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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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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최근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19대 대선의 판도가 양강 구도로 재편되었다. 왜곡된 표집(sample) 선정, 상황을 반영하지 않는 질문 방식 등 '안철수를 띄우기'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이상한 여론조사가 영향을 미친 결과다. 언론은 이를 신나게 받아쓰며 뽐뿌질 하고 있다.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포털 - 여론조사 - 언론을 이용해 작전을 실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내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거나 맘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현상은 저절로 사라져 주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분석하고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수와 중도는 어째서 안철수를 지지하는지 고찰해 보았다.



2. 디폴트(Default) 이론


대통령을 뽑을 때, 사람들은 전임 대통령에게 '부족한 부분'에 집중해 후보를 선택한다. 이때 전임 대통령의 업적은 차기 대통령 체계에서도 당연히 계승될 기본값(Default)이라고 묵시적으로 전제한다. 전임 대통령의 업적을 거저먹고 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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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ault: (명사) 컴퓨터 등 전자기기에서 사용자가 특별히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적용되는 세팅. 기본값.

 

MB가 당선된 17대 대선에서, 사람들에게 인식된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약점은 '경제'였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언론에 의해 씌워진 프레임이라고 하더라도 '노무현은 경제 살리기에 약했다'는 인식은 분명히 존재했다.



인식에는 구체적인 논거가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정의(Justice)와는 더더욱 상관이 없다.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면 그런 인식은 '존재'하는 것이다.



17대 대선에 앞서 사람들은 노무현이 일구어 놓은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업적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냥 거저먹고 가는 것이라고 착각했다(심지어는 노무현 본인 조차도 그렇게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의 완성은 거저먹고 가는 거니까, 노무현의 약점인 '경제'만 더해주면 좋겠다. 그럼 CEO 출신 MB가 경제를 살리면 되겠네" 라는 인식이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MB는 디폴트로 거저먹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민주주의를 패대기쳐서 너덜너덜한 누더기로 만들어 놓았다. 모든 상식을 초월하는 MB 가카는 과연 혁신의 끝판왕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사람들이 전임 대통령의 업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디폴트로 여겼다는 점이다. 후임 대통령을 선출할 때, 전임 대통령의 다양한 업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판단하기보다는, 잘된 부분은 잊어버리고 안된 부분에만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전임 대통령에게 부족한 부분이 후임 대통령을 뽑는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인식은 사실과 달라도 상관없다. 인식이 존재하기만 하면 디폴트 이론은 작용한다.



비슷한 예로, 작년에 있었던 미국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오바마 케어'와 같은 오바마의 업적은, 누가 후임이 되든 거저먹고 가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이러한 착각의 결과로 트럼프를 선택하였으나, 곧 오바마의 업적이 거저먹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이와 같은 깨달음의 시점이 곧 트럼프 탄핵 시점이 되지 않을까).


 

3. 대통령의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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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의 공과 과를 보면, 아무리 큰 삽질을 하였다거나, 불법으로 권위를 찬탈한 천하의 개쌍놈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시대 민심의 시대정신을 표상하고는 있다. 우선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어떤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대통령이 되었는지 그 연혁을 살펴보자.

 

이승만 → 박정희 (전근대 농업국가를 공업국가로 탈바꿈)


이승만 시대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걱정을 해야 했다. '가난 탈출'의 시대정신에 기반하여 박정희는 전근대 농업국가였던 한국을 현대적 공업국가로 탈바꿈시켰다. 물론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를 그래도 먹고 살만한 나라로 만들었던 공이 박정희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며, 경제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던 나라에 경제체제를 건설한 근면성실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공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 → 전두환 (공업국가의 완성)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은 기반이 취약한 불안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민심을 잃게 된 주요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개무시한 잔혹한 독재통치를 떠올린다. 그러나 민심 상실의 결정적 계기는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상승과 이로 인한 국내 경제 침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전두환은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위태로운 공업국가를 괘도에 올려놓았고, 한국은 역대 최대의 경제 성장률과 함께 호황을 맞이한다.

 

전두환 → 노태우 (민주주의의 실마리)


그런대로 튼튼한 경제체제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직접 투표해서 선출하는 대통령, 군인이 아닌 대통령을 원했다. 노태우가 민주주의와 어울리는 인물인지 의문점이 남지만, 노태우 시대부터 사람들은 권력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쇠고랑 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도 민주주의를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어렴풋한 실마리를 찾게 된다.

 

노태우 → 김영삼 (민주주의의 시작)


노태우는 '자신은 군인이 아닌 보통사람'임을 표방하였으나, 과연 그가 군인이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남을뿐더러, 그가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더 큰 의문점이 남는다. 김영삼이 3당 합당이라는 도적질을 통해 대통령직을 슈킹했다는 역사적 평가도 있지만, 좌우지간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념에 어울리는 민주화 운동가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본격적인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었다.

 

김영삼 → 김대중 (경제 심폐소생)


김영삼은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업적이 있지만,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를 도탄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다. 사람들은 국제사회에서 명망이 두터운 경제 전문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사망한 경제를 심폐소생시킨다.

 

이와 같은 예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후임 대통령 선출에 반영된 시대정신은 전임 대통령의 부족한 부분의 반대” 표상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4. 박근혜 → ???


19대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시점에서, 박근혜에게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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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질문이다. 박근혜는 모든 것이 다 부족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지금 나와있는 5당의 후보는 모두 박근혜의 부족한 부분을 충족한다. 5당의 후보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호모 사피엔스 개체라도 박근혜의 부족한 부분은 충족시킬 수 있다.


박근혜에겐 디폴트가 없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의 선출기준이 되는 시대정신은 '적폐 청산'이 아니다. 본인이 적폐 그 자체만 아니라면, 디폴트는 충족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사람새끼라면 누굴 뽑아도 박근혜보다는 잘하겠지'라는 허탈함이 깔려있다.


 

5. 그런데 왜 안철수가?


박근혜가 남겨 놓은 최소한의 시대정신, '본인이 적폐 그 자체가 아닐 것'을 충족하는 대선후보는 문재인, 안철수, 심상정 3명이다. 쩌어기 오른쪽 끝편에 박정희를 신으로 추앙하는 광신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아무리 자기 정체성이 보수라고 하더라도 '차기 대통령은 본인이 적폐 그 자체가 아니어야 한다'라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다.


디폴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홍준표, 유승민이 한자릿수 지지율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이를 반증한다. 물론 바른정당과 유승민 후보는 '본인들은 적폐 그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과연 그 주장에서 진정성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정의당과 심상정은 워낙 존재감이 미미해서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문재인, 안철수 2명뿐이다.


안철수도 '본인이 적폐 그 자체가 아닐 것'이라는 디폴트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보수와 중도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안철수가 주장하는 '4차 산업혁명'은 현재의 시대정신도 아닐뿐더러 사람들의 관심사도 아니다. 안철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보수 입장에서는 남는 게 안철수 밖에 없으니 안철수에게 표가 몰리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범들이 구속된 것은 멀고 먼 적폐 청산의 대장정에 겨우 시동을 건 것에 불과하지만, 한편으로 적폐 청산이 벌써 되어버린 것만 같은 착시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 보자면, '이미 주범들이 구속된 마당에 안철수라고 적폐 청산을 하지 못할까?'라는 안일함이 안철수의 지지율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라고 민주주의를 못할까?'라는 안일한 역사인식과 묘하게 닮은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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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앞으로 남은 변수는?


현재 안철수의 지지율은 급하게 맥주잔에 따른 거품과 같다. 급하게 따르다 보니 거품이 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언론의 편향적 보도가 크게 한몫을 하였다. 언론이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까지 치다 보니, '저쪽에 뭐가 있나 보다'하고 우르르 몰려간 사람들이 많다.


안철수는 '본인이 적폐 그 자체가 아닐 것'이라는 최소한의 디폴트 조건을 충족하지만, 보수 유권자 입장에서 흔쾌히 한 표를 줄 수 있는 인물도 아니다. 여기에 안철수 지지율의 약점이 있다. 거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질 것이다. 대선까지 남은 기간 4주는 뽐뿌질만으로 끌고 가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언론의 안철수 띄우기 타이밍이 대선 직전이 아닌 지금이라는 점은 오히려 다행이다. 거품 만땅인 상태로 여론 조사 결과 발표 금지 기간에 들어갔으면, 결과는 정말 모를 뻔했다.


여론조사엔 아직 무응답이 많지만, 사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이미 누굴 찍을지 마음을 정했을 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민주당을 찍어본 적이 없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순리에 따라 이번엔 문재인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샤이 문재인'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여론조사에서 부동층 즉 ‘무응답’으로 잡힌다.


유일하게 남은 한 가지 변수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보수 유권자가 그래도 시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투표소에 나와 안철수를 찍느냐, 투표를 안 하느냐 뿐이다. 이들이 안철수를 찍을지 투표를 안 할지는 문재인을 얼마나 싫어하느냐에 달려 있다.


 - 문재인이 조올라 싫으면,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투표소에 나와 안철수를 찍을 것이다.


 - 문재인이 그냥저냥 싫으면, 투표를 안 할 것이다.


어차피 문재인을 싫어하는 유권자가 이제 와서 문재인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따라서 열폭하면서 상대 후보 비방하는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비방한다고 투항하는 사람 없다. 쓰린 가슴에 소금까지 뿌리는 행동은, 상처받는 보수 유권자로 하여금 안철수를 찍도록 강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대신, 홍준표 후보의 선전을 기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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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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