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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한국에서 날아온 도전장

 

지난 11월16일 밤. 딴지일보 편집부에서 전자메일이 하나 날아왔습니다.

 

“오늘 수능(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통일시험 같은 거?)이 치러졌는데 제2외국어 과목인 일본어를 풀어보실래요?”

 

'수능'이라고 하면 지각한 수험생을 경찰이 긴급수송해주고, 항공기 이착륙에도 영향을 미치는 한국의 국민행사로 알고 있는데, 설마 필자가 수능 문제를 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재미삼아 풀어볼까 싶었다가 잠깐… 이거 결례 아냐? 아무래도 필자는 40년 넘게 일본어를 모국어로 한 경험치가 있는 데다 태어났을 때부터 동네에서 신동(神童 ; 재주가 남달리 뛰어난 아이) 소리를 계속 들어왔고, 그런 아이가 배움의 매력에 각성, 타고난 재능에다 공부라는 스파이스가 가해짐으로써 교양과 지성을 형성한 게 바로 필자입니다. 이런 필자에게 맙소사, 대학수험생이 풀어야 하는 일어 시험을 풀어보라고?

 

…우롱당했다 해서 바로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예의라는 관념이 없는 편집부와 똑같은 수준에 떨어지겠다. 이제 원어민의 자존심을 걸고, 압도적 실력을 과시해서 편집부의 더 이상 없는 결례를 당당히 격파해주겠다. 마음을 먹고 시험지를 출력하며 필자가 진지한 생각을 할 때 쓰는 “승부 볼펜”을 준비했습니다(일본에선 아주 중요한 타이밍에 쓰는 물건을 “승부 ○○”라고 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꼭 매는 넥타이를 “승부 넥타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슬슬 그렇게 될 타이밍인데 싶을 때에 입는 속옷이나 팬티를 “승부 속옷/팬티”라 부르는 등등). 시험시간이 40분이라고? 흐흐… 20분이면 충분하겠지 뭐… 타이머까지 세팅 완료. 원어민 프라이드를 증명하는 고독한 싸움이 시작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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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실제 수능시험과 비슷한 40분으로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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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어민의 실력을 보여줄 것이다!!

 

 

1. 40분? 너무 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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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1번은 스커트, 택시, 라멘을 각각 카타카나로 적을 수 있으면 바로 풀 수 있습니다. “スカート(스커트)”, “タクシー(택시)”, “ラーメン(라멘)”이지요. 원어민인 필자에게는 순살(뼈가 없는 치킨 아니라, 한 순간에 죽일 수 있다는 뜻. 한자로 “瞬殺”라고 씀)문제입니다. 히라가나, 카타카나의 정확한 이해는 기본이다, 이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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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2번은 기본 어휘 표기를 묻는 문제. 순간 선택지 4번 “新らしい”가 옳은 줄 알았지만, 5번 “いっしょうけんめい(잇쇼우켄메이, 열심히)” 이게 옳은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新らしい”는 틀린 것으로 판단했지요(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새로운”이라는 의미의 “あたらしい”는 “新しい”가 옳다네요). 한자를 섞어서 동사나 형용사를 쓸 때 한자 뒤에 따르는 히라가나를 “요미가나(読み仮名)”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어민도 종종 헷갈리는 부분입니다(뭘 말하고 싶냐면 필자가 특별히 무식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코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선택지 4번 “いっしょうけんめい(잇쇼우켄메이)”를 한자로 쓰면 “一生懸命”가 되는데 “いっしょけんめい(잇쇼켄메이)”라는 말도 있어요. 한자로 “一所懸命”라고 쓰지요.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둘 다 “엄청 열심히” 정도의 뜻이에요.

 

하여튼 이 문제는 기본 어휘를 정확히 표기(따라서 발음도)할 수 있어야 풀 수 있겠습니다. 티나는 것이 무서워 말하기를 꺼리는 것도 실력 향상을 막는 요인이지만 그렇다 해서 기본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특히 장음과 단음의 구별(자주 거론되는 예로 “ビル(비루, 빌딩)”와 “ビール(비-루, 맥주)”가 있지요)이나 청음, 탁음, 반탁음의 구별(예를 들어 “味(あじ, 아지, 맛)”와 “足(あし, 아시, 발)”)은 글씨와 함께 외워야 오히려 쉬울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제 2번은 기본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케 해주는 좋은 문제라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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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3번 역시 좋은 문제입니다. 기본적인 한자의 읽는 법을 묻는 건데, 소홀하게 공부해온 수험생을 가려내려는 성실함이 느껴지더라고요. 물론 일본의 한자검정시험 준2급이라는 초고난도 시험에 붙은 필자에게는 쉬워도 너무 쉬운 문제입니다. 그래도 일본어 실력을 측정하는 문제로서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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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4번, 5번은 기본적인 어휘를 묻는 문제네요. 4번은 부사에 대한 지식이 포인트인데 빈칸 뒤에 나오는 부정어 “…ない(없다, 않다)”와 호응하는 “ぜんぜん(전혀)”를 선택하면 좋지요. 다른 선택지인 “かならず(꼭, 반드시)”, “そろそろ(슬슬)”, “ちょうど(딱)”, “はっきり(확실히, 뚜렷이)”도 자주 쓰이는 어휘이므로 꼭 알아두게 하고 싶은 거겠지요. 문제 5번은 “口をだす”라는 관용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쉽게 풀 수 있지요. 말을 그대로 풀면 “입을 내밀다” 정도가 될 텐데 뜻은 “간섭해온다” 정도이지요. 이것도 좋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출발부터 이렇게 감탄하면서 간단한 독해 문제나 대화 완성 문제 등 다양한 형식의 문제를 쭉 풀어간 필자. 솔직히 문제지를 보기 전에는 더 어려운 문제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네요. 다 풀고 나서 타이머를 멈췄더니 19분40초 남았었지요. 펜을 내놓고서 "흐, 내가 진지하게 풀면 이 정도야..." 중얼거리며, 뇌리에 “여유”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지요. 당초 원어민의 프라이드 운운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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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채점

 

채점할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말도 안 되게 간단한 문제를 풀게 해서 소중한 시간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굴욕감까지 느끼게 한 편집부에게 철저히 필자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역시 채점까지 해서 확실하게 만점(50점)을 땄다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현지 경험 40여 년. 그동안 추상적인 내용으로 가득찬 어려운 책을 수면제로 쓰기는커녕 즐겁게 읽어온 필자입니다. 이 실력을 지금 편집부에 확실히 보여주고 앞으로는 이런 결례가 없도록 엄중히 주의를 촉구해야 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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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2페이지(총 4페이지)에 있는 문제 15번까지는 순조롭게 맞았는데, 문제 16번의 정답이 4번이라는 겁니다. 어? 3번이 정답 아냐? 문제번호를 잘못 봤나? 싶었더니 아닙니다. 문제 16번의 정답은 틀림없이 4번인 겁니다. 아~ 문제가 잘못됐나 싶어 확인하려고 검토를 해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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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 가족의 공원 입장료를 묻는 문제. 입장료는 어른 1인 당 1,000엔이고 어린이 1인 당 500엔. 다만 3살 이하는 무료입니다. 문제에 나온 식구는 어른 2명과 어린이 2명이고 그 중 한 명이 2살 아기. 그럼 1,000엔 곱하기 2에다 어린이 1인, 즉 500엔만 더하면 되겠네… 그럼 1,500엔이지? 맞잖아~ 1,500엔!! 응? 잠깐만... 어른 두 명 입장료만으로도 2,000엔인데? 응...? 설마 초등학생 시절 나를 죽도록 괴롭힌 산수가 이제와서 새삼 발목을 잡을 줄은... 그냥 필자의 기초 계산력이 모자라서 나온 실수. 정답은 선택지 4번. 2,500엔이었습니다. 여기서 2,500은 “にせんごひゃく(니센고햐쿠)”. 순간 “이게 일본어 시험이라고? 웃기지 마!!”를 외칠 뻔했는데 일단 '일본어 능력에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셀프 설명(≠핑계)을 하며 채점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나온 문제 19번. 미호 씨와 엄마의 짧은 대화를 읽고, 미호 씨가 앞으로 할 행동의 순서를 묻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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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미호 씨가 쉬는 날이라 엄마를 도와주려고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는데, 맙소사 엄마가 “그러기 전에” 무슨 상자를 옮겨 달라고 미호 씨한테 부탁을 했던 겁니다. 필자는 이 “그러기 전에”를 놓쳤던 겁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필자의 일본어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필자는 돼지띠입니다. 일본에서는 “猪(いのしし, 이노시시)”, 즉 멧돼지입니다. 멧돼지는 한 번 목표를 정해서 달리기 시작하면 한눈팔지 않고 목표로 향해 쭉 달려가지요(“猪突猛進”라는 일본어 관용구가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나는 설거지를 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문제에 나온 미호 씨는 달랐던 거지요. 엄마의 “그러기 전에” 상자를 옮겨 달라는 말에 유유낙낙 “알았어”라고 대답을 했었던 거지요. 멧돼지인 필자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 일본어 능력이라기 보다 필자의 성격상 대화내용을 현실감 있게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실수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더 정확히 말하면 출제 내용과 필자의 성격이 안 어울렸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백번 양보해서 실수로 인정합니다).

 

일부 적절치 못한 문제가 있어 만점은 못 따게 되었지만 더 이상의 실점은 없을 겁니다. 응… 47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단 일본어 능력에 의심을 일으키는 점수는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문제인 30번에 동그라미를 그리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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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3번인데 필자가 선택한 건 5번. 엣? 하? 응? 이거 뭐야!? “문장 표현이 옳은 것을 모두 고르세여”라는 문제. 이 문제를 틀렸다면 핑계할 틈 하나도 없이 일본어 능력에 문제가 있단 말이잖아! 안 돼, 어디 일본어 능력과 상관이 없는, 산수나 성격, 하여튼 틀린 이유를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돼… 초조해봤자 허탈감만 느껴지는 30번 문제입니다.

 

하지만 더 큰, 근본적인 문제는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봐도 아직까지 왜 틀렸는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필자는 “父が出かけているあいだ、鈴木さんがあいさつに来た。(아버지가 외출하고 있는 사이 스즈키 씨가 인사를 하러 왔다)”라는 문장을 옳다고 판단했는데 정답에선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디가 틀렸는지 아직 못 찾고 있습니다.

 

결국 필자의 수능 일본어는 45점. 내년에는 만점을 따겠다는 결의를 굳게 한 바입니다.

 

 

3. 논평을 하려다 반성회로 바뀌어…

 

아무도 위로의 말을 걸어 주지 않아 고독하게 패배감을 안고 있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약은 맥주입니다. 일단 맥주를 마시며 냉정함을 되찾고 홀로 반성회를 개최했지요.

 

우선 공원 입장료 합산 문제는 평소 계산기에 의존하는 생활습관을 근본적인 실수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1,000 곱하기 2, 더하기 500은 1,500이 아니라 2,500입니다. 내년 수능에 대비해서 가능한 남은 기간은 계산기에 기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행동순서 문제. 멧돼지처럼 목표를 향해 한눈팔지 않는 것도 때로는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때그때 사정에 맞춰서 유난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도 문명사회에서 사는 인간으로서 중요하다는 점을 이번 수능이 가르쳐준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그러기 전에”를 놓치지 않게 미리 행동순서를 확인하고 움직이도록 해야겠습니다.

 

마지막 옳은 문장 고르기 만큼은 아직도 어떻게 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필자가 옳은 일본어를 못 쓰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얼핏 생각난 게 “鈴木さん(스즈키 씨)”의 동작에 대해 높임말을 안 썼기 때문에 틀린 게 아닌가 싶은데 문맥이 없는 상황에서 반드시 스즈키 씨를 높여서 부를 개연성을 찾지 못해서 장담하기는 좀 그렇지요. 아마 실력이 높은 수험생 중에도 필자와 똑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이리저리 돌발사고가 있기는 있었지만 이번에 필자가 도전한 시험은 전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추측컨대 문제제작자는 만만찮은 일본어 실력을 갖춘 일본어 교육 전문가가 아닌가 싶네요. 특히 위에서도 언급한 문제 2번부터 5번까지는 일본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거든요. 기본이자 도달점이라 할까, 어려운 문법이나 독해 문제를 풀어도 이런 부분에 소홀하면 결코 그 사람은 “일본어를 잘 한다”는 평가를 받지 못할 겁니다. 물론 수능은 시험이고, 시험인 이상 점수를 따기 위한 기술도 중요하겠지요. 그래도 이런 부분을 바보처럼 성실하게 배우면 나중에 엄청 잘하게 되리라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필자가 평소 이렇게 성실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가 자문해보니 얼굴이 빨개지더라고요).

 

눈에 띈 건 독해 문제가 상당수 있는 데도 정치나 경제 같은 딱딱한 화제는 없고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내용이 많았다는 점이지요. 이것은 동시에 말투 면에서도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부드러운 어휘가 중심이라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또한 다른 유형의 문제에 있어서도 대화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에 대한 지식을 묻는 것이 많은 인상. 전체적으로 대화 위주의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필자가 수험생이었다면 어렵게 느꼈을 문제를 몇 개 들어보면, 우선 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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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선택지 4번 “見ているだけです(그냥 구경하고 있어요)”인데 실은 선택지 2번 “何もありません(아무 것도 없어요)”과 3번 “見てばかりいます(자꾸 보기만 하고 있습니다)”를 정답으로 생각한 수험생도 꽤 있을 겁니다. 특히 선택지 2번은 그냥 붙임성이 없는 직선적인 대답이라 뜻 자체는 충분히 전달될 겁니다. 하지만 정답이자 선택지 4번 “見ているだけです(그냥 구경하고 있어요)”이 거의 관용구처럼 쓰이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선택지 3번 “見てばかりいます”는 뉘앙스상 “자꾸 보기만 하고 있어요” 정도이므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필자가 흥미롭게 본 문제는 13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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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으로 '히로시마식 오꼬노미야끼를 한번 먹어 보고 싶다'는 표현을 고르면 됩니다. 그래서 선택지 5번을 고른 수험생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선택지 5번 “前から食べたがっているんだ”는 “전부터 먹고 싶어 하고 있는 거야”라는 느낌으로 제3자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 먹고 싶다는 내용을 나타내려면 “…たい(~고 싶다)”를 쓰는 선택지 2번을 골라야 되지요.

 

이어지는 문제 14번 역시 수험생이 헷갈리기 쉬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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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삿말에 대한 지식을 묻는 건데 정답은 선택지 4번 “おじゃまします(실례합니다)”입니다. 남 집에 들어갈 때에 쓰이는 관용구지요. 한편 선택지 5번 “ごめんください”는 남의 집이나 가게에서 주인이나 가족, 직원 등을 부를 때에 하는 말이지요. 한국어로 치면 “계세요~?” 정도 될까요.

 

하나 더 필자가 재미있게 본 문제 22번, 대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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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픈 아키(あき)에게 하루(はる)가 위로의 말을 건넨 것에 대해 아키가 감사하며 “そうする(그렇게 할게)”라고 대답했다는 설정 하에, 하루가 했을 말로 적절한 것을 다 뽑으라는 것.

 

보기는 “a. 少し休んだら(좀 쉬면 어때)?” “b. 力だしたほうがいいよ(힘내는 게 좋겠어)”, “c. はやく元気になるといいね(빨리 나았으면 좋겠네)” 3개인데 그 중 적절한 것은 a뿐입니다. 보기 b를 기계적으로 바꾸면 “力を出す(힘을 내다)” 정도가 되는데 일본어로 “力を出す”라고 하면 실력을 발휘한다는 뉘앙스가 세지요. 보기 c는 아키가 “그렇게 할게”라고 대답하는 것을 감안하면 어색합니다. 원어민한테는 아무 것도 아닌 문제이지만 표현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풀기 쉽지 않아보입니다. 각각의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일본어를 이해하는 습관(이런 번역 방식을 “축어역(逐語譯)”이라고도 부르죠)이 있으면 “빨리 낫게 되면 좋네(보기 c)” - “그래, 고마워. 그럴 거야” 정도의 정상적인 대화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기 c도 적절한 것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은 셈이지요. 한국어에 “그렇다”라는 형용사와 “그러다”는 동사의 실제 쓰임새가 아주 유사한 바, 이 문제에서는 아키의 응답 “そうする(그렇게 할게)”가 동사임을 제대로 파악하느냐가 포인트입니다. 단어 단위로만 공부하는 함정에 빠져버린 수험생을 떨어뜨릴 좋은 문제라 하겠습니다.

 

수능 일본어 문제를 풀어보면서 또 하나 재미있게라기보다 약간 충격을 받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문제 6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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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정답을 추리려면 일본의 지명이나 문화를 어느 정도 알아야 되는 것 같습니다. “東京の _______ は(도쿄의 ___는)”로 시작되는 짧은 문장을 읽고 빈칸에 들어가는 축제 이름을 골라야 되니까요. 선택지는 1번 “ゆき祭り(눈 축제)”, 2번 “かんだ祭り(칸다 축제)”, 3번 “ぎおん祭り(기온 축제)”, 4번 “たなばた祭り(타나바타 축제)”, 5번 “てんじん祭り(텐진 축제)”입니다. 일단 문제의 설정상 해당 축제가 5월에 치러진다고 하니 아마도 “눈 축제”로 보이는 선택지 1번은 쉽게 제할 수 있지요. 그런데 나머지 선택지를 제하는 게 되게 어렵습니다.

 

먼저 선택지 4번 “たなばた祭り”는 한자로 쓰면 “七夕祭り”가 되는데, 한국에서는 아마 '칠석'일 겁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양력 7월에 치러지는 거지요. 이것은 언어에 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일본 문화에 대한 것이라서 이 선택지를 바로 제하지 못한 수험생이 있었을 겁니다. 한편 선택지 2번의 칸다, 3번의 기온, 5번의 텐진은 한자로 쓰면 아마 각각 神田, 祇園, 天神이 되는데 이게 다 지명인 겁니다. 그 중 도쿄에 있는 지명은 '칸다(神田)'밖에 없기 때문에 정답은 선택지 2번이다… 이런 식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요. 이건 지명에 대한 지식을 묻는 것이어서 언어 시험 문제로서 어떨까라는 게 솔직한 소감이지요. 혹시나 지명을 몰라도 정답을 끌어내는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고요.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필자가 틀린 문제 30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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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던 문제지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만한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왜 “父が出かけているあいだ 鈴木さんがあいさつに来た。(아버지가 외출하고 있는 사이 스즈키 씨가 인사를 하러 왔다)”가 틀린 건지. 여기까지 쓰고 혹시나 싶어서 검색창에 “間(あいだ, 아이다, ~한 사이)” 문법을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일본어능력시험(JLPT) 대비용 홈페이지가 떴고 거기에 “…間(あいだ)”를 사용한 예문이 쭉 있었습니다. 보니까 “…あいだ”라는 표현은 뭔가를 하는 동안 “계속”이라는 뜻이 있나 봐요. 예를 들어 “家にいる間、ずっと本を読んでいた(집에 있는 동안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라든가 “子どもが小さい間は、動物を飼わないつもりです(아이가 다 클 때까지는 동물을 키우지 않을 생각입니다)” 등등 어떤 시간적 범위를 나타내면서 '그동안에는 빈틈 없이 계속'이라는 함의가 있다는 것이 “…あいだ”의 정확한 의미인 거죠.

 

이것을 전제하면 문제 30번의 보기 c의 “父が出かけているあいだ 鈴木さんがあいさつに来た”는 이상한 문장이 되지요. 아버지가 외출하는 동안 스즈키 씨가 “계속(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인사하러 왔다는 뜻이 돼버리니까요(작은 소리로 고백하면 원어민 프라이드는 이제 완전히 산산조각났지요).

 

 

4. 수험생에게 조언, 아니면 내가 한국어를 배우다 새삼 느낀 반성점

 

마지막으로 수능 일본어를 풀어보고 알게 된 대비방안을 제시하며 마무리합시다. 물론 아래에서 말하는 내용은 수능 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배울 때 늘 신경써야 되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일본어를 배우는 일반인 분들한테도 참고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외국어로서 한국어를 배우는 필자한테 좋은 자기반성이 됩니다. 그래서 조언이라기 보다 반성점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반성점 ① ~기초는 완벽해야 된다~

 

먼저 내가 습득하려고 하는 언어(수능 일본어를 푸는 수험생한테는 일본어, 필자한테는 한국어)의 기초를 절대 가볍게 보면 안 된다고 하고 싶습니다. 정확한 발음과 표기, 기본적 문법사항(특히 조사의 쓰임새나 동사, 형용사의 변화 등)을 쓸 때 조금이라도 모르겠다면 그때그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위에도 언급했듯이 일본어는 장음과 단음(에 ; ビール / ビル), 청음・탁음・반탁음(예 ; ひ / び / ぴ)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한자도 귀찮아하지 말고 꼼꼼히 외워두면, 장차 일본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오를 겁니다.

 

 

반성점 ② ~기본적 관용구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이번 수능 문제도 그렇지만 관용구가 어떤 장면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 지를 묻는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본어 ○○는 한국어로 치면 □□가 되겠네”라고 1대1로 외워버리는 건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일단은 많이 맞는 게 사실이지만) 한국에서는 A, B, C 모든 장면에서 쓸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A라는 장면에서만 쓸 수 있는 말도 있습니다(물론 그 반대도). 예를 들어 “おはようございます(오하요우 고자이마스)”는 일단 “안녕하세요”랑 거의 비슷하게 쓰이는 인삿말이기는 한데 (1)아침에 주고 받는 일반적 인삿말, (2)직장 등 일하는 곳에서 처음에 만날 때에 하는 인삿말입니다. 쓸 수 있는 상황이 “안녕하세요”보다 좁지요. 너무나 단순한 1대1 대응 방식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반성점 ③ ~문법을 얕보면 다친다~

 

이번 수능 일본어에는 문법사항을 직접 묻는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사(書(か)く(쓰다), 話(はな)す(말하다) 등 기본형이 ウ段(우단)으로 끝나는 것)나 い형용사(기본형이 “い”로 끝나는 형용사. 美(うつく)しい(아름다운), 高(たか)い(높은, 비싼)등), な형용사(기본형이 “な”로 끝나는 형용사. 綺麗(きれい)な(예쁜, 깨끗한), 静(しず)かな(조용한) 등. 일본에서는 “형용동사”라고 부름), 즉 용언의 변화(이 현상을 “활용(活用)”이라고 부르기도 하죠)는 일본어 학습의 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언제 정면으로 물어올지 모르겠는 중요사항이라 하겠습니다. 위 ①에서 언급한 내용과 함께 일본어 습득의 기초를 이루는 내용이기도 하니 철저히 연습할 필요가 있지요.

 

특히 동사는 변화(활용)의 종류가 많고 그 중에는 발음과도 관련된 문제가 있어서 문제 작성자 입장에서 보면 꼭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지요. 거꾸로 말하면 이 용언 활용을 극복하면 어느 정도 (사전을 찾으면서라도) 일본어로 된 정보의 뜻을 풀 수 있습니다. 용언의 활용을 초급자와 중급자의 분수령으로 삼아 학습해도 될 것 같아요.

 

 

반성점 ④ ~시험을 넘어서~

 

수능에서 제2외국어 과목으로 일본어를 선택한 수험생 중에 앞으로 일본어 공부를 더 깊게 해서 JLPT를 비롯한 일본어 관련 시험을 보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번 수능 시험을 본 필자가 그랬듯이 시험 문제로 나오는 내용 중에는 원어민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문법 사항이 있고, 높은 점수를 따려면 그런 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알아야 되는 실상이지요(이런 사정은 한국어도 마찬가지겠지만요).

 

그런데 말이에요. 언어가 문법서에서 설명하는 대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죠.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쓸 때에도 의미가 전달된다는 선만 지키면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합니다. 따라서 일본어 실력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종전 교재로 배웠던 내용과 어긋나는 표현이 오가는 장면을 접하게 될 겁니다. 그럴 때 그런 틀린 표현을 무조건 거부해버리면 언제까지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구사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비속어도 포함에서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일본어를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에 큰 함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일본어를 알면 알수록 일어 실력이 높다”는 것은 '그 정도의 일본어를 알고 있다면 기본적 내지 교과서적인 일본어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라는 생각이 깔려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교과서를 통해 하나씩 밟는 단계를 생략하고 유행어나 비속어를 알고 있는 것을 과시하며, 마치 유행어나 비속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지가 일어 실력을 재는 바로미터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행어나 비속어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제대로 된 일본어를 해야할 때에 하지 못하면 그냥 창피할 뿐이지요.

 

이 글을 읽어주는 독자 분들 중에서, 일본 방송이나 잡지 등에 사전에도 안 나오는 잘 모르겠는 표현들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둘러 유행어, 비속어를 외우려고 할 필요는 1도 없습니다. 우선은 교과서나 각종 교재가 가르쳐주는 일본어를 습득하는 것에 집중하면 됩니다. 기초를 얕보는 공부는 금방 벽에 부딪친다, 이거지요(명언, 나이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