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좌 오딧세이 AV 편] 7화 : 분코와 나는 세번 만났다
2009.6.15.화요일
지난 주말, 나는 AV 한편을 보려 하다가 못 보고 말았다. 나는 우주기획(宇宙企画)서 나온 비디오 한편이 보고 싶었다. 평소에 보지도 않던 밋밋한 레이블의 비디오가 보고 싶어진 것은 나름대로의 사연(事緣)이 있었다. 십수년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PC통신을 한 적이 있다. PC잡지에 나온 01410광고를 보고 인포샾에 있는 어느 사설 BBS에 접속하게 되었다. 킬로바이트(kilobyte)당 1.5원의 정보이용료를 물던 그 곳에는 그라비아 모델이나 연예인들의 섹시자료 등의 사진 나부랭이를 취급하고 있었다. 섹시라고 해봐야 요즘의 그 흔한 헤어누드 한장 없이 비키니나 속옷 사진이 전부였다. 걔중에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분코(문자, 文子)는 처음부터 내 눈에 들었다. 분코역(文庫驛) 근처에 살았던 터라 분코라는 예명을 지었다고 하였다. 맨살을 대놓고 드러낸 사진들도 많았지만 분코는 단지,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한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분코가 천진한 여고생같이 어리고 귀여운 소녀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모니터 속의 분코를 보며 일일삼딸을 했다. 56k 모뎀으로 서핑하기엔 너무나도 방대했던 그 사설 BBS의 자료실을 샅샅이 훑으며 나는 분코의 사진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하얀 속옷을 보여 주는 사진 한 장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전화 요금 고지서가 나온던 날 아침, 분코는 나에게 정보이용료 일금 칠만오천육백팔십원정을 이별(離別)의 선물(膳物)로 주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은 뒤 전화선을 빼앗기고 분코와 헤어졌다. 그 뒤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짧은 교복 치마를 입은 일본 여고생을 보면 분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분코를 만나게 됐던 것도 사월이었다. 집안에 ADSL이 들어오자 바로 Yahoo.com을 즐겨찾기하고 "Kanazawa Bunko"를 검색했다. 분코는 어느덧 섹시하고 요염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때, 분코는 전에 볼 수 없던 노골적인 헤어누드를 찍고 있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그래도 나의 신체기관 일부는 분코와의 재회(再會)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고 나서 조용히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발걸음은 즐겨 찾던 와레즈 쪽으로 옮겨져 갔다. 게시판을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분코 120메가 짜리 풀버젼" 이라는 게시글을 하나 발견했다. 무슨 말인가 하고 나는 쳐다보다가, 이내 그것이 말로만 듣던 AV를 동영상 파일로 만든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다운로드해서 순식간에 압축을 풀었다. 지금도 나는 AV를 볼 때면, 그때 그 분코가 나온 <제복외설주의>를 연상(聯想)한다. 내가 교복이라면 환장이는 이유도 분코의 그 제복 때문이 아닌 가 싶다. 그렇게 분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수담(手談)울 나누다가 묵직한 사정(射精)을 하고 헤어졌다. 왜 구내사정이나 부카케 같은 장면은 애써 피해가는지도 물었던 것 같다. 그 후 또 몇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와레즈는 망했고, 웹하드가 득세했고, 또 김본좌가 잡혀갔다. 나는 어쩌다 분코 생각을 하곤 했다. 은퇴를 하였을 것이고, 행여 신작을 다시 내지 않을까, 노모는 나오지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2007년, 신작 체크를 하던 중에 뜻밖에 분코를 만났다. 그리고 분코는 잠시 은퇴했다가 이번기회에 복귀를 했다한다. 똘똘이는 흥분된 얼굴로 분코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광랜과 웹하드가 보급 되어서 무엇보다 잘 됐다고 생각하였다. 분코는 원래 헛좆질과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내세웠으나 2000년 SOD를 통해 인디즈로 데뷔해, 이후 부카케나 하이퍼 모자이크같은 대담한 영역까지 활동했었다고 했다. 2003년 이후에는 스트립쇼에 치중하여 AV는 사실상 은퇴상태가 되었지만 2007년 12월달에 AV배우로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분코가 은퇴하지 않고 AV로 돌아온 것은 잘 된 일이다. 그러나, 노모자이크까지 찍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분코를 다시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패킷 결제를 하란다. 그러고보니. 십수년 전 내가 분코와 처음 만날 때도 이렇게 돈을 써야 했다. "아아! 기모찌이이! 못또 하야쿠, 하야쿠!!" (아아! 기분좋아요! 좀더 빠르게, 빠르게)분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다운로드가 완료되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분코의 얼굴이었다. 왜 노모를 찍지 않는가 이야기를 한 지 몇 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그러나 분코의 노모자이크는 상상한 것 같이 화끈하지도 두근거리지도 않는, 슬픈 영상이었다. 똘똘이는 몇 번씩 섰다 죽었다를 반복했고 결국 딸한번 잡지않고 파일을 지웠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분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제복외설주의>를 다운받아 보려 한다. 그 시절 분코는 아름다울 것이다.
그녀가 한국 규방문화에 기여한 바가 또 하나 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최초의 AV배우를 다룬 한국 커뮤니티 분코클럽 의 시발점이 그것이다. 2000년 경으로 기억하는데 야후코리아에 <일본 영화 배우 팬클럽> 이라는 카테고리로 등록되어 있던 카나자와 분코의 팬클럽으로 출발해 당시 목마른 한국 AV 마니아들이 쉼터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이제 풀버젼 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와레즈 사이트에서 구할 수 있는 리얼미디어 형식으로 압축된 5분짜리 AV 클립이 전부였던 시절. 그 당시 VCD방식으로 출시된 1시간 짜리 AV를 그대로 립한 600메가 바이트 상당의 MPG파일을 뜻하는 [풀버젼] 이라는 말의 임팩트는 어마어마했다. PC통신 시절부터 아련히 접해왔던 분코 의 풀버젼을 찾기 위해 헤매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지니같은 당시 유행한 인스턴트 메신저로 초당 30-40킬로바이트에 불과한 ADSL의 업로드 속도를 견디고 아무런 대가 없이 단지 같은 분코를 좋아하는 팬 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공유하던 사람들. 이제 모든게 패킷과 보상이라는 물질적 논리 아래 흘러가는 지금으로는 떠올리기 어렵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 분코클럽 사람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분코는 그라비아 모델로 출발해 AV 업계를 거쳐 스트립쇼걸을 지나 다시 AV로 돌아왔다. 그녀의 복귀는 마치 80년대 LA메탈계를 풍미한 세바스찬 바하나 액슬로즈가 쇠락한 모습으로 90년대에 컴백한 것을 연상시킨다.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서 일종의 쓸모없는 개칠(改漆)이 된 것이다. 아름답고 윤택하던 전성기를 기억하던 팬들에게 노모자이크를 통해 컴백한 그녀의 최근 모습은 안타까움에 가까운 비통함이다. 한없이 부족하고 불안해서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그 시절이여. 안녕. 이땅의 많은 이들과 몽정기를 함께 한 그 카나붕의 미래를 위해 건배!
충용무쌍(dbscnddyd@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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