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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를 봤던 시절을 제외하면 대입 시험에 큰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 교육 과정이 지나치게 대학 입시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원론적으로 비판하는 정도였지, 수능이 끝나고 문제 한 번 들춰본 적 없었다. 그런데 자식이 고등학생이 되자 그걸 또 들춰보게 되었다.

 

수능 문제를 보고 난 다음의 결론은 이렇다. 

 

아, 변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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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검은 가죽 마스크와 가터벨트, 채찍, 수갑 등으로 피하 지방이 다량 함유된 몸매를 치장한, 꿈에라도 마주치기 싫은 모습들이 떠오른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학 수학 능력 평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시험은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의 논리력과 이해력을 가늠해 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휘두르는 채찍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비명을 얼마나 잘 참을 수 있는지, 혐오와 구토만 유발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얼마나 잘 보고 배울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변태적 어른들의 가학적 폭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시험이 말이 안 되고 변태적인지 이번 수능 1교시 국어 시험을 두고 확인해 보자. 문제의 질적 수준은 고려하지 않겠다. 글자 수, 문항 수, 편집 디자인 같은 양적이고 물리적인 기준만을 놓고 살펴볼 것이다. 사람들의 평균적인 인지 능력(이해의 정도를 제외하고 눈과 귀를 통해 읽고 듣는 능력)은 고등 교육 체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OECD 국가들에서 큰 차이가 없으므로, 한국 대학들이 닮고 싶어 하는 미국과 비교해 봤다.

 

아래는 미국 학생들은 대학 진학할 때 보는 SAT(Scholastic Assessment Test)의 Teading Test 부분이다. 사지선다의 객관식 시험이고, 지문도 있어 우리나라 수능 언어영역과 가장 비슷한 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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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수학 능력 평가 국어 시험 (c) 2018 한국교육과정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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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SAT Reading Practice Test (c) 2018 The Colledge Board

 

수능 언어영역은 45문항에 80분이 주어진다. 미국 SAT Reading은 52문제에 65분이 주어진다. 문제당 주어진 시간은 수능이 1분 46초 정도고 SAT는 1분 15초 정도다. 이렇게 보면 수능이 학생들에게 더 유리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를 풀기 위해 읽어야 하는 정보의 양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문(Passage) 한 개의 길이는 비슷하다. 보통 12~15cm 너비의 열을 기준으로 60~85줄 내외의 지문이 등장한다. 하지만 지문 개수를 보자. 수능이 평균 10개, SAT는 5개로 2배 많다. 본 지문만 그렇다는 소리다. 수능에는 문제에 딸린 지문들도있다. 길면 본 지문 길이의 2/3 정도 되는 지문이 문제에 딸려 나온다. 이 정도면 변태여도 보통 변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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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국어 31번 문제가 그렇다. 이건 심지어 그래프까지 등장한다. 정말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긴 지문을 읽고 난 뒤, 꼴랑 3~4개의 문제를 풀게 한다. SAT의 본 지문당 딸린 문제의 개수는 10개다. 이걸 다 읽고 이해하고, 추론해 문제를 풀라고? 이 변태들아!

 

문제의 정보량, 즉 질문 자체도 그 양이 미국의 2배 정도 된다. 질문에 딸린 보기도 거의 기절할 수준이다. 수능의 보기는 오지선다형이고 SAT는 사지선다형이다. 보기의 개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그 길이도 SAT를 압도한다. 국어 시험의 경우, 답이 한 줄인 경우는 거의 없다. 두 줄에서 세 줄이 보통인데 이것도 SAT의 1.5~2배 정도 된다. 보기가 길다는 것은 출제자들이 수많은 부비트랩과 지뢰를 설치했다는 방증이다. 2~3줄의 긴 답례가 거의 비슷한 문장인데 몇 개의 단어와 술어만 약간 차이 난다면 그 문제는 십중팔구 학생들에게 똥 밟으라고 낸 문제다. 이건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아니다. 그저 가학적인 것이다. 

 

편집 디자인을 보면 더 가관이다. 수능 시험지는 인간의 감각과 인지에 관련된 현대 과학의 성과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예전 철필로 긁어 시험지를 만들던 등사기를 사용했던 때와 전체적인 디자인 구성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글자의 가독성, 쪽에 따른 지문과 문제의 배치, 문단과 행 간격 등은 시험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착시를 일으키고 헤매게 할까 무지 고민하며 가능한 난삽하게 만들었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나 참고서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이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텍스트들과 비교하면 수능은 파피루스나 끈 떨어진 죽간 시대의 대나무 문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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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지문과 문제의 배치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시간을 더 뺏을까 하는 고민이 그대로 배어난다. 그러지 않아도 지문이 길어 시험지 한 쪽 전체를 차지하는데, 문제들은 장을 넘겨 다음 쪽에 배치한다. 문제를 풀려면 계속 시험지를 이리저리 넘겨야 한다. 펼쳐 놓고 집중을 해도 풀까 말까 한 판에 아주 정신 사납게 팔 운동과 눈 운동을 시켜 정신을 흐트러뜨리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시험지를 넘기며 쩔쩔매는 모습이 보고 싶은 변태이던가. 러니 거의 모든 입시 전문가들이 실제 수능 시험 문제지를 내려받아 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이런 변태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소위 말하는 ‘변별력’ 때문이다. 시험 문제가 너무 쉬우면 학생들 간의 실력 차이를 제대로 측정할 수 없으니 적당한 변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시험지 꼴을 봐서는 이들이 원하는 변별력이란 게 순발력, 초단기 암기력, 뽑기력, 담력 따위이지 우리가 좋다고 입에 달고 사는 교육의 가치, 이해력, 창의력, 사고력은 아닌 것 같다.

 

대학들이 자꾸 정시 모집인원을 줄이려 하고 수시 모집에서도 수능 성적을 배제하려는 것도 이런 면에서 이해가 간다. 교육부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바람과는 달리 수능은 이미 대학 수학을 위해 필요한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기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이 지금 수시 모집을 위한 학생부전형이나 기타 전형들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대학 입학을 위한 수시 전형도 정시 못지않게 엉터리다. 수시 전형 또한 어른들의 ‘변태적 전횡’이라는 비판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문제는 더 많은 시간과 지면이 필요하므로 기회가 되면 다음에 더 떠들기로 한다.

 

‘경쟁’과 ‘효율’을 교육의 최고 목표로 삼는 한 이런 문제들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고치자고? 턱도 없는 소리다. 이리저리 기워봤다 넝마가 더 넝마만 될 뿐이다. 시간마저도 돈으로 계산하는 20세기 산업화 시대에는 딱 어울리는 이런 가치들이, 전통적인 생산활동에서 인간의 노동이 지속적으로 배제되는 21세기에도 무슨 쓸모가 있는지도 여간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수능 시험지가 파피루스 같아도, 끈 떨어진 죽간 문서 같아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출제자들이 한 달 아니 일 년 동안 감금당한다고 해도 이런 문제를 내는 한 그들의 수고가 전혀 고맙거나 그들의 처지에 동정이 가지 않다. 오히려 ‘나 돌아갈래, 이건 아니지, 개똥이다!'라고 소리치며 그곳을 뛰쳐나오지 못하는 그들의 양심을 질책하고 싶어질 뿐이다.

 

 

 

 

편집부 주

 

위 글은 독자투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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