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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최초 기사에 있었던 젝스키스 팬덤 부분은 사실관계 확인에 어려움이 있어 삭제조치 하였습니다.


관련 내용은 확인 후 조치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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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순이와 오리지널 씬


벌써 이십 년이 다 돼가는 이야기지만, 1세대 아이돌 팬덤이 출현하던 20세기 말 ‘빠순이’라는 호칭은 아주 모욕적인 용법으로 쓰였다. 당시 피시통신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리스너들은 표절, 립싱크, 음악성 등을 빌미로 아이돌을 대차게 비판하면서 ‘수준 떨어지는 오빠’를 추앙하는 여성 팬들에게는 ‘빠순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매춘 여성을 지칭하는 비속어에서 파생됐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어원은 둘째 치더라도, ‘빠순이’라는 말에는 십 대 여성팬을 한 데 묶어 미성숙한 무지성 집단으로 규정하는 폭력적 시선이 깃들어 있었다. 동네 바보 놀리듯 빠순이라는 조롱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통에 아이돌 팬은 자연스럽게 서브컬처의 불가촉천민으로 격리되었다.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빠순이야말로 아이돌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장본인인데도 문화비평에서는 그들을 흥미로운 현상이나 분석 대상쯤으로 객체화하며 소외시켰다.


거듭되는 싸움에서 내상을 입은 빠순이들은 외부의 적을 설득하는 대신 팬덤의 빗장을 걸어 닫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풍미하는 클럽 H.O.T. 의 응원 구호 -‘미안해요 H.O.T. 사랑해요 H.O.T. 영원해요 H.O.T.’- 로 가시화된 ‘빠순이 원죄의식’의 탄생 배경이다. 우리는 욕받이무녀가 되어도 좋으니 오빠만은 욕먹지 않았으면 하는 순정,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오빠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기비하의 정서랄까. 박해당한 이스라엘 민족처럼 저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면서 아이돌 팬덤은 엄격한 폐쇄성을 띠게 된다. 여러 그룹을 동시에 좋아하는 ‘잡팬’이나 그룹 내 특정 멤버만 응원하는 ‘개인팬’ 등은 제1처분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진짜 팬’ 속에서 ‘가짜 팬’을 적발해 축출하는 일은 조직의 순결성 유지를 위한 과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공포심을 자극함으로써 기강을 확립하는 기제이기도 했다.


밀레니엄 이후의 덕질


세월이 흐르면서 ‘빠순이’가 지녔던 모욕적 뉘앙스는 희석되었다. 아이돌 팬 스스로 비천한 신분을 자조하는 호칭으로 ‘빠순이’를 전유하더니, 이후 ‘순이’, ‘퐈슨’ 등의 변형을 거쳐 오늘날에는 각종 분야의 마니아를 통칭하는 ‘오타쿠’의 한글식 표현 ‘덕후’가 그 자리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갈아 끼운 것은 언어뿐이었던지, 빠순이적 순애보는 2세대와 3세대까지 대물림되며 팬덤을 정체화한다. 음악방송 1위 달성을 위해 전략적으로 음원을 스트리밍하고 음반을 구매하는 ‘총공’, 내 가수와 촬영장 스태프들에게 식사를 지원하는 ‘도시락 서포트’, 모금이나 굿즈 판매 수익 등으로 가수에게 의류, 악기, 생활용품 등을 선물하는 ‘조공’ 등의 응원 문화가 생겨났다. 오빠 비판 금지라는 불문율로 인해 솔직한 리뷰가 불가능해졌고, 그 분노는 소속사, 프로듀서, 작곡가, 코디 등 관계자를 향했다. 오빠에게 좋은 것만 들려주고 좋은 것만 보여주겠다는 맹목성은 ‘꽃길’이라는 아름다운 비유 뒤에 위장했다.


90년대의 팬 활동은 시간과 인내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TV 본방송 시청을 사수하고 라디오를 녹음하고 음성 사서함 업데이트를 기다린다. 밤새 은행 앞에 줄을 서 콘서트 좌석을 구매하고, 학교 수업을 빼먹고 공개방송에 가고 드림콘서트에 갔다. 이 시간투입형 취미가 언젠가부터 팬 사인회 당첨권과 포토카드를 위해 앨범을 사재기하고, 타 멤버나 타 가수에게 뒤지지 않는 생일선물을 내 가수에게 안기고, 수백만 원짜리 대포(값비싼 카메라를 의미. 길고 커다란 카메라 렌즈가 대포 같다 하여 붙여짐)를 들고 해외 콘서트를 따라다니는 자본집약형 취미로 전환되었다. 나를 ‘ATM’으로, 내 가수를 ‘통장으로 키운 자식’으로 설정하는 우스갯소리는 아이돌과 팬의 짝사랑 관계를 채무관계로 역전시켰고, 팬들의 보상욕구가 상승하면서 아이돌은 극한직업이 됐다. 노동 공간은 공항, 출/퇴근길, 졸업식, 결혼식 등 무대 밖으로 무한히 연장되고, 노동 형태는 팬 선물을 인증하든 소셜 미디어를 관리하든 무조건 많이 소통하고 필요하면 공갈 젖꼭지 물고 애교 떨기도 마다치 않는 감정노동으로 확대됐다. K팝 산업이 노동자의 사생활과 주체적 자아를 착취하고 있는데 왜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았을까? 팬덤의 관음 욕망이 비윤리적 소비를 ‘관행’으로 용인해버릴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 그 암묵적 합의 속에서 아이돌 팬덤은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정체를 뚫고 툭 불거져나온 움직임이 바로 ‘메타-덕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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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메타 덕질’ 검색 결과 일부


메타-덕질의 발흥


‘메타-덕질’은 작년부터 트위터를 통해 확산되어 현재 꽤 높은 빈도로 노출되고 있는 단어인데, 기묘하게도 어디서 누가 시작했는지 알려진 바 없으며 그 의미 규정에 참고할만한 문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용자들은 텍스트의 맥락이나 발화자의 특성, 개인적 인상에 의거해 단어의 의미를 추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쉽게 말해 짐작 혹은 추측을 규정 근거로 삼는 것인데, 이 느슨한 사용 양태 때문에 ‘메타-덕질’의 개념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몇 개 없는 관련 문서에서 언급되는 ‘메타-덕질’의 특징들, 페미니즘적 내지는 윤리적 팬질이라거나, ‘까빠(까면서 빠는 팬)’의 다른 말이라거나, ‘팬덤 외부에서 팬덤을 바라보기’라는 풀이들은 모두 이 같은 자의적 해석의 결과물이다.


접두사 ‘메타-‘는 본래 ‘앞에서(after)’ 혹은 ‘넘어서(beyond)’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출발했으나, 현대의 인문학적 텍스트에서 ‘메타-‘를 발견한다면 인식론에서 인용된 개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인식론에서 ‘메타-‘는 자기참조적 ‘대하여(about)’, 즉, ‘X about X’를 의미한다. 그러나 ‘메타-덕질’을 ‘덕질에 대한 덕질’이라고 직역해봤자 감이 오지 않으니 용례를 몇 개 살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메타시(詩)’라고 하면 시 장르 자체 혹은 창작 과정에 대한 자의식적 해설이 포함된 시 작품을, ‘메타비평’이라고 하면 비평 담론을 구성하는 용어, 논리, 구조 등을 성찰하는 비평을 일컫는다. 이처럼 장르 자체 혹은 관습에 대한 자기반성적 행위를 지시하는 ‘메타-‘를 ‘(아이돌)덕질’에 적용하면, K팝 산업과 그 소비에 관한 전방위적 성찰을 동반하는 ‘비평적 덕질’ 또는 ‘덕질 비평’이 소환될 것이다.
 

그러나 ‘메타-덕질’은 페미니즘으로부터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는 이유로 왕왕 윤리적 소비와 혼동된다. K팝 아이돌의 여성혐오 콘텐츠에 쟁점을 맞춘 ‘공론화’가 대표적 사례다. 그간 오빠의 과오를 쉬쉬하고 방어하기 바빴던 팬들이 공론화를 통해 문제 제기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해 5월 방탄소년단 팬들의 피드백 요청이 신호탄이었다. 일부 팬들이 방탄소년단의 미소지닉한 가사와 팬서비스 등을 공론화함으로써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피드백을 이끌어냈고, 예상 밖의 수확은 아이돌 팬덤 전체를 고무했다. 트위터에는 세븐틴, 블락비, 비투비, NCT, 아스트로, 엑소 등 K팝 아이돌의 약자/소수자 혐오 공론화 계정이 생성되었고, 여성혐오, 퀴어포비아, 제노포비아, 에이지즘, 에이블리즘, 화이트워싱 등에 관한 의견들이 적극적으로 오가기 시작했다. 지코의 ‘Tough Cookie’ 가사 수정이나 빅스(VIXX) 라비의 <Bomb> 뮤직비디오 수정 등은 그 성과였다.



(단어 ‘faggot’에 대한 게이 남성 30인의 반응)

지코는 ‘Tough Cookie’의 가사에 등장하는 동성애자 비하 표현 ‘faggot’을 ‘freaky’로 수정했다



페미 위에 오빠 있냐 


공론화는 팬덤이 갈고 닦아온 ‘참 팬질’의 이데아와 충돌함으로써 눈총을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새우젓’ 주제에 오빠의 잘못을 지적하고, 오빠에게 피드백을 요청하고, 오빠의 변화를 촉구하는 ‘주제넘은’ 짓이 줄지어 확산되자, 각 팬덤에서는 그들이 가장 잘 하는 방식-배척을 통한 제거-으로 배신자를 단죄하기 시작했다. 샤이니 팬덤에서 시작된 ‘블락 리스트’(이하 리스트)는 이 단죄 메커니즘의 교본이라 해도 손색없을 것이다.


샤이니 팬덤의 ‘리스트’는 말 그대로 팬덤에서 배척한 트위터 유저들의 명단이다. 리스트는 해당 유저들이 ‘까빠’ 혹은 ‘수위 높은 발언을 하는 팬’이니 차단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배포되었고, 팬덤 구성원들은 기계적인 언팔로(unfollow) 및 블락으로 리스트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리스트에 오른 수십 명의 성향을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과정은 쉽게 생략되었다. 리스트 인물과 팔로 관계에 있는 유저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블락 대상이 되었다. 리스트 인물과 멘션을 주고받았거나 친분을 나눈 흔적이 있는 유저들은 ‘사태에 대한 의견을 밝히라’는 사상검증에 가까운 메시지들을 받았다. 리스트 인물과 동조하거나 방관한 자도 함께 처단하는 연대책임제였다.


블락 리스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립’이다. 정보가 권력으로 작용하는 팬덤에서 자료 계정, 캡쳐 및 움짤 계정, 정보 계정 등에 차단당함으로써 발생하는 소외감, 커뮤니케이션 단절로 인한 고립감 등이 ‘탈덕’으로 이어지기를 의도한 것이다. 그리고 작년 12월, 이 곪고 곪은 갈등이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핍박에도 해당 인물들이 통제되지 않자, 팬덤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액션으로 눈엣가시들을 뜯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규모의 계정 차단과 함께 욕설, 협박, 신상털기, 팬 인증 요구 등 다수의 사이버불링이 소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팬덤 내부의 의견도 분분해졌다. 한쪽에서는 “오빠 위에 페미 있냐”고 충성심을 내세우거나 “너희가 하는 것은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흠을 잡는 방식으로 배척을 정당화했고, 다른 쪽에서는 팬덤과 팬질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공론화로 시작된 갈등의 본질은 결국 구습과 신경향의 마찰이었던 셈이다. 



오빠 위에 나 있다
 

공론화를 거부하는 팬덤은 대체로 발의자들이 수위 높은 RPS(Real Person Slash: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구성한 2차 창작물. 팬 픽션 등이 있음) 소비자라는 점을 들어 발의 내용을 무효화하고자 한다. RPS로 멤버들을 성희롱 해온 개인이 가수에게 윤리적 잣대를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논리다. 팬덤 내부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지만, 사실상 RPS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별개의 주제다. RPS는 지금껏 그것을 팬 문화로 인정할 것인가, 수위가 낮다면 RPS를 소비해도 되는가, 수위가 성희롱 여부를 결정된다면 그 기준은 어디이며,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지 합의된 바 없이 마구잡이로 소비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팬 딱지를 떼고 RPS와도 전혀 관계 없는 일반인들이 공론화를 제기하면 어떨까? 팬덤은 그 비판 내용을 수용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하지 말라’고 성을 낼 것이다. 팬덤 내부에 있는 순정 팬이면서 도덕적으로 아무런 흠 잡을 수 없는 자에게만 비판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실상 그 누구도 오빠를 비판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팬덤의 끈질긴 ‘공론화 흠집 내기’는 ‘메타-덕질’을 추동하는 동력이 됐다. 아이돌의 소수자 혐오를 지적하는 자신 또한 윤리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깨달은 팬들은 자기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시작했고, 문제 제기는 더욱 생산적으로 확장됐다. RPS 소비에 대한 원론적 회의부터 RPS의 비윤리적 서사, 남녀 성 역할의 답습, 성적 대상화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토론은 RPS에 국한되지 않고 팬덤의 관습을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연애금지나 유사-연애 및 유사-육아형 팬질, 팬덤의 전체주의적 경향, 소속사의 팬덤 착취, 직찍/직캠/공항사진/목격담 소비의 정당성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윤리적 사유에서 출발한 가치 판단이 내가 소비하는 대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내 욕망과 대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분석하며, 그것이 옳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메타-덕질’의 물꼬를 트기에 이른 것이다.


언어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빠순이가 ‘빠순이’로 호명되면서 빠순이로 거듭난 것처럼, 양심이 시켜서 ‘메타-덕질’을 해온 팬이건 ‘메타-덕질’을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이들이건, ‘메타-덕질’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상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게 될 것이다. 물론 덕질은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이고 모든 취미생활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라는 법 없으니 ‘메타-덕질’ 또한 당위적 요구라고는 할 수 없다. ‘오빠를 위한 팬질’이든 ‘덕질에 대한 덕질’이든 선택은 개인의 자유지만, 팬덤의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저항하는 팬들의 탈-팬덤 경향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메타-덕질’의 등장이 팬덤의 구시대적 규범을 해체하는 분기점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이야말로 빠순이들이 그 시작과 함께 빼앗겼던 ‘주체’의 자리를 회복할 수단이기 때문이다.






탱알

트위터: @taeng_al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