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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과 대선의 소용돌이가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2017년 상반기는 그렇다 치고 2017년 하반기 가장 뜨거운 화두에 올랐던 인물 중 하나를 들라면 고(故) 김광석을 제하기 어려울 것 같다. 분명히 제목은 ‘김광석’인데 내용은 ‘이상호’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이 나온 뒤 한국 사회에서는 대단한 소란이 일어났다. 그 소란을 꽤 세세히 들여다 본 입장에서 돌이켜보면 그 상황은 일종의 코미디 잔혹극이었다. 코미디치고는 서투른 블랙 코미디였고 정교한 공포물이라기보다는 3류 슬래셔 무비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돈 내고 콘서트 가 본 유일한 가수” 김광석의 팬으로서, 그리고 워낙에 심약하고 말랑말랑한 멘탈의 소유자로서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미 말할 수 없는 자가 된 고인을 진실 게임에 불러내는 상황이 싫었고 그로 인해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오히려 김광석과 그 노래에 진저리를 치게 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유달리 푸석푸석하고 황량했던 나의 청춘의 흙에 내렸던 거의 유일한 단비같은 존재였던 김광석, 지금도 그 노래 몇 개를 부르면 영혼의 구석구석을 닦는 느낌을 주는 나의 가수 김광석의 존재가 어떤 형태로든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꽤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스트레스가 “멀리 멀리 날아갔다.” 랄라라라라 랄라라라라 랄랄라라라라 라

이 스트레스 일소 힐링 캠프는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였다.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상연되고 있는 곳이다. 김광석의 노래로 뮤지컬을 만든다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을 듯하다. 워낙 풍부한 감정이 표현돼 있고 내용 또한 다양하며 '서른 즈음에'부터 '60대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까지 진폭 큰 세대가 공감하는 ‘그의 노래’들이 포진해 있지 아니한가. 즉 스토리의 재료는 널려 있는 것이다. 김광석은 그렇게 많은 노래들을 뿌려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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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줄거리의 축은 90년대 중반 학번들로 구성된 밴드 동아리 ‘바람’이다. 이 밴드 동아리가 95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으로 설정돼 있으니 주역들은 93학번부터 95학번 정도겠다. 이때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김광석이 죽기 직전, 한창 절정에 올라 뭇 젊은이들로부터 ‘광석이 형’의 자발적 ‘형제의 의’를 헌납받고 있을 무렵이 되겠다.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에게 부르는 호칭이 ‘형’과 ‘오빠’와 ‘선배’가 뒤섞이기 시작할 즈음이기도 하고.

뮤지컬에 등장하는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듣다보니 문화적으로 매우 척박하고 특히 음악적인 소양이 실개천인 내가 왜 김광석에 꽂혔는지를 다시금 이해하게 됐다. 이 뮤지컬의 기획자의 말마따나 “그의 노래가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하는 나의 노래, 너의 노래, 우리의 노래이기 때문”이고 그리 드라마틱하지는 못한 나의 삶의 동굴 속에도 김광석의 노래가 종유석처럼 머리 위에서 떨어지고, 석순처럼 발 아래에서 돋아나 있었음을 재발견했다고나 할까.

오랜 만남을 이어왔지만 이뤄지지 못한 연인, 그 중에 여자가 부르는 <거리에서>는 하필 김광석의 콘서트에 같이 갔다가 모종의 사태로 인해 아주 끝장이 나 버리고 칼바람 밀어닥치던 대학로 거리를 터벅터벅 걷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됐다. “옷깃을 세워 걸으며 웃음지려 하여도 떠나가던 그대의 모습 보일 것 같아 다시 돌아보며 눈물 흘려요” 절대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랑했지만>을 들으면서는 그 생각이 났다. 누군가를 열렬히 짝사랑하고 있던 후배와, 그 후배의 짝사랑을 모르던 짝사랑의 대상과 셋이서 술을 먹는데 짝사랑하던 녀석이 술에 취해설랑 이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다가 끝내 길쭉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던 순간. 하, 녀석 얘기나 해 보지. 짝사랑의 대상은 아무것도 모르고 노래 잘하고 감정 잘 살린다고 박수만 쳤다. 짝사랑 주체(?)의 가사는 거의 절규였다. “다...가... 설.... 수 .... 없어.....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 밖... 에...” 내가 아주 서태지의 노래를 부르고 싶더라니까. “난 알아요 니가 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졸업 후 오랜만에 ‘바람’ 멤버의 보컬 이풍세(이풍진 세상의 준말인가)가 학교를 찾았을 때 여전히 왕년에 아웅다웅하면서도 마음 따뜻하게 학생들을 돌봐 주던 수위 아저씨는 손주를 본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떴다. 수위 아저씨는 당연히 <60대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부른다. 이 노래는 왕년의 조연출 때 병원에서 찍던 재연 중 일어났던 해프닝을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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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누라 죽는데 이게 웬 소란이냐”며 내 턱에 라이트 훅을 날린 노인. 어영부영 사태 수습하고 몇 시간 뒤 어두운 병원 어딘가에서 만났을 때 그는 사과와 함께 놀라운 얘기를 전했다. 수십년 간 바람 피우고 딴 살림하고 별 ‘지랄’ 다 했을 때, 아이 셋을 혼자서 키운 아내. 자식들의 결사적인 거부에도 불구하고 쫄딱 망하고 병든 자신을 도왔고 끝내 마지막 순간 자신을 불렀던 아내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던 노인. 그리고 그때를 즈음해서 버스 안에서 들었던 <60대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

나만 이런 게 아닐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 하나 하나에 추억 서리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그 추억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 지하에 묻어둔 활성 단층이다. 견고히 요동치 아니하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불쑥 움직이며 지하 뿐 아니라 지상을 격렬히 흔드는 활성단층.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무대는 지하 깊숙히 잠복하던 활성단층이 진도 9로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관람한 날, 손님 중에는 충청북도 단양에서 올라온 일곱 명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위로 보였는데 이 50즈음의 아주머니들은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아니 김광석을 만나기 위해 집단 상경했고 열광했고 그 중 한 분은 무대에 초청돼 사회자가 당황할만큼 소주 ‘원샷’을 주거니받거니 하며 관중들을 폭소에 빠뜨렸다.

그녀는 왜 그렇게 신이 났을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인하고 살던 추억들의 활성 단층의 준동(?)에 몸을 주체할 수 없고 마음은 ‘먼지가 되어’ 허공에 가벼이 흩날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 준동은 결코 추억의 재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동의 추억으로 생산된다. 내 옆에 있던 딸아이에게 김광석은 이제 아재 아짐들이 좋아하는 왕년의 가수에 그치지 않게 됐으니까.

공연 보고 온 지 몇 시간이 지난 지금도 머리 속에는 김광석의 수많은 노래들이 뒤섞이고 그에 얽힌 과거지사들이 낡은 필름으로 돌아간다. 스크래치도 났고 가운데가 잘려 나가기도 하고 보다 보면 민감해서 아픈 장면도 많지만 그 추억을 응시하게 해주는 영사기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내게 그 영사기는 김광석이었고, 오늘의 극장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예그린씨어터였다.

올해 말 <1987>을 보며 정치적 추억에 물들어 볼 계획을 가진 분이라면 다른 날을 잡아 대학로에 가 보시라. 가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통해 ‘추억이 솟아나는 풍경’에 한껏 흔들려 보시라. 아마 겨울이 풍성해질 것이다. 추억에 젖으면 늙었다고 하지만 늙는다고 추억이 그냥 많아지는 건 아니다. 2017년 겨울, 추억을 쌓기 좋은 시간이다. 광석이 형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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