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18일, 2002년 대선이 있기 하루 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노무현 후보의 마지막 명동 유세. 겨울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를 향해 환호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노사모를 비롯한 노무현의 열혈 지지자도 있었지만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 끝에 노무현에게 패배한 이래 노무현을 도와 온, 정몽준의 지지자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차기 대통령 정몽준의 피켓을 들고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 “정몽준 대통령”을 외쳤다. 그 때 노무현 후보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엄청난 꽹과리 소리가 되어 그들을 덮쳤다.
“추미애 의원을 기억하십니까. 대찬 여성, 아니 여자라는 표현이 낫겠다. 대찬 여자 추미애 의원이 있다. …국민경선을 지킨 정동영 최고위원도 있다. 몇 사람 있으니 경쟁할 수 있다.”
이 말에 정몽준 의원의 얼굴은 냉동인간으로 변해 버렸다. 새 정권의 주인은 못돼도 2대 주주는 족히 될 것이고 차기 대통령 후보만큼은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던 이 재벌집 도련님은 즉시 식솔들을 데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우래옥 냉면집에 가서 회합을 가진 뒤 10시 반, ‘노무현 지지 철회’를 발표한다.
우래옥 발 태풍은 전국을 덮친다. 가장 신명나게 말춤을 춘 건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호외(2002/12/19)를 만들어 뿌렸다. 2면에 실린 사설의 제목은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였다(전문보기).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제목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글자 한 자 한 자에 배어 있던 비아냥거림과 조소의 냄새는 지금 떠올려도 비릿하고 퀴퀴하다.
나는 선거 다음 날 휴가를 낸 터였다. 투표를 끝내고 아들내미 스키를 가르칠 계획이었기에 장거리 운전을 하려면 잠을 자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노무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몽준이 왜 삐졌는지 노무현이 정몽준 집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는지 어쨌는지 까맣게 모른 채 신나게 코를 골고 있었다.
밤 11시 30분, 핸드폰이 울렸다. 짜증을 참으며 전화를 받았는데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목소리로 신원을 파악하고 뭘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뒤 계속 울었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잠이나 자. 진인사대천명이지. 잘된 걸 수도 있어. 대충 진압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또 전화가 왔다. 그날 나는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를 받았다.
“정몽준 개새끼는 끝내 개새끼다.”
“민주노동당원! 내일만은 2번 찍어 줘.”
“목숨 걸고 투표! 그래도 이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너무 원통하다.”
메일함에서 발견한 선배의 이메일이 압권이었다. 자신의 주소록을 총동원하고 명함첩까지 가져다 놓고 일일이 기입하여 보낸 수백 통의 메일 가운데 하나였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나를 아는 모든 분들께.”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동영상도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2000년 총선 당시 부산 북구의 청중 하나 없는 유세장에서 눈물겹게 연설하던 노무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메일에는 이런 짤막한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 동영상을 보아 주십시오. 이 사람을 보아 주십시오. 우리가 저 용기와 희망을 잊어 버리고 살되 잃어버리지는 않았음을 보아 주십시오.”
그 이후 선배를 개인적으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그날 그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메일 주소 쓰는데 오타가 날까봐 또박또박 타이핑하면서 울었을 것이다. 이렇게는 안 된다. 이렇게는 안 된다. 나에게 전화하고 다른 이를 깨우고 문자를 날리고 조선일보 호외를 보며 발 동동 구르던 이들 모두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절박함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뭉쳐진 뜨거움이었다.
하나 더하면, ‘그 때 그 노빠들’은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 제발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고 고개를 숙였을망정 이 와중에 사표를 찍느냐고 윽박지르지도 않았고(유시민의 사표론이 나오긴 했지만 그에 편승해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 상욕을 퍼붓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지하게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게 대세는 아니었다), 노무현의 연설을 첨부하여 '나를 아는 모든 분들께'를 보낼망정 이회창 욕하느라 침이 마를 일도 없었다.
그 겸손함이, 존심 따위 내던지고 내가 옳다는 자긍 따위 개나 주고 “이런 말하긴 미안하지만 이번만은”이라며 굽신거리던 노빠들의(심지어 그들은 노빠라고 불리는 데 대한 거부감도 반납했다) 겸손함이 세상을 갈랐다고 얘기하면 과장일까.
산하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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