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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mo.jpg공수연대, 신병 교육대

 

 

1998년 2월 5일

 

지중해의 태양은 찬란했다겨울이어야 할 2월의 바람은 여름마냥 따가웠다. 멀리 몽떼신토 산에 쌓인 눈이 어딘가에 겨울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지만, 웃통을 벗어도 좋을 만큼 상큼한 날씨였다.

 

버스는 솔렌자라 공항에서 대원들을 태우고 코르시카 동쪽 해안을 따라 칼비에 이르렀다. 부대 버스를 타고 본대로 들어 가는 길은 멀었다. 지루해서 피곤하기도 했다. 산은 사람이 살기에도 척박해 보였다. 서른 인생을 지배했던 한국의 그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오바뉴에서도 카스텔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닮은 것은 바다뿐이었다지중해를 건너고, 해안을 따라 칼비까지 하루 종일을 이동한 우리는,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고 낙하교육자 숙소에 와서야 하루 여정이 모두 끝났다. 한 잠을 잤을 뿐인데, 깨어보니 부대 연병장 모퉁이의 신병 공수 훈련병 숙소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번 주말은 자유 기상이다. 앞으로 2, 6번의 낙하 이수 후, 공수휘장을 연대장으로부터 수여 받고 3중대에 인계한다. 내일은 전투 식량이 아침이다. 10시에 본다. 질문?"

 

파견병장이 질문을 받았다. 아무것도 아는 것 없는 신병들은 '질문'이란 말에 익숙했지만 질문 던질 게 없는 어리버리 신병인데도 "질문?"을 던지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이 지나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질문 없나?"

 

교관의 날카로운 눈빛이 대원들의 눈을 하나씩 맞추었다. 찰나의 순간에 맞춘 눈길에 나는 군기가 들었다.

 

"오케이! 취침!"

 

외인부대에서 만났던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숙소 앞엔 자갈이 곱게 깔렸다. 저녁 9시인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과 앞의 바다가 어색했다. 나는 혼자 나와 담배를 태웠다.

 

동료들이 있었지만 외로웠다. 익숙한 외로움이었다. 오히려 자유롭다 느끼기도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새로운 환경에서 명령이 이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4개월의 교육이 만든 명령체계가 놀라웠다. 의식하지 않았고, 오히려 온 몸으로 거부한 듯 했지만, 내 몸에 최적화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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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외인공수연대 낙하장과 칼비, 몽떼신토 산맥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아침

 

병풍처럼 둘러 쌓인 산맥에 쌓인 눈과 칼비 만이 내 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경상도 시골 촌놈이 이 먼 곳까지 와서 만나는 첫 풍경들은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물론, 앞으로도 신비로울 터였다.

 

주말을 맞이한 병영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철망 저편으로 보이는 낙하 존의 풀들이 곱게 자랐고 형형색색의 꽃이 넓게 퍼져 있었다. 낙하 존을 내려다 보는 망루에 선 보초의 실루엣이 얼쩡거렸다. 주말인데도 낙하 존 안에서 자유낙하를 하는 모양이었다. 민간 복장을 한 사람들과 부대 체육복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공수교육을 받는 신병들의 숙소가 바로 근처였다.

 

15명의 우리 팀엔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St-Syr; 쌍씨르, 쌍 씨리앙(St-Syrien, 육사출신)) 출신의 소위가 공수교육을 받으러 이관되었다. 이름이 꼬냑이었다. 꼬냑은 공수 교육만 끝내면 우리와 다른 길을 갈 것이지만 어린 태가 묻어났다.

 

우리는 조교의 지시에 따라 가슴에 공수 휘장을 다는 바느질과 공수연대에서 필요한 작업을 하며 내무반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바느질을 하는 건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서로서로 신경을 써가며 매단 휘장을 검사 맞고 쉬는 중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 오는 빛을 받으며 낮잠을 자기 딱 좋을 시간에 파견 병장이 적막을 깼다.

 

" ! 면회!"

 

밖으로 나가보니 효도가 거기 서 있었다.

 

97년 여름 휴가 때 파리에서 만나 여러 날을 같이 보내고 의기 투합했던 동향의 동생이었다. 효도는 고지식해 보이긴 했지만 순박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언행에 묻어났다. 낯선 곳에서 동향 사람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서로의 안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부러 나를 반겨 찾아주니 감동으로 다가왔다.

 

"저기 저 언덕에 하얀색 물탱크 보이죠?"

 

담배를 태우며, 사소한 얘기를 나누다가 효도가 가리킨 곳은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 시내와 거의 맞닿은 곳에 위치한 물탱크였다. 얼핏 보아도 꽤 높았다.

 

"내일 아침에 저기까지 구보합니다."

 

효도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그래서 뭐?"

 

하고 내가 되물었다.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어 안 쪼네? 저기 밑에 도착하면 물탱크까지 5백 미터쯤 되는데 자유 구보거든요? 저 끝까지 올라가는 대원이 없습니다. 파이팅!"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숨어 있을 비밀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보다 2개월을 앞서 갔던 교육대 후배, ‘도 찾아왔다.

 

"이야~ 인기 많았나 보네 선배,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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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수 뒤의 동료들, 독일인과 프렌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휴가를 받고 탈영(비원대복귀)했다.

 

 

공수 훈련

 

효도의 요청으로 조교에게 허가를 받고 바로 근처의 고공 낙하 클럽을 돌아보니 긴 것만 같던 휴일은 흔적도 없이 가버리고 월요일 아침이 됐다. 교관의 낙하 교육 일정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이 끝나고 구보를 시작했다. 효도가 얘기한 대로 물탱크 방향을 향해 거의 전력 질주를 하는 속도가 전에 없이 빨랐다.

 

얼마 달리지 않았음에도 지금까지 구보가 장난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효도가 말한 물탱크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내가 힘들면 모두가 힘들기 마련, 각오를 하고 초입에 들어서자 교관은 시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싱겁긴, 장난은'. 효도가 긴장하라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부대로 돌아오던 길에, 나는 왼쪽 무릎에 짜릿한 이상을 느끼고 속도가 줄었다. 조금씩 앞서가는 팀들과 조교에게 말도 못하고 점점 멀어졌다. 조교에게 보고도 하기 전에 그들은 사라져버리고 나는 구보 코스에서 벗어나 다리를 절룩거렸다. 왼쪽다리를 구부릴 수 없었다. 지나가는 헌병 차가 확인을 했지만 내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가는 모습을 보고 상황 파악 없이 지나가버렸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교육대 앞에 도착하자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있었나!"

 

"다리가..."

 

"의무대 가봐! 조교, 의무대 동행해!"

 

의무대 물리치료사는 외인부대 출신이 아닌 민간인, (아마도) 의대를 다니는 9개월 의무병이었다. 무릎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외관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제는 없었다. 무릎 바깥 쪽에서 안쪽까지 긴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수 없었다. 부주의하게 의무장교가 무릎을 만지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렀다. 희한한 일이었다. 의무장교는 3일간의 입원을 시켰다. 외관상 아무런 지장도 없이 졸지에 교육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의무대에서 지내는 신세가 우스웠다.

 

의무대에는 <붉은 멧돼지 3> 훈련을 마친 2중대원들이 동상 때문에 몰려왔다. 발에 붕대를 감고 심지어 목발을 짚고 있는 대원도 있었다. 눈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훈련을 했길래 저 지경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예상치 않은 의무대 생활로 생긴 여유는 어색했지만 걱정 없이 3일을 즐기기로 하고 입원한 다른 동료들과 어울리기로 했다. 몇 중대인지, 계급이 뭔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서로의 불어 실력을 보고 짬밥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러시아 출신이 내 국적을 묻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북한군 얘기를 했다. 조그맣고 다부진 북한군들이 러시아 군대에 와서 살인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는 무척 심각했다.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뛰어난데도 작은 체격 때문에 그들을 무시했던 러시아 스패츠나츠 부대원들이 혼쭐 났다는 얘기를 하는 그는 공포에 질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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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외인공수연대 공수교

 

 

무릎 통증은 사라졌다

 

교육대 마지막 8km 전투 구보 때 한 번 장딴지가 무거워지고 단단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사라졌다. 이번엔 장딴지가 뜨거워지고 단단해지면서 동시에 무릎을 찌르는 통증까지 생겼지만, 그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육대에 복귀한 나는 구보 없이 낙하 훈련만 받았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뛰어야 하는 일이라 통증은 재발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믿을 건 몸 밖에 없는데 갑자기 찾아 온 불안해졌다. 동료들은 식당까지 구보 형식으로 뛰어갔다나는 이동하는 무리에서 열외되어 걸어갔다.

 

꼬냑 소위도 무릎 부상으로 교육이 연기되었다며 분통해 했다.

 

나는 그 이후로 일체의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고서 교육대 그림을 그리게 했을 뿐, 구보나 육체적인 과업에서 나를 제외시켰다. 그냥 낙하만 시킬 예정으로 보였다. 시간이 지나 점점 괜찮아 졌다가 다시 이상 증세가 생겼다. 그간 내 교육대 생활이나 근무 형태로 보아 연대에서 내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다음 기수로 밀려났다.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 다른 숙소를 사용했다.

 

혼자가 되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고 점호를 하지도 않았다. 연대는 내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이 상황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기수가 와서도 나는 적응을 하지 못했다. 네 명이나 있던 한국인 중 공수연대로 온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4중대로 예정된 신병들이었다. 인원은 비슷했고 나는 훈련 참가 없이 기본적인 교육만 받았지만 결국 다시 밀려났다. 갑자기 생긴 여유와 이해할 수 없는 난관에 혼란스러웠다. 

 

"조교가 선배 괜찮은 거 같은데 일부러 아픈 척 하는 것 같대요."

 

"이해는 나도 못해. 내 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면 안되지!"

 

내 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들려오진 않았지만 들리는 얘기로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다. 잔인했다. 정작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잃지 않았다. 나는 신병 낙하 교육대에서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침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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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외인공수연대의 복지시설과 복지

 

 

카메룬 축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새로 들어오는 공수 신병 교육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중대도 행정중대를 썼다. 교육대 생활을 한 지도 3개월이 되어 가고 있었다. 외인부대 최고의 축제인 카메룬 데이를 맞았다. 전 연대는 서비스 중대를 제외하고 모두 14km 크로스컨트리에 참여했다. 1개월 가까이 스포츠에서 열외 되었던 나도 포함해서 경기에 참여했다. 오랜 시간 동안 무릎을 쓰지 않은 탓인지 무릎에 무리 없이 천천히 뛰는 코스가 좋았다. 연대장 퓌가도 오만상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고 뛰는 모습을 발견하고 서로 곁눈질을 했다.

 

사고 없이 무사히 경기를 마친 나는 중대장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중대 준위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었지만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중대장이 공수부대에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어느 순간부터 하나도 없었다. 며칠 전, 의무대 대위는 내 앞에 공수휘장을 내어 보이며 "이 자랑스러운 휘장을 갖고 싶지 않느냐?"고 강변했지만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체념하고 있었다.

 

우울한 카메룬 데이에 중대 내무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침 크로스경기를 끝낸 전 연대원들이 연병장 행진을 하는지 행정중대 쪽으로 집결을 하고 있었다. 카메룬 데이 연대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내・외빈을 초대한 최대의 행사였다. 중대배치를 받기도 전에 저들과 함께 섞여 있지 못하는 신세가 처량했다. 행사가 모두 끝나자 친구가 찾아왔다.

 

"이 옷 입어"

 

해변에 나갈 때 입는 옷이라 했다.

 

"네 맘 안다. 신병 교육대에서 이름 날려도 근무 기간은 길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널 위해 어떻게 하면 시내 구경을 시켜줄 수 있을까 별의 별 생각을 다 해 봤는데 이 방법 밖에 없더라."

 

파리에 도착해서 지원 입대하기 전, 호텔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남해가 고향이라던 상완이었다. 같이 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를 알아 서로 친구 먹기로 한 사이였지만 들은 얘기로는 살아 온 인생이 너무 다른 친구였다. 언제나 취해 있는 듯한 얼굴에 게슴츠레한 인상이었고 무뚝뚝했지만 술이 좀 들어가면 흥겨워지면서 말이 많아지는 친구였다.

 

붉은 멧돼지3’ 훈련에서 트럭을 타고 돌아올 때 넋이 나가 있는 모습을 보고 교육대가 떠나 가도록 고함을 질러 이름을 부르자, 상념에서 빠져 나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던 첫 만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기 내무반에 불러 한국 음식으로 요리도 해주고 중대 클럽에서 맥주도 사주며 다른 중대 한국 사람들도 소개시켜 주던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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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 해변에서의 망중한

 

상완이를 보고 느낀 건 고지식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되면 고지식하게 가르치려고 들었는데도 그러한 약점을 자신의 장점으로 바꾸어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있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서로 동일 인물을 친구로 알고 있다는 것 이외에 서로 닮은 구석이 없으면서도 이 경사스러운 날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를 찾아와 준 그에게 감동하고 있었다.

 

카메룬 데이의 칼비 해변은 한가했다. 우리는 말 없이 해변가를 걷다가 맥주 집에 들렀다.

 

"사람들 수군거리는 얘기 신경 쓰지 마라. 그리 사는 사람들이다."

 

"한국인 중에 연대 앞에 나가 상 받은 사람 여태 너 밖에 없었는데 너한테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노! 어쩜 네가 자만하지 말고 더 배우라고 그랬을 수도 있으니 겸손하게 받아들이라."

 

사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든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 용서나 이해, 상대하지 말라거나 맞서서 서로 진흙탕 싸움하지 말라는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길을 가서 성공하고 아량을 베풀라는 뜻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다. 부처 같은 상완의 말을 이해하기엔 너무 속세의 삶을 살아서였을까, 당시엔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말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해변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캠프로 돌아가자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오후 네 시인데도 각 중대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아직 중대 배치를 받지 못한 나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상완이 이끄는 대로 각 중대별로 돌아다니며 준비해 둔 뱅쇼(Vin Chaud: 각종 과일을 와인에 넣어 끓여 마시는 것)를 맛보며 같이 축제를 즐겼다. 중대장 이하, 각 중대의 장교들이 사병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크리스마스보다 더 큰 축제였다.

 

외인부대는 존재 이유를, 숱한 전쟁과 전투 중 1900년대도 아닌 1863년에 멕시코 카메룬이란 곳에서 4 30일에 일어난 전투에 두었다. 실제로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식민지가 시작되면서 식민지배를 위한 용병으로 만들어진 군대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수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샤를 10세가 쫓겨나고 시민 왕이라 불린, 루이필립이 왕위에 올랐던 시대, 전세계는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촉각을 세우며 왕정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왕정과 공화정을 동시에 유지하며 프랑스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 3세 시대, 멕시코를 다스리기 위해 외인부대를 파견했다. 그들 중 한 개 중대, 당주 대위가 이끄는 62명의 외인부대원이, 2.000명의 멕시코군과 하루 동안 전투를 펼쳐 외인부대원 40명 전사, 17명 부상, 멕시코군, 800기병 포함, 190명이 사망하고 300명이 부상 당한 전투를 치뤘다.

 

전멸을 각오하고 결사 항전하자 멕시코 장교가 협상을 제의, 병사와 무기를 포함하여 모든 장비와 깃발까지 회수하고 후송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종결, 외인부대 명예헌장의 주요 항목인 "너의 부상도, 무기도, 목숨도 포기하지 않는다"의 모티브가 된 전투였다.

 

카메룬 축제에는 미스 케피블랑도 뽑았다. 참가하고 싶은 부대원들의 애인이나 아내, 누이가 참여했다. 당시 미스케피엔 유명 여배우도 참여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어쩌다 내 친구도 그녀와 사진을 찍었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카메룬 축제 때는 민간인도 영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가족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개방해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었고 내무반을 포함한 연대의 모든 시설을 민간인들이 구경할 수 있었다.

 

상완과 효도도 같이 돌아가며 파티에 젖어 들었다. 다른 대원들은 모두 전투복에 행군을 끝낸 휘장들을 모두 착용했는데 혼자 체육복을 입고 다니니 중대장이 와서 물었다.

 

"프로모(Promo ;공수 교육대)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몽 깨삐땐!"

 

효도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중대장은 다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효도가 다시 "무릎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몽 깨삐땐" 하고 대답했다.

 

"! 넌 준의 대변인이야?"

 

라고 말하자 모두들 웃었다.

 

다른 중대에서는 술을 거나하게 마신 병장이 중대장을 유도로 패대기를 쳐도 축제라 용서가 되었다.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도 용서되는,밤새도록 음악이 지배하는 축제는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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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케피 선발, 2012 Frédéric Pé

 

 

5제대를 하러 가는 공수부대원들에 섞여 유람선을 타고 니스를 거쳐 오바뉴 사령부 행정중대에 재배치를 받고 첫 휴가를 받았다. 벌써, 9개월이 지났고 본토에 있는 제2외인보병연대로 발령을 받은 뒤의 첫 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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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애묘, 40대를 위한 딴지미팅 목적으로 가입! 2018년 초 2개월간 탈퇴 후 재가입. 딴지 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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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자주 출몰.
50 넘겨 꿈과 희망 잃은 독거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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