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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재인. 나 힐러리야.


대한민국 참 역동적이야. 한 해도 그냥 넘어가는 적이 없어. 미국대학의 모든 정치외교학과 커리큘럼에 사우스코리아는 매우 중요한 챕터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민족 모두 다이나믹 하지. '다이나믹 코리아' 차라리 이걸로 국가명을 바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줄여서 '다이 코리아...' 쿨하네.


나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작년에 너무 충격을 먹어서 사실상 살아갈 의욕이 확 꺾인 건 맞아.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제대로 얻어터진 건 처음이야. 그래, 졌어. 진 건 좋아, 질 수도 있어. 근데 상대가 빌어먹을 트럼프야. 트럼프라고 트럼프. 미국민의 절반 이상이 대통령이라고 인정하지 않던 인간이었지. 심지어 투표수에서는 내가 더 많이 받은 거 알지? 지금 하고 있는 것 봐. 오히려 선거 때보다 지지도가 더 떨어졌지. 마치 20년 전의 레이건이나 아빠부시의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의 대통령이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사실상 지구의 대통령이야.


난 개표 후에 트럼프에게 당선 축하전화 하기 전까지, 아니 전화를 하면서도 현실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 아니?! 내가 왜 졌지? 유권자들의 지지나 충성도도 내가 월등하고 트럼프보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치적인 역량이나 경험으로 보아서 더블 스코어로 이겨야 합당한 결론인데 내가 왜 졌지?


그렇게 인기 좋은 현직 대통령인 오바마가 이렇게 떡 버티고 나의 등을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있었는데 내가 왜 졌지? 정말 그때는 아메리카가 싫어지더군. 캐나다로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어. 내가 미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자기 비즈니스만을 위해 러시아나 중국과 뒷거래나 하고, 세금이나 탈루한 트럼프에게 질 수가 있냐 말이지.


TV토론에서도 난 명확한 정치 철학으로 트럼프를 횡설수설하게 만들었어. 가끔씩 트럼프가 고집 세고 술 취한 늙은 멍청이처럼, 혹은 5살짜리 심술난 꼬맹이처럼 보이게도 만들었어. 그런데 졌어.


이제 몇 달이 지났어. 가만히 그 시간들을 되짚어 보았지. 난 정말 열심히 했지. 선거유세 이동 중 과로로 졸도도 몇 번이나 했어. 완벽을 기하려고 준비하고 준비하고 또 준비했지. 완벽한 힐러리가 되려고, 결점없는 힐러리가 되려고 혼신을 다 한 시간이었어. 근데 졌어. 개인적으로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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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이랑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 그리고 참모들이랑도. 어쩌면 나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나를 지지한 유권자들이라고 생각해. 각종 언론에서 나의 패배에 대해 여러 가지 논평을 많이 썼지만 우리가 결론 내린 패배의 이유는 3가지야. 그리고 그건 내가 가슴아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더군.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우스코리아에서 연일 흥미로운 뉴스가 나오더군. 역시 정치가의 피가 몸에 있다 보니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어. 여기 펜타곤에서는 만약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시발점은 동북아시아라고 예측하고 있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고.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나서부터 과거의 역사보다는 민주주의의 역사에 방점을 두고 헤게모니를 설명해 왔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 한번씩 보여주는 힘은 사실상 어떤 정치 이론이나 논리로 이해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는 게 사실이야. 특히 코리아 같이 과거의 기록이나 전통에 대해 보수적인 민족들의 자존심, 자존감은 미국이 접근할 때 매우 신경쓰는 부분이야.


대통령이 그런 식의 부패 스캔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국민들의 성숙된 시위와 부패권력에 대한 단호함, 탄핵과 위정자들의 구속 등은 매우 드라마틱한 현대사야. 그리고 더욱 깜짝 놀랐던 건 이재용 샘송사장의 구속이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어. 빌과 농담처럼 얘기했지. "저 호전적인 민족을 봐. 우린 코리아가 다 빨갱이로 바뀌더라도. 우리편에 둬야 돼. 저쪽 사람들은 진짜 한다면 해 버린다고" 그러면서.


곧 대통령 선거가 치루어 진다고 들었어. 나는 재인에 대해 어느정도 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그 자존심 세고 똑똑했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아직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어. 쉽게 다루기 힘들었고 나와 달랐지만, 신뢰할 수 있는 대통령이었어.


지금 코리아의 선거판은 매우 혼란스러울 거야.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 주인 없는 케잌이 눈앞에 갑자기 떨어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보기 좋은 건 언제나 조심할 필요가 있어. 재인이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후보 같으니까 내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이렇게 편지를 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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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나의 선거와 매우 유사한 구도로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좀 급해졌지. 난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이길 줄 알았어. 근데 졌어. 우리의 패배에 대해 결론 내린 이유는 3가지야.


첫째.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을 적으로 만든거지. 버니는 좋은 사람이야. 그야말로 밑바닥 정치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이 될 만한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지. 경선에서 예상 외로 버니의 지지가 두터워서 초기에는 경선 흥행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나도 반응을 즐겼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버니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고, 마치 내가 트럼프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 아주 어렵게 조직의 힘으로 버니를 꺾었어. 그 과정에서 우리는 버니와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줬어. 서로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었지만 책임은 결국 승자가 져야만 되는 게 경선이잖아.


우린 버니의 지지자들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그들은 결국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의사표현으로 나에 대해 실망한 감정을 드러낸 거지. 만약 버니와의 경선발표 다음날로 돌아간다면 난 버니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고 감사를 전하고 지지를 요청할 거야.


둘째. 빌의 주장을 무시한 거야. 남편이자 전직 대통령인 빌은 타고난 정치가이자 전략가야.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스캔들을 겪고도 아직도 친근한 이미지를 가져가고 있는 것만 봐도 그의 정치적 영리함은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 물론 그게 나를 가장 열받게 하는 거라는 걸 부정하진 않겠어.


선거 후반 빌이 나에게  한 말이 있어. 스스로를 너무 띄우지 말라고 했어. 선거 유세나 티비 토론에서 확신에 찬 말들이 언제든 오만한 말로 바뀌어 들릴 수 있으며, 유세장의 열기와 지지자의 환호에 너무 심취하면 정치적인 멘탈과 시야가 고정될 수 있다고. 선거는 상대와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선거판에서는 우리 편에만 둘러싸여 있어서 실제 보이는 현상이나 분위기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난 조금 들어주는 척 하다가 빌의 말을 완전히 무시했지.


"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어. 종이 신문의 시대가 아니라 sns나 twitter의 시대라고, 솔직한 감정과 진실이 거짓과 위선을을 쫓아내고 조롱하는 시대라고, 지금보다 유권자들이 후보자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선거는 없었다고. 나, 물론 완벽하지 않지. 하지만 트럼프는 쓰레기라고 쓰레기. 빌 당신보다 오히려 국민들이 트럼프에 대해서, 그들의 허황된 전략에 대해서 그의 거짓 인격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걸."


빌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후 일어나더군. 그 후로는 빌은 나의 선거전략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빌과 그때 더 많은 대화를 나눴어야 했는데 매우 유감이라고 생각해. 빌이 돌아나가면서 이렇게 얘기했다더군.


"그래, 세상이 바뀌었지. 그렇지만 투표용지는 바뀌지 않았어. 종이에 도장을 찍는 게 선거"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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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나는 트럼프를 너무 무시했어. 나는 트럼프에 대해서 너무나 시시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어. 그의 개념없는 발언, 편협한 정치 철학, 만약 정치철학 이란 걸 가지고 있다면 말이야, 여성 문제, 인종문제, 환경문제에서의 즉흥적인고 자극적인 언사들. 너무나 오랬동안 그의 엉터리 삶에 대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난 트럼프를 나의 상대로, 또는 미국의 대통령에 앉을 사람으로는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더군. 공화당이 정말 제정신인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건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


그런데 내가 가진 이런 사고방식이 이번 선거의 가장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생각해. 트럼프에 대한 나의 인식과 국민들이 가지는 트럼프에 대한 인식간 괴리의 차가 너무 컸던 거야.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나는 아무리 공화당을 지지한다고 해도 설마 저런 정도의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 거라고는 미국인들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백 퍼센트 확신했지. 그런데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지. 트럼프가 훌륭한 인격체이건, 뛰어난 정치가이건, 수완 좋은 비즈니스맨이건,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어. 과거의 그가 어떠했는지는 현재의 미국과 미국의 미래에, 그리고 자기들의 삶에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거지.


미국은 2017년의 대통령을 원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2017년의 미국 국민이 듣기를 원하는,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원했던 거야. 트럼프는 그 지점을 정확히 파고 들어갔어. 빈 공약이 될 지언정 정확한 문제제기를 하고, 설득력 있는 답안을 제시한 거야.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은 미국 유권자이고 그들이 원하는 해답지에 가장 가까운 예상답안을 가지고 접근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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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했던 여러 모순된 행동과 언사들은 지지자들에게는 다 해프닝으로 여겨졌지. 그동안 미국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나 있던 국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딱 긁어준 거야. 난 지나고 보면 그러지 못한 것 같아.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얘기들을 했어. 그게 정답지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거지. 당연히 대다수의 국민들도 지지할 거라 생각했어. 너무나 당연하고 미국이 나아갈 적절한 방향이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설득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했지.


그런데 결과는 졌어. 미국 국민들은 나의 해답지와는 다른 문제를 들고 있었던 거야. 혼란스러웠지. 우리의 정책과 비전이 트럼프 측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건 나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인정하고 있어. 우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거든. 그런데 좋은 무기가 있어도 우린 좋은 작전을 구사하지 못했어. 선거는 전쟁과 같아. 트럼프는 무기는 빈약해 보이지만 훌륭한 작전을 짰어.


나 힐러리는 나의 시각으로 유권자들을 평가하고 이해시키려 했지만 트럼프는 유권자의 시선으로 트럼프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했지. 그렇게 선거는 지나갔고 유권자들의 가슴에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트럼프가 되었지. 선거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어. 감히 트럼프가 선거에 대해서 뭘 알까. 내가 정치와 선거에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고 욕망을 두드리며 희망을 부추기며, 변화를 추구하는 마음을 읽는 데 있어서는 트럼프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은 거지. 정치도 선거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의 마음이 선택하는 거잖아.


지금 사우스코리아의 국민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다들 인식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그들이 행사하는 표 하나 하나가 의미 있는 표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겠지. 재인은 코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더 잘 읽고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래.


굿 럭.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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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