세력이 표면적으로 대립하지 않았다. 정치적 분파를 극도로 꺼린 워싱턴의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양 세력이 자신들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고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파가 승리하자 외국인규제법과 선동금지법 같은 보수색이 짙은 법을 제정했고,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그리고 1800년의 선거에서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공화파는 마침내 권력을 쥔다.


이 두 사상은 그 후 미국 정치에서 양당 제도를 성립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공화당은 연방주의의 가치에 좀 더 충실한 반면에 민주당은 공화주의의 이념의 영향을 좀 더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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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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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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