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8일 신이시여 끝났습니다. 행크 아론의 외침
야구는 투수놀음이다. 동네 야구에서는 똑똑한 투수 하나 있으면 만사가 끝나는 법이고 프로야구에서 골든글러브 팀을 꾸려도 투수가 시원치 않으면 그 팀은 구멍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야구 역사에서 최고 상좌를 차지하는 것은 삼진왕이 아니라 홈런왕이다. 20세기 전반기의 불세출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엉뚱하게도 ‘위인전’ 목록에 올라 있을 정도니까. 사실 그는 야구를 잘한 것 이외에는 별로 영웅의 풍모가 없는 아니 솔직히 범상한 인간 이상으로 쳐 줄 만한 것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가 총 714개의 홈런을 치고 수만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은퇴한 뒤 감독직을 희망했지만 그 어느 팀도 그를 감독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감독 못하는 인간이 누구를 감독한단 말이야?”
그러나 그의 714개 홈런은 그로부터 40년 동안 전설이었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의 홈런왕이 한 해 30개-40개 정도에서 결정되고 이승엽이 절정의 기량을 선보일 때 50개를 넘은 정도임을 고려할 때 714개 홈런을 치려면 이승엽이 14년 동안 그의 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대충 그 수치의 높이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1974년 4월 8일 깨진다. 행크 아론이라는 흑인 선수에 의해서였다.
행크 아론의 대기록이 세워지게 된 계기는 715개째 홈런이 터지던 날로부터 꼭 27년 전, 1947년 4월 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만 해도 ‘니그로 리그’라고 해서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경기를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감히 흑인과 백인이 한 구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대서양과 록키산맥이 마르고 닳도록 있을 수 없던 즈음이었다. 그런 가운데 브루클린 다저스 (LA 다저스의 전신) 단장 브렌치 리키는 그야말로 파천황의 실험을 하게 된다.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스카우트하여 경기에 내보낸 것이다.
재키 로빈슨
1954년 4월 9일 재키 로빈슨은 보스턴 브레이브즈와의 경기에서 기습번트로 출루하고 득점을 올린다. 메이저리그 사상 흑인의 첫 득점이었다. 센트루이스 카디날스같은 팀은 흑인과의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나섰고 꼴통 백인들은 로빈슨의 신변마저 위협했으며 동료들도 그를 멀리했지만 불굴의 재키 로빈슨은 1947년 신인왕을 쟁취하는 기염을 토한다. 매니저 리오 두로쳐가 로빈슨을 왕따시키는 선수들에게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얼룩말이든 관계없어.
로빈슨은 야구를 잘해. 우리 구단에 돈을 잘 벌어 준다고.
그 돈이 없으면 너희들 다 다른 구단에 팔아먹어 버릴 거야. 알아?”
라고 으름장을 놓을만큼.
로빈슨이 낸 파열구 사이로 여러 흑인들이 메이저 리그에 발을 디뎠고 1954년 한 흑인 선수가 메이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았다. 그가 행크 아론이었다. 행크 아론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착실하게 홈런 수를 쌓아 나갔다. 1965년 400홈런, 1968년 500홈런, 1973년 700홈런... 그의 홈런 수가 백인의 전설 베이브 루스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그는 상대편 투수 뿐 아니라 수많은 백인 팬들의 적의의 대상이 된다. “너는 결코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지 못할 거다. 검둥아. 내 총구가 네 시커먼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어.” 따위의 편지는 협박 편지 축에도 들지 못했다. 3천통의 협박 편지가 쏟아졌다. 그는 항상 덕아웃에서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옆에 있다가 누구 총알에 귀신이 될 줄 몰라 선수들이 그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행크 아론은 그 위협 속에서도 의연했다. 그에 따르면 그는 홈런을 친 자신의 공이 펜스를 넘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공을 때린 뒤에 일단 1루로 무조건 전력 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지 앞에서 협박은 무의미한 법. 어쩌면 그는 전력질주 과정에서 니그로 리그 시절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식당 주인이 자신이 먹던 식기를 깨 버리던 소리를 (짐승이 먹은 그릇이라고) 뼈아프게 곱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73년 시즌을 그는 홈런 713개로 마감했다. 그리고 다시 출전한 1974년. 베이브 루스의 기록은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4월 4일 신시내티와의 어웨이 경기에서 아론은 두 경기 중 한 경기만 출전하고 싶다고 한다. 홈구장에서 기록을 갱신하고픈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 커미셔너는 그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는 베이브 루스와의 타이 기록을 신시내티와의 경기에서 세운다. 그 다음 경기에서는 무안타로 마무리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후일 대통령이 되는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를 비롯, 5만 명의 홈팬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1974년 4월 8일 행크 아론은 왼쪽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715개라는 전인미답의 반열에 오른다. 기록만큼은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좌익수가 담을 타고 넘으며 잡으려 했으나 무위였다. 인종차별의 본고장이었던 조지아 주하고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고향 애틀란타에서 5만 관중의 환호 속에서 살해 위협을 받던 흑인 선수는 백인 영웅의 기록을 허물어뜨린 후 환호하지도 않고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의 딸은 혹여 있을 납치에 대비하여 FBI의 경호를 받고 있었고 홈플레이트에서 아들을 맞은 행크 아론의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그건 어머니의 간절한 모성애였다. 누군가 총을 쏘면 대신 맞겠다는 각오로 아들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론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행크 아론의 기록도 깨졌다. 왕정치에 의해서, 그리고 메이저 리그에서는 배리 본즈에 의해서. 행크 아론은 둘 다에게 담담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라는 인간이 또 한 번 빛을 발한 것은 배리 본즈가 약물 파동에 휩싸였을 때였다. 배리 본즈의 약물 의혹을 이유로 홈런왕을 다시 행크 아론으로 되돌리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이는 이렇게 반박하며 본즈를 옹호했던 것이다.
"본즈가 더 이상 기록 보유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
통산 홈런 기록을 고치려고 한다면 과거로 돌아가 모든 기록들을 고쳐야할 것이다.
그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동이 될 것.
우리가 어떻게 보든 간에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본즈의 것이다.”
그건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면 너 죽여 버릴 것이라고 아우성을 친 수천 명의 백인들의 뺨을 후려치는 감동이었다.
아이의 방에 있는 위인전에서 ‘베이브 루스’를 본다. 그러나 아무리 까뒤집고 생각해 봐도 베이브 루스는 행크 아론에 미치지 못한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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