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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1. 목요일

햄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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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제위 여러분, 부디 놀라지 마시라.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필자는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니 여러분의 다대포 해안 같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라는 바다. 본인은 사실, 면제 받은 자다. 다시 말해 미필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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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신의 아들>


워워, 진정들 하시라. 본인, 돈도 없고 빽도 없는 평범한 민간인이다. 안 그래도 어디 가서 면제 받았다고 말하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요?’하며 내게 묻는 게 일상다반사며, 그때마다 나도 구구절절이 내 사연을 얘기하는 게 피곤하다. 여기서 자세한 썰을 풀다가 삼천포로 빠지고 말 듯하니 ‘어릴 적에 무지하게 아팠다’는 얘기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얼마나 아팠냐고? 면제 받아도 될 만큼 ‘X나게’ 아팠다. 아, 내가 이놈의 몸만 안 아팠어도. 요즘엔 댓글만 잘 달아도 군복무가 가능하다는 것 같던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 ‘군대’라는 두 글자가 참 묘한 힘을 지녔다. 여태껏 살며 듣고 지켜본 바에 의하면 다녀온 사람은 다녀온 사람대로 치를 떨고, 아직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 역시 치를 떨게 만드는 힘이 있는 마법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전역한 지도 어느덧 십 년이 가까워진 친구 녀석들이 술자리에서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꿨다’고 말하는 건 이제 예사로 나누는 농담처럼 돼 버렸지만, 인터넷에서 ‘아버지가 환갑이 가까우신 나이에도 군대에 끌려가듯 재입대 하는 꿈을 꾸셨다더라’고 하는 글을 읽게 되면 이걸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만은 없는 어떤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 본인도 군대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군대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을까, ‘남자는 스무 살이 되면 무조건 군대에 끌려가서 몇 년 동안이나 밖에 나오지 못하고 갇혀서 무지하게 힘든 훈련을 받고 총도 쏘고, 그 안에서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TV에서 <에어울프>나 <머나먼 정글>같은 외화시리즈를 보는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십오 년도 더 지난 후에 일어날 일을 걱정하며 잠 못 드는, 나는 그런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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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눈앞의 일들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까, 군대에 대한 공포는 유치원생 꼬맹이 무렵 때보다 오히려 더 멀어졌다. 그때는 짝사랑하던 그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가 더 걱정이었고, 이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어떻게 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고, 다음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면 포켓몬 빵이 남아 있을지가 걱정이었고, 그 다음엔 수능을 어떻게 잘 볼 수 있을까,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을까 하는, 그런 고민들이 전부였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 후 ‘군대’라는 단어가 다시 내 삶에 대두하게 된 건 대학교 2학년 무렵, 몇몇 선배들이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시기였다. 신입생 시절 ‘이미 복학해 있던’ 선배들을 제외하면, 나와 동기들에게 그 선배들은 처음 보는/겪는 ‘복학생’이었다.

 

처음 한두 명의 선배들만 복학했을 당시엔 크게 부딪히는 일 없이 잘 지냈다. 함께 술도 마시고 마치 동네 아는 형이랑 함께 놀듯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복학하는 선배들이 한두 명 늘어나 대여섯 명을 넘어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끼리끼리 뭉쳐 다니는 분위기가 형성되더라. 우리 역시 선배들이나 후배들보다는 동기들끼리가 더 말도 잘 통하고 편한 게 당연했으니,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이상한 건 선배들이 점점 우리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같이 놀거나 술 마시자는 얘기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비롯한 남자 후배들을 모두 불러놓고 성명 같은 걸 발표하더라. 자기들끼리 복학생 협회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앞으로 과에서 중요한 일을 할 때 단합이 잘 되도록 돕고 선후배 간에 유대를 만들겠다는 얘기였다. ‘학생회가 있는데 굳이 뭘’이란 느낌이었지만, 좋은 취지에서 하는 얘기니 뭐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 형들이 ‘학과가 잘 돌아가려면 남자들끼리 뭉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반 강제적으로라도 친목을 도모해야 한다’며 ‘우리 과 남학생들은 전원 일주일에 한 번씩 술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듯이 말했다. ‘불응할 시 학과 생활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요지의 말을 덧붙이면서. 아니 씨발,

 

이게 뭐지.

 

학생이 학생에게 학교 생활을 하는 데에 불이익을 주고 말고가 어디 있나. 당연히 나를 비롯한 동기들과 1학년 후배들은 불만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별 수 있었겠나. 일단 뭐 모이자니 모여 봤지. 당초 예상했던 살벌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들만 술집 안에 꽉꽉 들어차 옹기종기 앉은, 칙칙하고도 훈훈한 분위기 가운데에서 술자리가 진행되었다. 앞으로 우리 과가 잘 되려면 남학생들끼리 잘 뭉쳐서 단합해야 한다는 골자의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대개 복학생 선배들이 얘기하고 우리들은 듣기만 하면 되는, 다소 지루하고 수동적이지만 별 탈 없는 무난한 분위기였다. 술자리가 마무리 되어갈 때쯤 한 동기 녀석이 날렸던 멘트만 아니었더라면, 모든 것이 좋게 끝날 뻔 했다.

 

그 동기 녀석의 말인 즉 이러했다.

 

“오늘 괜히 집합시켜서 기합주고 이런 분위기였으면 내가 가만히 안 있으려고 했는데...(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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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바,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수류탄을 던져본 적은 없지만 이건 확실해. 안전핀이 뽑힌 거다. 녀석의 그 말이 끝나고 약 1초 간의, 그러나 1분보다 약간 긴 느낌의 정적이 흘렀고 모두의 표정은 어색해졌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가장 고학번이던 선배 형 한 명의 입에서,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예상 가능했던 상투적인 대사 한 마디가 떨어졌다.

 

“전부 대가리 박아 이 새끼들아.”

 

그리고 어떻게 됐냐고? 훈훈했던 분위기는 급 냉각되어 나를 비롯한 ‘미필’ 전원은 술집에서 대가리 박은 채로 1차 훈계를 듣고, 학교에 다시 올라가 운동장에서 2차로 대가리를 박았다. 나는 부실한 건강 상태로 인해 원산폭격을 길게 지탱할 수 없었고 연병장, 아니 운동장 뺑뺑이 돌기로 대체했다. ‘군필’ 선배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폭언을 섞어 가며 훈계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내용도 없는 훈계들을 뭐 그리 길게들 늘어놓았는지.

 

기억나는 대로 훈계의 내용을 대강 늘어놓자면 “니들은 싸가지도 없고, 선배에게 예의 차릴 줄도 모르고,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 녀석들이고, 니들도 군대에 갔다 오면 우리가 왜 이러는지 다 알게 될 거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미리 너희에게 알려줄 겸 기합을 주는 것이다”라는, X도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었다.

 

갔다 오면 알 게 될 거라면서 왜 지금 가르쳐주는 걸까. 그냥 솔직하게 “우리는 우리가 까라고 하면 너희가 까줬으면 좋겠으니, 옳고 그름 따지지 말고 선배가 시키면 닥치고 고분고분 따라줬으면 해”라는 말을 뭘 그리 돌려서 하고 싶었을까. 그날 나는 꼰대 짓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훈훈하게 끝나가던 술자리의 막판에 찬물을 끼얹어 우릴 기합 받게끔 만들어버린 동기 놈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인간들, 아니 그 선배님들께서는 뭐가 어쨌건 간에 한 번은 어떻게든 핑계를 삼아 우리에게 기합을 줬을 거라 생각한다. 그게 단지 좀 일찍 왔느냐 늦게 왔느냐의 차이였을 뿐.

 

다만 한 가지 슬픈 사실은 그날 술자리에서 기합을 받던 동기들 중엔, 우리 중 가장 먼저 입대를 했다가 100일 휴가를 나와 우리 얼굴을 보기 위해 동석했던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군대에서 대가리 박다가 고생 끝에 첫 휴가를 나왔는데, 느닷없이 사회에서 대가리를 박는 그 X같은 기분은, 아마도 당사자가 아닌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아, 얼마나 억울했을까?

 

나는 그 때 기합을 받으면서 대체 군대라는 곳은 뭐 하는 곳이기에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까?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또한 ‘지금 대가리를 박고 있는 친구들도 군대를 갔다 오면 저렇게 되는 걸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사실 당장 받는 기합보다 더 두려운 게 그것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이 후배들을 윽박질러 겁주고 기합이나 주는 꼰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부탁이 아닌 명령이 더 익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

 

다음 해 동기 친구들은 대부분 나라의 부름을 받아 입대를 했다. 친구들이 휴가를 나올 때마다 나는 녀석들에게 물어보았다.

 

“야, 선배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그 ‘중요한’ 게 뭔지 이제 알 것 같냐?”

 

그때마다 돌아온 친구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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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친구들은 모두 전역을 하고, 복학을 했고, 졸업도 했다. 학과에는 그 선배들을 알고 있는 후배, 아니, 나와 동기들을 알고 있는 후배도 거의 남아있질 않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와 내 동기들은 아직도 1년에 한 번은 그때의 일을 갖고 농담을 주고 받는다. 지금도 그때 선배들의 행동이 썩 옳지 않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당시 그들이 왜 그랬었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단지 군대가 아닌 대학이라는 사회에 다시 적응하고 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분명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의 규칙을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됐을 뿐이었다.

 

마치 <스타크래프트>만 2년 내내 하면서 드디어 테란과 저그, 프로토스 세 종족의 빌드를 마스터 했더니 앞으론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라며 ‘왜 탑으로 와 봇으로 가야지 병신 새끼야’라는 소리를 듣는, 뭐 그런 정도의 기분이 아니었을까. ‘자신들은 여전히 병장인데 왜 후배들은 이등병처럼 알아서 기어주지 않는 걸까’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앞서 말했듯, 나는 면제 받은 자다. 아무리 친구들에게서 군대에서의 경험담을 듣고, <진짜 사나이>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해안선>이나 <용서받지 못한 자>같은 영화를 본다 한들, 내가 살아가는 평생 동안 군대라는 곳이 어떤 세계인지 피부로 와 닿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군대라는 시스템 속에서 명령 체계에 따라야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건 대학은 군대가 아니며, 선배와 후배의 관계는 상사와 후임의 관계가 아니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다.

 

면제 받은 새끼가 뭘 아느냐고? 이건 나 뿐만이 아니라 현역 복무를 마치고 온 내 모든 동기와 친구들이 동의하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는 강요와 기합만이 아니어도 후배들의 존중을 받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믿었으며, 우리가 믿는 방식대로 행동해서 후배들에게 존중을 받았고, 후배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채 대학 생활을 마쳤다.

 

아직도 해마다 대학가에선 신고식을 한답시고 선배들이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다가 신입생들이 어이없게 사망하거나, 선배가 후배에게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당신들의 눈에 그게 정상이고, 다들 겪는 거고, 필요한 거고, 대학가의 문화로 생각된다면, 나는 감히 진심으로 당신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나라의 모든 군인들이여. 오늘도 국토와 국민의 안녕을 위해 힘써 주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지만, 부디 전역할 때에는 그곳에서 들인 모든 악습은 버리고 돌아와 주시면 좋겠다. 병장말기증후군, 이거 존재하지도 않는 게임 중독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질병이다. 사회로 돌아오면 당신들은 이등병도, 병장도 아닌 그냥 민간인이다. 남에게 명령하지 않고, 얼차려 주지 않아도 ‘진짜 사나이’는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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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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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