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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8. 월요일

편집부 홀짝







 






고통스러운 무더위가 지나고 달력이 9월로 넘어가면서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에 ‘~ 채용’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반기 공채 시즌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는 그렇게 요란한 듯하면서 무심하게 다시 울려 퍼졌다. 서류 마감과 합격자 발표, 인적성 검사를 빙자한 필기 시험과 합격자 발표, 1차 면접과 또 다시 합격자 발표, 2차 최종 면접과 최종 합격자 발표가 지리하게 이어지는 레이스의 서막.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이 별거냐. 대한민국 구직자는 모두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다. 떨어져도 울고, 붙어도 운다.


며칠 전 졸업을 앞둔 대학 후배를 만났다. 후배 역시 하반기 공채 레이스에 참가한 구직자 중 한 명이다. 시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으니 레이스는 어느덧 중반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들은 대부분 서류 심사를 끝내고 인적성 검사나 1차 면접에 돌입해 있으니, 후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위 말하는 ‘쓸만한’ 기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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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지금까지 서른 곳 정도의 기업에 서류 지원을 했다고 한다. 결과는 모두 서류 탈락. 0승 30패란다. 적당히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놀고, 나름 성실하게 공부도 하면서 보냈던 지난 대학 생활에 대한 평가치곤 참담하다. 그늘진 후배 얼굴이 남 일 같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0승 42패였던가.


해줄 말이 없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한다. 다들 그렇게 취업하는 거라고 말해줬다. 어차피 취업이란 게 1승만 하면 끝나는 게임이니 포기하지 말라고, 나는 하반기 공채에 대략 70곳 정도 지원했었다고. 너무 대기업만 노리지 말고 기대 연봉을 조금만 더 낮춰보라는, 굳이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조언과 위로를 전하고 나니 뒷맛이 더 씁쓸했다. 100곳에 지원한다고 해서 1승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까. 달콤한 1승을 바라보며 몇 십 번의 뼈아픈 패배를 견뎌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니까. 차마 그 다음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서른 번 패배한 사람에게 이길 때까지 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잔인한 말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해줄 수가 없다는 것처럼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그래도 기회가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패배가 일상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정서가 된다. 비단 입사 전쟁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평범한 대부분은 지면서 살아간다. 일에도, 사랑에도, 꿈에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무좀 같은 세상이다.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삭막함에 얼기설기 갈라진 발바닥 같은 세상. 신발을 신고 있는 하루 종일 참을 수 없는 가려움 때문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렇게 하루를 참아내고 저녁이 되면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신다. 신발을 벗고 있는 힘을 다해 발바닥을 벅벅 긁어댄다. 잠시 동안의 시원함에 취해 잠들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긁어냈던 발바닥은 벗겨진 살갗과 그 안에 맺힌 피 때문에 걸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따갑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속이 따갑다. 오후가 되면 발바닥은 다시 마르고 갈라져 가려워 올 게다. 어제의 과음을 후회하며 쓰린 속을 풀고 나면 퇴근 무렵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 잔이 생각날 게다.


해마다 1년 중 유독 1월과 2월에 저작권료를 많이 받는 가수가 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줄여서 그냥 달빛요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원맨밴드다. 흔히들 말하는 홍대 인디밴드. 원맨밴드이니 당연히 멤버는 한 명. 홍대 인디밴드라는 진부한 표현이 그렇다고 거짓이 아닌 이유는 그가 홍익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는 점. 그리고 원맨밴드로 홀로 작곡, 작사, 노래까지 하면서 소속사도 없이 홀로 모든 일을 도맡아 했으니 ‘인디’라는 수식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인디’는 independent를 줄인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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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의 음악을 소개할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다. ‘패배’, ‘자기비하’, ‘우울’, ‘체념’과 같이 다소 부정적 의미를 가진 것들이 대부분이다.(그의 음악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깨달은 지 오래야 이게 내 팔자라는 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말 좀 해다오 시내버스야. 내 갈 곳이 어딘지 좀 말해다오. -「361 타고 집에 간다」


스끼다시 내 인생. 스포츠 신문 같은 나의 노래. (중략)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스끼다시 내 인생」


내 인생의 영토는 여기까지 주공1단지 그대의 치킨런. 세상은 내게 감사하라네. 그래 알았어. 그냥 찌그러져 있을게. -「치킨런」


가지려 하지마. 다 정해져 있어. 세상의 주인공은 니가 아냐. 이 멋진 세상을 그냥 받아들여. 어차피 넌 이 세상이 주인공이 아냐. -「스무 살의 나에게」



1월과 2월은 세상이 얼어붙는 계절이다. 그리고 일 년 중 가장 많은 패배자가 양산되는 시기다. 대학에 떨어진 사람들, 하반기 공채에서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다른 여러 시험들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얼어붙은 계절의 차가운 바람과, 그 보다 더 매서운 현실의 추위에 잔뜩 몸을 웅크리는 1월과 2월.


달빛요정의 저작권 수입이 하필이면 1, 2월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 그것에 대한 이유를 방금 언급한 내용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것은 무리일까? 어찌됐든 달빛요정 음악의 대부분은 패배와 체념을 노래한 것이니까. 


달빛요정은 3집 앨범 소개에서 “행복한 사람은 듣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것이 달빛요정 음악의 정체성이라면 정체성인 것이다.


<찌질한 위인전>의 네 번째 인물. 이진원.


3년 전 세상을 떠난 故 이진원. 가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본명이다. 그리고 <찌질한 위인전>이 소개하는 네 번째 인물이다. 본 연재가 달빛요정을 소개한다는 것에 많은 독자들이 의아해 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편이 본 연재의 외전(外傳)과 같은 성격의 글이라 생각하셔도 좋다. 그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위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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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필자가 달빛요정을 소개하고자 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 평범한 남자의 평범하지 않은 선택과 삶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위로가 분명하게 있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필자의 견해가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언론이 제멋대로 덧씌운 달빛요정에 대한 오해. ‘생활고에 시달리다 숨진 불행한 뮤지션’이라는 잘못된 딱지를 걷어내기 위함이다. 서른 여덞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때이른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지언정 달빛요정은 ‘불행을 노래한 뮤지션’이었을 뿐, 그가 불행한 삶을 살다 갔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위인이 위인 되기 위한 특별한 기준 같은 것은 없잖은가. 어느 정도 대중의 공감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 또한 당대의 평가 보다는 후대의 몫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한다.


요정의 탄생


2003년 2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1집 앨범이 발매되었다. 자칭 ‘가내수공업’으로 찍어낸 2,000장의 앨범. 달빛요정의 데뷔 앨범은 은퇴 앨범이 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작곡가로 먹고 살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한 생활이 1년이 다 지나도록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않자 그럴 바에는 그냥 ‘내가 부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앨범 작업.(작곡가 생활 1년 간 몇 곡을 ‘팔’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깔렸’다고 한다) 대학 시절 창작곡 연구회 ‘뚜라미’ 활동을 할 때부터 만들어 왔던 곡들 가운데 10곡을 추려 시작한 작업이었다. 2,000장 중 1,000장은 평생에 걸쳐 열심히 팔고 나머지 1,000장은 친구들과 앞으로 알게 될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요량으로 만들어진 그의 앨범 2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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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Infield fly>


앨범 발매와 동시에 판매를 위해 만들어진 그의 홈페이지(www.rockwillneverdie.com). 인터넷 공간에서 여기저기 입 소문을 타기 시작한 그의 앨범은 1년 동안 700여 장 정도가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젠 슬슬 이 거지 같은 딴따라질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았다. 1년 동안 700장을 팔았으니 나쁘지 않은 성과. 그만하자. 여기까지 만족하자. 이제 앞으로 10년은 열심히 산업역군의 신분으로 좆나게 일이나 하다가 뒈지든가, 마흔 살까지 살아 있다면 2집이자 마지막 앨범을 내는 거야.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유고 에세이집 「행운아」 中



그러나 ‘거지 같은 딴따라질’을 그만 하리라는 그의 결심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2003년 2월 6일에 1집이 발매되고 난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다. 2004년 1월,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인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의 코너인 인디차트에 1집 수록곡 「절룩거리네」가 소개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노래가 소개된 지 1주일만에 차트 1위에 오르더니 5주 동안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사태가 벌어지더니 3주만에 900장의 음반이 팔렸다. 2004년 3월 2일 부로 1599장의 판매고를 올린 1집이 완판되었다. 1집의 눈부신 성공, 요정의 탄생이었다.


요정에 대한 오해


화려하게(?) 데뷔한 달빛요정. 달빛요정의 노래에 담긴 특유의 ‘패배자의 정서’는, 비록 방송활동 등의 제약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름의 팬덤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인디 뮤지션의 넉넉하지 못한 생활과 작업 환경이 그가 노래한 특유의 ‘패배자의 정서’가 결합되면서, 그로서는 원치 않은 이미지가 생겨났다. 1집의 성공 이후 여기저기서 들어온 인터뷰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IMF 실직 설움, 음악으로 달래” 따위의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오간 데 없고 오로지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뮤지션 이진원이 그려졌다.


달빛요정은 활동 당시 모 지상파 방송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는데, 그의 가족들은 방송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촬영 과정에서 논의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편집이 되어 방송이 나간 것이다.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PD가 그의 어머니와 전화 통화까지 하면서 안심시켰던 내용과는 달리 TV화면에 비춰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그저 초라하고 불쌍한 뮤지션일 뿐이었다.


연습하는 거 찍어갔는데 제발 불쌍하게만 안 나오면 좋겠다. 나의 무한한 추락이 그들에게는 가벼운 소재가 되겠지. 나의 처절한 파멸만이 내가 뮤지션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행운아」에 수록된 2009년 1월 20일의 일기


1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었던 <절룩거리네>와 <스끼다시 내 인생>은 방송 금지곡이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은 지상파 방송사의 음악프로그램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철저하게 외면 당했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음악 프로그램이 아닌 뉴스와 다큐멘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픈 아이러니. 달빛요정은 1.5집을 낼 때, 「어차피 난 이것밖에 안 되」라는 곡을 두 가지 버전으로 발표했다. 비속어가 섞여 있어 방송 금지가 예상되는 버전의 「어차피 난 이것밖에 안되」(‘안되’의 틀린 문법은 의도한 것이라고 한다)와 클린 버전의 「어차피 난 이것밖에 안돼」를 같은 앨범에 수록한 것이다. 클린 버전의 곡은 당시 지상파 3사 중 두 곳에서 방송 가능 판정을 받았다. 유일하게 클린 버전에도 방송 금지를 내린 방송사는 다름 아닌 달빛요정이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곳이었다.


무엇인가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되는 것을 싫어했던 그였다. 그는 사랑 노래도 불렀고,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도 불렀다. 인디 가수가 대중적인 노래를 한다고 욕을 먹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2010년, 안타깝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달빛요정의 이미지는 점점 더 한 쪽으로 쏠려만 갔다. 그것도 그가 가장 원치 않아했던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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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자극적인 기사 제목.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쓸쓸한'이라는 단어 속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꿈 못 펼친 88만원 세대'라는 표현 속에 갇혀버렸다.


갑작스런 뇌출혈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각 언론사는 앞다투어 이를 보도했다. “나의 무한한 추락이 그들에게는 가벼운 소재가 되겠지”라는 일기 속 그의 말이 마치 예언이라도 된 것 마냥 그의 죽음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는 하나 같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뮤지션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제발 불쌍하게만 안 나오면 좋겠다’는 생전의 바람과는 반대로,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그는 ‘불쌍한 뮤지션’의 이미지로 언론에 소비되어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거나 음반계의 시스템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달빛요정은 잘못 포장된 그 이미지로 다시금 매체의 보도에 원치 않게 불려 나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랑하는 아들이자 오빠를 떠나 보낸 가족들의 마음은 계속해서 할퀴어져 갔다. 무엇보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라는 뮤지션 당사자의 모습이 자꾸만 왜곡되어 갔다.


‘절룩거리는’ 요정의 발걸음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

보석처럼 빛나던 아름다웠던 그대

이제 난 그 때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사람이 되었다네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아플 뿐인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깨달은 지 오래야 이게 내 팔자라는 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허구한날 사랑타령

나이값도 못하는게

골방속에 쳐 박혀

뚱땅땅 빠바빠빠

나도 내가 그 누구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놈이란 걸 잘 알아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아플 뿐인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지루한 옛 사랑도

구역질 나는 세상도

나의 노래도 나의 영혼도

나의 모든게 다 절룩거리네


내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 20승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 게 아니라면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1집 수록곡 「절룩거리네」


‘요정’이 살아 숨쉬기에는 현실의 공기가 너무나 팍팍했을 것이다. 음원 수익의 분배 구조도, 방송사의 시스템도, 음반 시장의 현실도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전업 뮤지션으로 한 달에 백 만 원 벌기도 힘든 상황이 어찌 답답하지 않았겠는가. 그의 노래 「절룩거리네」의 가사처럼 달빛요정은 절룩거렸다.


그러나 절룩거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절룩거린다’ 함은 기본적으로 걷는 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주저앉거나 쓰러진 것이 아니다. 그저 걷는 속도가 더딜 뿐, 어디론가 분명히 나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노랫말에 드러난 ‘아주 가끔씩의 절룩거림’은 달빛요정만의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겪는 가끔의 절룩거림. 현실이 팍팍하고 고단하기는 달빛요정도, 그리고 각자의 길을 걷는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지어 아무리 쌩쌩거리며 잘 뛰어가던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한두 번은 절룩거리게 되는 때가 온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슬럼프'의 시기가 그런 때일 수도 있다.


그 스스로 ‘달빛요정이라는 가명을 쓰며 찌질한 노래를 부르는 키 작고 배 나온 말더듬이 아저씨’라 말했던, 날지 못하는 요정은 그렇게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그 더딘 발걸음 속에서도 달빛요정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석 장의 정규앨범과 석장의 EP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下편에서는 요정의 음악과 판타지, 그리고 그의 죽음과 그 후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한다.


그렇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욕망이다. ‘73년생 이진원’이 아닌 내가 스스로 붙인 이름을 갖고 싶었던 욕망. 현실의 이진원은 대한민국 하위 70퍼센트의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무대에서 달빛요정의 탈을 쓰고 평균치의 인간이 된다. 노래하는 이진원은 달빛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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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거의 90%가 완성되어 있었던 에세이 <행운아>




뱀발

 

1. 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만남을 허락해주신 故 이진원님의 동생 이진민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부디 제 글이 가족 분들께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2.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편은 유고 에세이 「행운아」와 고인 생전의 인터뷰 기사 등을 참고로 하였습니다.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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