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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증] 예비군을 살려내라!

2003.6.25.수요일
딴지 역사팀


때만 되면 불러 들여 자꾸만 몬 살게 굴고 귀찮게 하는 예비군 훈련. 먹고 사느라 녹초가 된 예비군들의 여리디 여린 발목에 그 무거운 워커를 신기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짜부러진 예비군들의 가녀린 어깨에 그 거추장스러운 칼빈 소총을 들려주기까지 하니... 아, 강제동원된 예비군은 괴롭기만 하다.


게다가 예비군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냉정하기만 하다. 예비군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짝다리와 복장불량. 이거 괜히 나오는 거 아니다. 옷이 몸에 맞아야 복장을 단정히 할 거고, 신발이 발에 맞아야 짝다리를 안 짚을 거 아닌가. 또한 군대를 제대하면 민간인으로 복귀해야 되는데도 울 나라 남자들은 군제대 후 민간인이 아닌 예비역으로 복귀하야 여성들에게 "노땅"이라고 괄시받기까지 한다.


예비군. 그렇담 이 제도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예비군은 1968년 박통이 처음 만들었다. 당시 현역 병력 역시 지금과 거의 삐까 맞다이인 60만. 그런데도 박통은 동원 예비군을 만들어 생계에 치여 허덕이는 불쌍한 예비역 아자씨들을 강제동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래 우리의 예비군은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은 본지가 고증하는 예비군의 역사를 함 만나보시라.
 






예비군에 관한 기록은 임진왜란 직후, 전쟁시 활약한 병사들을 칭송한 <군발어천가>에서 최초 발견된다. 그 기록은 예비군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충성(忠誠) 있는 병사(兵士) 적인(狄人)에 아니 뮐세 의(義) 높고 용맹(勇猛) 하나니
행동(行動) 날랜 야비군(夜飛軍) 훈련(訓練)에 아니 그칠세 숙면(熟眠)코 야참(夜站) 하나니...


(해석) 충성심 깊은 병사는 오랑캐에게 흔들리지 않으므로 바른 뜻도 높고 용맹도 많다.
행동이 재빠른 야비군은 훈련에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으므로 잠도 잘 자고 야참거리도 많다.









<군발어천가> 한 대목


이에 따르면 야비군이라 불리우는 한 무리의 병사들은 행동이 재빨라 훈련할 때도, 잠도 잘 자고 먹을 것도 풍부하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예비군은 임진왜란 당시 등장한 "야비군"이 그 기원이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을 보고 야비군(夜飛軍)이라고 불렀을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밤에 날아다니는 듯 재빨리 움직이는 군인"이란 뜻이다.


이걸 제대로 해석하려면 당시 군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에는 현역 군인으로 복무하는 번상과 번상하는 군인들을 먹여 살리는 보인과 봉족으로 군제가 편성돼 있었다. 근데 군역이 문란해지면서 봉족이 바쳐야 하는 포가 제대로 걷히지 않자 현역 군인들은 먹고 살기가 갑갑해졌다. 그런데 전쟁까지 터지자 이들의 보급품 부족 문제는 더욱 더 커지게 된다.


전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그래서 이를 지켜보던 한 무리의 백성들이 밤에 몰래 적들의 보급품을 급습하여 날래게 털어와 아군에 보급품을 충당하는 자발적 특수군을 조직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야비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원활한 야간활동을 위해 낮에 숙면해야 하며, 맡은 바 임무상 야참과 같은 먹을꺼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들의 구체적인 행색은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의 외전 격인 <짱비록>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야비군들이 날래게 짱박히는 모습을 기록한 이 문서는 학계에 위작논쟁이 진행 중이므로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을 전하자면 아무튼 다음과 같다.


伏藏旦靜 柴揀奄睡 (복장단정 시간엄수)


몸을 엎드려 감추고 섶으로 가리고 가려 아침처럼 고요히 잔다.


잠을 잘 때는 적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제대로 짱박혀 자야 한다. 당시 야비군들의 이처럼 투철한 은폐/엄폐 자세를 보면 수면을 취할 때도 군기를 지니고 취했음을 알 수 있다.


先裵賃 笠綏步行 擒止 (선배님 입수보행 금지)


먼저 옷을 치렁치렁하게 품을 열고 삿갓(모자)를 편안히 하고 걸어 붙잡히지 않도록 한다.


적들의 보급품을 보다 많이 뽀리까기 위해서는 저고리를 풀어헤쳐 품에 많이 품어야 함은 물론이요, 모자가 시야를 가려 적들에게 붙잡혀서는 안된다. 대단히 전략적인 행색이 아닐 수 없다.


이 야비군들의 활약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보다 낭중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낭중일기(郎中日記)>에서 이렇게 예찬한다.


한산(閑山)셤 달 밝은 밤의 수루(戍樓)에 홀로 서서
큰 칼 옆에 차서 바로 설 수 없는 적의
야비군 짝다리에 나의 발이 편하나니....

한산섬 달 밝은 밤에 높은 망루에 혼자 서서 큰 칼을 옆구리에 차고 있노라니 똑바로 설 수가 없을 때, 야비군들이 하는 방식으로 짝다리를 짚으니 발이 참으로 편하구나.


자기 하체보다 더 긴 칼을 차니 바로 서기 힘들었던 이순신 장군. 이에 야비군들을 떠올리며 짝다리를 짚으니 심신이 편해진다는 내용이다. 당시 야비군들은 언제 어디서든 빠르게 돌격하기 위해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실고, 다른 다리를 편하게 뒤로 빼는 백미터 스타뜨 자세를 주로 취했다는데 그게 일명 짝다리 자세였다. 따라서 야비군들의 풀어헤친 복장과 짝다리는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셈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속살이 노출되기 때문에 함부로 저고리를 풀어헤칠 수 없었다. 이에 저고리 대신 행주를 사용하여 적들의 보급품을 뽀려 담아왔는데 부인들의 이같은 보급품 급습 작전이 커다란 성과를 얻은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이었다.


그렇다. 야비군,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국토방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던 자발적 특공부대였던 것이다.
 






야비군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야비군을 결성한 우리 조상들은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의 보급품 조달에 일조하였다.



본지 고증팀에 의해 발굴된 당시 사진.
민간인을 완벽히 위장해 일본군 근거리까지 접근한 한 야비군.
삐딱한 모자와 풀어헤친 저고리가 정통 야비군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군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너무나 늠름히
취침을 취하고 있는 당시 야비군의 모습.


특히 이들은 소집명령을 받으면 식사 해결을 위한 도시락을 항시 지참하고 다녔었다. 그리하여 1932년 일본군들의 전승기념식이 열리던 상해 홍커우 공원. 일본군들은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행인들의 몸수색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그 현장에는 행인을 가장한 수없이 많은 야비군들이 침투하여 있었고, 일본군들은 이들에게서 나오는 수많은 도시락을 일일이 검사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 틈을 이용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장착한 도시락을 들고 무사하게 행사장에 잠입, 적들의 심장에 도시락 폭탄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 대한민국 만쉐이~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이 적들의 감시에 걸리지 않았던 이유. 똑같은 도시락을 들고 그 현장에 침투한 무수히 많은 당시 야비군들 공로였던 셈이다.
 






위에서 살핀 바대로 국가가 위험에 처해있을 때는 언제 어디서고 야비군들은 자발적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지금, 야비군들의 빛나는 전통은 많은 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자발적으로 조직했던 야비군을 이제는 강제로 국가가 동원하고, 풀어헤친 저고리와 짝다리라는 전통적인 야비군 근무자세를 복장단정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못하게 하고, 낮에는 필히 짱박혀 수면을 취해야 하는 야비군의 특수성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풀어헤쳐진 상의, 삐딱한 모자, 은폐/엄폐 후 취하는 수면 등 민족전승의 야비군 전통을 현재의 예비군은 계승해야 한다. 특히 강제동원 하는 조직이 아니라 자발적 조직이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살려내야 한다.


북과의 군비경쟁으로 생긴 300만 예비군. 이제는 대가리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1년에 몇 번씩 불러 반공 비됴 보여주면서 쓸따리 없이 꾸벅꾸벅 졸게 만드는 생산성없는 예비군을 세금낭비해가면서 유지할 이유가 뭐냐?


글타. 지금이야말로 자유롭고 자발적이었던 조상들의 야비군 전승을 본받아야할 때다. 야비군을 살려내라. 야비군을!!!


 
딴지 역사팀
철구(chulgoo@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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