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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 그리고 백보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얘기를 다시 해보자. 맹자에게 양혜왕이라는 이가 묻는다.



"나는 백성들에게 한다고 하는데 말이오. 어디서 기근이 들면 다른 데서 곡식 나르고, 또 다른 곳에서 문제 생기면 마찬가지고. 둘러봐도 나만한 군주가 없단 말씀이야. 그런데 왜 민심이 나에게 쏠리지 않을까요?“



이때 맹자가 한 대답이 바로 '오십보백보'다. 



“전쟁 좋아하시니 전쟁에 빗대 말씀드리죠. 전투가 벌어지는데 한 병사가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고 또 한 병사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한 명은 백보를 가서 멈췄고 또 한 명은 오십보를 가서 섰죠. 그런데 오십보 도망간 병사가 백보 도망간 자에게 이 비겁한 놈아 욕을 퍼붓는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오십보나 백보나 도망간 건 똑같지 않겠습니까. 왕의 정치도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 왕이나 오십보백보라는 뜻이죠.”



오십보백보는 비유다. 맹자 말의 핵심은 “네가 아무리 백성을 위한다고 해 봐야 다른 놈들하고 다를 게 있냐. 그렇게 전쟁을 좋아하면서.”였다. 전쟁을 좋아하는 군주가 어떻게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냐는 말을 하기 위해 사용된 비유지, 그 자체가 구체성 있는 원칙으로 제시된 게 아니다. 바꿔 말하면, 부산 가는데 호남선을 탄 게 문제지, 전주에서 그 사실을 깨닫든 목포에서 잘못을 알아채든 멍청한 건 똑같다는 것이다. 전주에서 아뿔싸 한 놈이 목포에서 여기가 어디야 한 놈에게 ‘이 바보야’ 비웃는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가.


실제로 전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맹자는 어떻게 얘기했을까. 요즘에도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는다는 표현을 쓴다. 화약 무기 이전, 아니 화약 무기가 본격화되는 20세기 이전까지도 ‘전열’(戰列)이란 단순한 오와 열이 아니라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한몸처럼 움직이는 진용(陣容)이었다. 진이 허물어진 군대는 쉽사리 포위당하거나 각개격파의 제물이 되기 십상이었다. 누가 많이 죽느냐보다 어느 쪽 진용이 먼저 무너지느냐가 전투의 관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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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투 중 지휘관의 명령 없이 도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엄벌에 처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오십보백보의 원칙을 적용하여 모두를 일벌백계한다면 그 원칙적인 지휘관은 반드시 패할 것이다. 치열한 전투에서 누가 먼저 도망가고, 어느 정도 도망갔는지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오십보 도망한 병사는 백보 도망간 병사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싸웠고 혹 열보 물러선 자가 있다면 오십보보다는 더 버틴 사람일진대, 그 모두를 ‘도망’이라는 굴레를 씌워 죽인다면 다른 건 몰라도 병력의 열세 때문에 패할 게 뻔하지 않은가. 거기다 백보 도망간 자가 오십보 도망온 자에게 “너나 나나 똑같다. 맹자가 그랬어.”라고 한다고 치자. 이 말을 듣는다면, 공자처럼 물에 술 탄 느낌이 아니라 직설적이었던 맹자는 대번에 욕설을 날렸을 것이다.



 “너는 100대 맞자. 쟤는 50대만 맞고.”



원칙은 뼈대다. 결코 꺾일 수도 없고 휘어져서도 곤란한 등줄기다. 그 힘이 있고서야 인간은 바로 설 수 있다. 현실은 그 위의 살과 근육이다. 다듬기에 따라서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있고 빼야 할 수도 불어야 할 수도 있다. 뼈대는 지키는 것이 소중한 것이고 살과 근육은 키워내고 단련시키는, 즉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미덕이 된다. “도망은 무조건 죄”라는 건 원칙이지만 '50보는 50대, 100보는 100대'가 현실이듯이.


그럼 원칙은 무엇이고 현실은 무엇인가. 뭔가 애매하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는 역사를 뒤적여 보는 게 좋다. 조선 시대 지방관들은 가족을 대동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결국 그 지역에 민폐를 끼치게 마련이고 제정에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떼거리 친척들 몰고 다니는 것은 ‘남솔(濫率)이라 하여 탄핵의 대상이 됐다. 이 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게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그의 형들은 일찍 요절했기에 그는 집안의 가장이었고 조카들을 앞장서서 챙겼고 임지를 옮길 때마다 그들을 데리고 다녔다. 명백한 ‘남솔’이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차라리 남솔의 죄를 지을지언정 이 의지할 데 없는 어린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



그래도 남솔은 남솔이다. 원칙에는 분명히 위배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위의 살을 보아야 한다. 이순신의 조카들은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단 한 번의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고,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을 도와 싸웠다. 그 흔한 미관말직 하나 받지 않은 채 말이다. 이순신의 마지막을 지켰던 조카 이완은 전쟁이 끝나고야 무과에 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에게 그 흔한 종사관 자리 하나 주지 않았다.



위장전입 그리고 위장전입



 위장전입(僞裝轉入): 거주지를 실제로 옮기지 않고 주민등록법상 주소만 바꾸는 것.



위장전입 금지는 박정희의 국민 통제 정책이니 뭐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그로 인해 막대한 부동산 투기를 저지르고 이익을 보려는 이들 때문에 정해진 법규다. “나도 위장전입했어요.”라고 주장하며 위장전입 자체를 “우리 모두 한 짓”으로 몰려는 이들의 행동에 반대한다. 문제는 문제다. 원칙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앞장서서 원칙을 돼지 오줌통처럼 차고 다녔던 놈들이 주장하는 원칙론이다.


최근 ‘오십보백보’ 에 해당하는 사자성어(?)가 연신 입에 오르내린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을 수시로 갖다 붙이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까. 수백 명의 목돈을 삥땅 친 사기꾼이 오락실에서 500원 삥뜯는 동네 양아치에게 "더러운 돈의 욕심을 끊지 못하면 인간 쓰레기이니라." 읊으며 "너나 나나 뭐가 다르냐."라고 한다면 어이가 없는 일 아닌가.


나쁜 놈들이 원하는 건 최악의 ‘오십보백보’론이고 ‘내로남불’론이다. 싸움에 참여하지도 않고 튄 놈이 전투 치르다가 백보 도망간 놈을 비웃으며 “너나 나나” 하면서 낄낄거리고 결국 전군 후퇴 후 “다 같이 도망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군대가 전쟁에 이길 리가 있는가.


가장 비겁한 놈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비겁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나쁜 놈이다.”라는 외침이 드높을 때, “내 탓이오.” 저마다의 가슴을 치라는 선동이 유효할 때, “민나 도로보데스(몽땅 도둑놈이야)”라고 사람들이 코웃음 치며 돌아서는 순간을, 그 사회에서 가장 나쁘고 비겁한 악질들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는 도저히 동의하지 못하겠다. 원칙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건 아니다. 똥물에도 파도가 있고 모기 다리에도 근육이 있다. 그리고 어떠한 원칙에도 경중은 있다. 







산하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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