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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가는 묘한 왕가다. 전쟁을 종식시키며 시작된 왕가면서도 무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리처드 3세는 전투와 무예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죽은 그의 머리에서 관을 빼앗아 쓴 헨리 7세는 전투에 아무런 재능이 없었다. 그를 중심으로 결집한 부하들의 실력이 좋았을 뿐이다.

 

튜더는 한미한 가문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먹여살리는 기사들은 그야말로 한 줌이었다. 향토 웨일즈의 힘 좀 쓰는 동네 일진이랄까? 주인 마님이 잉글랜드의 주인이 되니, 이들도 자연스레 왕의 근위병력이 되었다. 역사가들의 계산에 따르면 헨리 7세가 직통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불과 백 명 정도였다. 이쯤되면 병력이 아니라 경호인력이다.

 

정통성이 약한 헨리 7세 치세엔 반란이 들끓었다. 그는 내내 반란을 진압했고 또 성공했는데 그의 군사적 능력과는 무관하다. 헨리 7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공이다. 그는 어떻게 제 손에 검과 방패를 쥐지 않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시대가 변했다. 헨리 7세는 알았다.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돈의 시대다."

 

헨리 7세가 특별히 시대변화를 읽을 줄 아는 혜안을 벼린 사람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그는 태생적으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의 기질 덕에 시대변화를 남들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친 영국에는 돈이 말라 있었다. 헨리 7세는 국가의 경제를 장악하고 그걸로 귀족들을 매수했다. 귀족들이 왕과 이익을 같이 하는 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왕에게 충성한다. 헨리 7세는 스스로가 돈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이익을 배신해가며 정의나 대의명분 따위에 운명을 거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법이다.

 

또한 헨리 7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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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vii

 

헨리 7세는 매력 없는 왕이다. 그는 고향 동네 토호와 대도시 졸부의 치졸하고 계산적인 면을 다 가졌다. 봉건주의적 세계관에서 멋진 왕이란, 화려한 갑주를 입고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휘하 기사들과 함께 사악한 적을 향해 돌격하는 군주다. 물론 전쟁터에서 죽을 수는 있다. 허나 목숨을 걸기 때문에 낭만적이기도 하다.

 

헨리 7세는 그런 태도에 코웃음을 쳤다. 그는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다. 검에서 돈으로의 권력 이동이었다. 그렇게 변한 사회의 주인은 자신이다. 그는 국가에 대해 대기업 총수처럼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돈의 화신이자 최악의 구두쇠로서 말이다.

 

헨리 7세는 왕실 국고의 금전출납부를 본인이 매일 적었다. 완벽히 기입하지 않는 한 새벽까지 잠에 들지 않았다. 테니스 공 하나 사는 데 든 비용까지 손수 적었다. 카드놀이에서 잃은 돈 몇푼까지 적혀 있다. 그는 털끝만한 손해에도 가슴아파했다.

 

헨리 7세는 수많은 규정을 만들었다. 가령 일정 수 이상의 사병은 보유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나면 귀족의 집에 방문해 저녁을 먹은 후 자신이 센 사병의 머릿수로 꼬투리를 잡았다. 이럴 때 귀족들은 막대한 벌금을 뜯기는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벌금은 물론 저녁값도 굳혔으니 일석이조였다.

 

이런 인간이 남자의 명예니, 기사도니 하는 가치를 태생적으로 비웃었을 건 당연하다. 그는 명예결투도 금지했다. 이제는 돈의 시대다! 형사와 민사로 해결할 일이다. 형사는 벌금이 되어 국고로 들어오니 좋다. 민사 합의금은 수입으로 잡아서 세금을 떼니 이것도 좋다.

 

헨리 7세는 자신의 이익이 먼저지만서도, 가능할 때는 사익과 국익을 합치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영국에 들어오는 포도주는 영국 국적의 배로만 수입되게끔 했다. 왕은 포도주 수입 현황을 한 눈에 파악하고 세금을 물릴 수 있었다. 반대로 영국의 상인들은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국부 유출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헨리 7세가 영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인기를 끌 만한 성품이 아니었다. 골방에 쳐박혀 밤새 돈을 새는 음습한 성격의 왕. 그게 헨리 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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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viii

 

헨리 8세는 1491년 6월 28일, 수전노 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위로 다섯 살 많은 첫째 형이 있었다. 형의 이름은 아더. 헨리 7세가 왕좌를 차지한 다음 해에 태어났다.

 

아더라는 이름에는 아버지의 정치적 야심이 물씬 묻어있다. 튜더는 웨일즈 가문. 아더는 '진짜 잉글랜드'이자 잉글랜드의 오랜 향토, 웨일즈의 전설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다. 왕가의 약한 정통성 문제를 해결할 기가 막힌 이름이었다. 아더가 왕이 되면 전설 속의 아더왕에 이어 '아더 2세'가 된다. 설화와 역사가 결합하는 순간이다.

 

... 그 순간은 오지 않았지만.

 

헨리 왕자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기에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프라임 프린스(왕세자)는 몸 성히 어른이 되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몸. 당연히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귀하게 자란다. 계단에서 구르기라도 하면 시종이나 하녀 한 명은 경을 치를 일이다.

 

둘째는 다르다. 헨리 왕자는 궁궐 밖에서 평민 친구를 사귈 정도로 통제받지 않고 컸다. 음악부터 활쏘기까지 하고 싶은 건 다 했는데, 이 중 활쏘기가 특이하다. 영국에서 활은 기사계급이 아닌 평민의 무기다. 그의 성장 환경이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헨리 7세는 아더에게 제대로 된 처가를 붙여주려고 했다. 그 상대는 스페인이었다. 프랑스와는 감정이 회복되지 않았고, 대륙에 끈을 남겨두고 싶었던 영국에 신흥 군사강국 스페인은 최고의 사돈이었다. 무엇보다 지참금도 많이 줄 것 같았다. 딸을 시집보낼 때는 지참금과 함께 보내는 게 유럽의 문화였다. 사위가 왕세자라면 지참금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스페인은 결혼으로 탄생한 국가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왕이 결혼해 강대국이 만들어졌다. 두 사람의 자녀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독립 군주라는 이유로 '유럽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으로 통했다.

 

섬나라 시골 토호 출신 왕으로서는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위해 고급 피를 수혈받아 혈통을 세탁할 필요도 있었다. 프랑스를 압박하고 싶었던 스페인도 찬성이었다.

 

문제는 헨리 7세가 터무니없이 막대한 지참금을 요구한 것.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다.

 

"뭐 저런 근본 없는 천것이 있나!"

 

화가 나기도 하고 예비 사돈댁의 속물성에 민망하기도 한 스페인 왕실은 여러 번 화를 냈다. 결혼은 파혼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이 되려면 돈 있는 쪽이 더 써야 되지 않겠는가? 스페인의 군주 부부는 자신들이 그린 국제질서의 스케치에 무난히 색칠을 하기 위해 헨리 7세의 욕심을 들어주기로 했다.

 

왕세자 아더는 14살의 나이로 스페인의 왕녀 '아라곤의 카탈리나', 영어로는 캐서린과 결혼했다. 캐서린은 15살, 신랑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캐서린은 미녀였다. 9살 어린 왕자 헨리에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누나이자, 감히 경망스런 행동을 상상할 수도 없는 미래의 국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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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 Arthur and Catherine of Aragon

 

흔히 캐서린이 남유럽 스페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극에서는 가무잡잡한 피부와 검은 머리로 묘사된다. 이국적인 느낌은 좋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레콩키스타(이슬람 세력을 밀어낸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를 완수한 스페인 건국의 수뇌부는 순혈 게르만 귀족들이다.

 

캐서린은 전형적인 금발 게르만 미녀로, 창백한 피부에 완벽한 금발, 높은 코, 파란 눈의 소유자였다. 평균 외모가 떨어진다는 평을 듣는 영국의 기준에서 그녀는 중세의 서사시나 기사들의 무용담에 등장하는 판타지적 미녀였다. 하필 헨리 왕자는 누구보다 열렬한 중세 판타지의 팬이었다.

 

우리의 70, 80년대만 해도 형제 사이의 서열은 지금보다 엄격했다. 나이 많은 형은 아버지와 비슷한 권위를 지녔다. 서양도 다를 바 없었는데, 하물며 그 시대에 그것도 왕세자인 형의 아내는 눈에는 담을 수 있지만 손을 뻗을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신비, 고귀함, 권위 그리고 미모의 존재. 캐서린은 어린 헨리에게 이상향이자 열병이었다.

 

몸이 약했던 아더 왕세자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기에 걸렸다. 그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결혼한 다음 해 15살이 나이로 사망했다. 캐서린은 16세의 나이게 청상과부가 되었다. 헨리는 죽은 형에 이어 왕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헨리는...

 

자라면서 형수를 짝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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