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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13. 목요일

정우성








 

 




단체전 


지난번 첫 번째 연재의 댓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오늘 글은 이 댓글과 관련이 있다. 이 분은 지금까지 매우 열심히 살아 왔음에 틀림없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분께 박수를 보낸다. 그럼에도 누군가 경제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다. 더더욱 축복은 지금이 아니라 15년 전에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 외아들로 태어나고 자랐고 어느덧 대학을 가야 했다. 운이 좋게도 학력고사 점수가 좋아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졸업 때까지. 어머니는 등록금으로 모아 둔 목돈 백 만 원을 동네 잔치로 다 써버렸다. 여차여차해서 직장을 얻고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고작 300만 원 모아 둔 돈으로 시작했다. 다행히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보증금 1800만 원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운이 좋아 1년 반만에 대출금을 다 갚고 전세 3500만 원 집으로 이사했다. 물론 부족한 돈은 또 빌렸다. 4년 후 빌린 돈도 다 갚고 약간의 모안 둔 돈도 있었다. 무려 전세 7000만 원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당연히 또 빌렸다. 여유자금 1억 원 정도 있는 처형이 항상 빌려주곤 했다. 운이 좋았다. 2년 후 저축한 돈 1500만 원으로 자동차를 샀다. 숨 가쁘게 살아온 8년여...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얼마 후 약간의 모아둔 돈과 은행 대출로 2억 7천 만 원의 31평 아파트를 샀다. 이사한 아파트에서 현재까지 세식구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이가 7살이다. 은행대출금은 작년에 모두 갚았고 처가에서 빌린 돈이 아직 한 1억 정도 남아 있을 것 같다. 목돈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나는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것 마냥 운좋게 여기까지 왔다. 내가 노력해서 된 것만은 아닐 거다.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된 운을 빌어볼 뿐이다.”


7) 목돈게임: 요즘도 개천에 용이 날까? 부는 세습될 것이며 그에 따라 지위와 권력 또한 세습될 것이다. 개천에 용 날 일이 없다. 왜냐하면 목돈게임은 단체전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부모를 둔 자식들은 여전히 가난할 것이며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청년은 스스로의 힘으로 목돈을 마련할 수 없다. 이건 아주 명료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 목돈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어쩌겠는가? 그건 더이상 '개인전'이 아니라는 이야기. '단체전'이다. 가족동원령이 필수적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의 목돈 동원령에 응답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의 인생에 부모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목돈게임은 단순한 도움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총력전이다.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는 게 문제.


8) 부의 세습, 사후세습이 아니라 평생세습: 가난한 부모가 있다면 부유한 부모도 있겠다. 목돈 사회는 부의 세습을 평화롭게 강화해 준다. 부유한 부모가 그 동원령에 응해준다면 자식은 쉽게 통행세(존재의 대가로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목돈)를 낼 수 있다. 통행세를 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목돈을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다. 부자에게 목돈은 그 자체가 좋은 비즈니스이다. 부자의 자식이 빛나는 것은 무엇보다 통행세를 마련하느라 '청춘을 소모할 까닭이 없다'는 점이다. 부유한 부모를 둔 자식은 일탈하지만 않는다면 좀 더 좋은 교육, 좀 더 나은 직장, 좀 더 많은 기회를 누리게 된다. 부모를 잘 둔 자식은 목돈게임의 승자이다. 단체전에서 승리하기 때문에 부는 자연히 세습되고 권력도 함께 물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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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의 세습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없고 또 우리 아이들에게 내려줄 마음도 없지만 그건 내 처지이자 내 생각일 뿐이다. 너와 나의 차이는 자연적이고 객관적인 것이어서 차이를 인식하는 데 특별히 개념을 요하지 않는다. 차이는 차이일 뿐이다. 동일성은 다르다. 개념을 동원해야만 비로소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적어도 철학적인 국면에서는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우리는 저마다 지문이며 나와 남이 동일하기 전에 이미 차이가 있다. 자연법칙은 인간이 동일하지 않을 뿐더러 여러모로 차이가 있음을 가르친다. 차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니는 존엄성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봉건이냐 현대이냐가 가늠될 것이다. 그 가늠자의 성능이 어쨌든 간에 부의 대물림도 일단 쿨하게 인정해보자.


그러나 부의 대물림 방식은 그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목돈사회는 타인의 존재를 핍박하여 연약한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면서 부를 세습한다. 사후 세습이 아니라 평생 세습이다. 부의 세습을 견제하려는 사람들은 강자에게 어떤 핸디캡을 줄 것인지를 연구해 왔다. 그렇지만 선생, 약자에게 핸디캡을 주는 이 사회의 비정함을 우선 없앨 일이다.   


9) 이미 패배한 상태에서의 질투: 가난한 부모를 둔 자식은 통행세 마련을 위해서 아주 긴 허송세월을 보내야만 한다. 자기 힘으로 목돈을 마련하려면 온갖 고생을 지불할 뿐더러 다양한 모욕을 감내해야 한다. 욕망과 꿈을 통제하며 충분히 참고 또 인내해야 한다. 목돈게임이라는 이 단체전에서 그들의 숙명적인 인내심은 단지 가난한 부모를 뒀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패배한 상태에서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출신성분에 의해 그들은 이미 목돈게임의 패자이다. 부모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이 연좌하여 포복한다.

 

 

경제적으로 어중간한 서민 가족은 더 어렵다. 중산층의 비애. 자식뿐만 아니라 부모의 인생 또한 고달파지게 마련이다. 그 부모들은 목돈 게임의 단체전에 참여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노후? 언감생심. 단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평생 쌓아둔 돈에 연금을 더해서 늙은 여생을 폼나게 설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는 베이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를 맞이하여 소비시장에 활력이 생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가하다. 그들은 돈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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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더 적은 기회: 성공은 기회를 잡는 일이다. 어떤 성공이냐를 놓고서 나름 철학적인 논쟁이나 종교적인 권면을 할 수는 있겠다. 논쟁과 권면이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현실에서의 개인의 성공은 경제적인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기회를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기회를 잡는 것도 개인의 능력이겠으나, 환경이 개인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기회를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비참함에 대해서 말한다. 균등한 기회와 공정한 사회는 맵시 좋은 말이다. 반면 현실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회를 잡으려면 목돈을 해결하라.


목돈게임의 승자들은 여유를 지니고 다양한 시도도 할 수 있거니와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주위를 둘러 보라. 우리 사회의 모든 기회는 목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는 빈틈이 없다. 목돈게임의 패자들은 목돈을 마련하는데 정신이 없고, 목돈을 꿔준 은행의 요구에 응하는 데 여념이 없다. 더 적은 기회만이 찾아올 것이며, 눈 앞의 좋은 기회를 떠나보내며 낙심할 수도 있다. 목돈게임의 패자들은 급해진다. 나쁜 기회가 찾아오면 ‘나쁘다’라는 형용사보다 ‘기회’라는 명사에 이끌린다. 기회는 투기화하며 도박성을 띤다.


11) 가족동원령의 필연성: 인간은 성인이 되면 독립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건 요원한 일이다. 대학생이 되고 또 그 지위를 유지하려면 목돈이 있어야 한다. 아르바이트로 벌 수 있는 돈의 크기는 십 년 전이나 이십 년 전이나 거의 그대로다. 그렇지만 대학등록금은 수백 퍼센트 상승했다. 가족 동원령으로 대학등록금을 마련한다. 빚이 생길 수 있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나아지지는 않는다. 더 모진 닦달에 직면한다. 결혼을 하려면 결혼자금이 있어야 하고 막대한 주거보증금이 필요하다. 등록금과는 완전히 다른 크기. 등록금 목돈보다 열 배는 더 큰 목돈을 사회가 통행세조로 개인에게 요구한다. 다시 빚 아니면 가족동원령이다. 흔히 두 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12) 위기에 처한 개인의 정신적 자유: 사회가 요구하는 목돈에 맞서 단체전을 벌이는 까닭에, 대한민국 청년은 성인이 돼도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기 어렵다. 자유의지를 갖기도 어렵다. 용기를 잃는다. 부모가 그 큰 목돈을 해결해 줬으니 부모의 발언권이 커질 게 뻔하다. 명목상 무상으로 보이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 돈을 주고 받는 거래이다. 자식은 경제력을 가진 부모의 발언권에 맞서 함부로 거스르기 어렵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떤 자식은 부모가 당연히 자신의 목돈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부모의 역할이자 도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릇 자식의 경제적 독립은 곧 그 혹은 그녀의 정신적 독립을 불러온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자식의 경제적 독립이 몹시 어렵기 때문에 성인이 돼도 정신적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 나이 많은 어린이가 늘어만 간다. 누가 이 아이를 탓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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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고 결심을 하는 빛나는 청년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목돈을 마련하기 극히 어렵다는 객관적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른 도움을 찾는다. 은행이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은행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가계 빚은 늘고 은행은 여신으로 포동포동해진다. 은행의 노예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참아야 하거니와 함부로 자유의지를 발휘하면서 꿈을 좇을 수 없다. 용기를 내려놓는다. 용기를 자극하고 촉구하는 것을 외면한다. 무감각해진다. 일자리를 잃으면 겪게 될 험한 꼴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신용을 저당잡힌 인간의 영혼은 나약해진다.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우 빚을 갚고 이제 좀 안정했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자기 자식에게 요구될 목돈 마련을 위해서 다시 단체전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돈의 시지푸스.


이런 굴레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있다. 그 피해를 우리 자신이 겪는다. 그렇지만 목돈이라는 괴물은 무엇보다 어린 세대, 청년 세대의 인생을 볼모로 잡고 가계를 핍박한다. 목돈 게임의 승자들은 목돈의 무게를 자기보다 더 연약한 이에게 전가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자식을 위해서, 우리 후대를 위해서 우리 세대의 악취와 사악함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의 어른 세대는 젊은이의 영혼을 짓밟으면서 자기 발전을 추구했노라고, 일부의 안온함을 위해서 젊은이의 인생을 투기했노라 말이다. 어른들은 온화한 마법사처럼 인문학이니 힐링이니 도전이니 하면서 '개인'에게 주문을 건다. 청년들은 스펙 쌓기에 열중이다. 모두 모르핀 주사일 뿐이다. 그러나 이건 단체전이란 말이다. 한국 사회 모든 가정이 갑옷을 입고 참여한 콜로세움, 이것이 우리 사회다.


여기까지가 서론,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제부터 본격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할 타이밍:


첫째, 전통적인 자본주의는 개인의 노동력과 근면함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돈을 주잖아. 그렇지만 목돈자본주의는 개인에게 '존재의 대가'를 목돈으로 요구하지.


둘째, '양'을 우습게 여기지 마. 그게 겁나게 크면 그 자체가 '질'적인 거야. 사람들을 좌절케 하는 것은 돈의 크기. 받을 대가의 액수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불해야 할 액수의 문제라는 점을 명료하게 강조하고 싶네.


셋째, 그러니까 내 말은, 88만 원의 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880만 원, 8,800만 원의 목돈을, 혹은 그보다 더 큰 금액의 목돈을 어서 구해 오라고 청년을 닦달하는 게 문제라는 이야기야.


넷째, 목돈사회의 병폐는 앞으로 주구장창 이야기할 거다. 물론 해결방안도 제안해 볼 작정이야.


다섯째, 목돈게임은 단체전이며 가족동원령이 필수적이지.


여섯째, 목돈게임이 단체전인만큼, 부모를 잘 둔 자식은 목돈게임의 승자야. 목돈사회는 부의 세습을 평화롭게 강화해 주지. 사후 세습이 아니라 평생 세습이라는 점. 반면 가난한 부모를 둔 자식은 연좌하여 포복할 수밖에. 목돈이 없잖니. 우리 사회에서 그게 얼마나 큰 핸드캡인데! 부의 세습을 견제하려는 사람들은 강자에게 어떤 핸디캡을 줄 것인지를 연구해 왔지. 그렇지만 선생, 약자에게 핸디캡을 주는 이 사회의 비정함을 우선 없앨 일이야.


일곱째, 대한민국 청년은 성인이 돼도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기 어렵지. 경제적 독립을 선언하더라도, 아 거참, 은행으로부터 독립하기 어렵네. 자유의지는 꺾이고 용기를 잃지. 목돈에 저당집힌 인간은 나약해잖아. 정치민주화니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너무 멀게만 느껴지네.


 

 

 

 

 






정우성


편집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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