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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영화의 재미를 오롯이 만끽하고 싶으신 독자 분께서는

관람 후에 읽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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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 삶

 

민물고기와 달리 바닷고기는 회로 먹어도 안전하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바다에도 기생충이 산다. 대표적인 것은 고래회충이라고 불리는 아니사키스(Anisakis)라는 녀석이다. 알에서 막 깨어난 이 벌레 유충은 새우 같은 작은 갑각류의 먹이가 되면서 생애를 시작한다. 새우 몸속으로 들어간 고래회충은 소화되지 않고 내장에 조용히 안착한다. 그다음 숙주는 새우를 잡아먹는 물고기다. 작은 물고기는 더 큰 물고기에 먹히는 바다의 섭리에 따라, 벌레들은 계속해서 기생의 삶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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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 위키피디아

 

그리하여 마침내, 고래회충은 최종목적지인 고래의 복강에 도착한다. 10cm가 넘는 성충이 된 녀석은 고래의 뱃가죽에 기대어 비로소 안온한 똬리를 튼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이름대로 사는, 근성 있는 녀석들이다.

 

우리가 그동안 숱하게 먹은 회 접시에서 그 녀석들이 근성 있게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깨끗한 사료만 먹고 자란 양식어종을 주문했거나, 자연산 횟감을 취급하는 요리사의 손질로 걸러졌거나.

 

그들의 생존기술은 하나다. 흔적 없는 은신. 그들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고래의 뱃속에 안착하기 전까지 결코 몸을 크게 불리지 않는다. 숙주의 건강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영양분을 훔쳐 먹고, 먹이활동에 방해되지 않을 공간을 찾아 쥐죽은 듯 살아간다. 모순적이게도, 어떤 물고기의 건강을 가장 원하는 것은 그 뱃속에 사는 기생충이다. 숙주의 생존이 곧 자신의 생존이므로.

 

들키지 않는다면, 선을 넘지 않는다면, 모르고 살아줄 수 있는 존재. 그 존재와 영향이 너무나 미미하여 사실은 거슬리지조차 않은 존재. 기생의 삶에는 존재를 지움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기생의 공간

 

영화 <기생충>에는 숙주와 기생의 관계인 두 가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드러난다.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은 허름한 반지하 방에 모여 산다. 비가 오면 가장 먼저 물이 차오르고, 창문에는 취객의 오줌이 묻어있는 그 꿉꿉한 공간은, 꼽등이는 맘에 들지 몰라도 인간이 살기엔 불편함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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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값비싼 주거지역이 맹렬히 확장되는 동안,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밀려 나온 변방의 공간은 아래로 깊숙하게 굴곡져 왔다. 그곳은 보통 지형이 험하고, 그래서 상하수도 시설이 신통치 못하며, 오래된 건물들은 하자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겉을 때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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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더기 같은 공간에서 이들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는 화장실이다. 천장에 닿아있는 괴이한 변기 위치는 도시의 뒤틀린 단면을 묘사하는 탁월한 장치다. 아마도 기택의 집 변기는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거나, 오물이 역류한다거나, 상하수도관이 엉망으로 묻혀있다거나 하는 모종의 이유로 정상적인 위치에 자리 잡지 못하고 천장으로 솟구쳤을 것이다. 기택가족의 일상은 수압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적응의 삶이다. 고래회충이 물고기의 내장 사이에 몸을 구겨 넣고 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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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박 사장(이선균 분) 가족의 일상에서 생존은 과업이 아닌 당연한 전제다. 그들의 대저택은 안전하고 쾌적할 뿐만 아니라 상징적이다. 유명 건축가의 혼이 깃든 곳곳에는, 거기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여실히 뿜어져 나온다.

 

한낮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과 그것을 머금은 널찍한 정원. 아랫동네에선 집안에 오물을 튀기는 폭우도, 이 저택에선 고즈넉함을 연출하는 장치일 뿐이다. 자연마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박해 거실에 두고 만끽하는 그 집은, 인간이 완벽하게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는 공간이다. 대양을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처럼, 그들의 삶은 무언가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다.

 

확실히 그들은 인간사회의 상위포식자다. 요리, 청소, 세탁, 운전, 자녀교육 등 생활의 크고 작은 노동들을 적절한 사람들을 고용해 분담시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꿈틀대는 조그마한 자유도 허용한다. 기생충들이 선을 넘어 숙주를 불쾌하게 하지 않는다면.

 

 

동족상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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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택의 아들 기우는 꽤 적극적인 기생을 추구한다. 있는 곳이 비좁아지면 더 큰 물고기의 뱃속을 도모하는 것은 기생의 삶에서 중요한 과업이다. 저택의 안주인 연교(조여정)와의 과외면접을 마친 기우는 확신한다. 이곳은 기생하기 안성맞춤인 거대한 범고래의 뱃속이라고.

 

최종숙주를 발견한 기택의 가족은 박 사장의 저택에 안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작정하고 덤비는 회충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기생충 장난질에 고래의 뱃속은 속수무책으로 뚫린다. 그러나 그뿐이다. 회충들의 분탕질은 고래의 우아한 유영에 미세한 영향조차 끼치지 못한다. 고래에겐 그저 존재조차 관심 없는 벌레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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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새로운 서식처에서 맞닥뜨린 동족의 존재다. 기생의 삶에 있어 한정된 양분을 공유해야 하는 다른 기생 집단의 존재는 치명적이다. 존재감을 감춰야 할 은둔의 공간에서 기생충들의 충돌은 분명 숙주에게 불쾌한 신호를 준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한다. 숙주와의 공존은 삶의 목표이나, 동족 간의 대립은 삶의 숙명이다. 기생의 삶의 또 다른 아이러니다.

 

기택의 가족도, 먼저 살고 있던 문광(이정은 분)의 가족도 박 사장을 좋아한다. 박 사장은 착한 부자다. 넉넉한 그는 피고용인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윽박지르지 않아도, 그들의 경계는 사는 공간의 높이만큼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이다. 경어를 쓰고, 예우하며 본인의 고결함을 지킨다. 그래도 된다. 천적이 없는 고래에게 바다는, 언제나 평화로운 수영장이다.

 

기택의 가족과 문광의 가족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쏟아내는 건 경멸어린 반말과 욕지거리다. 잔뜩 날을 세우고 서로의 존재를 불쾌해한다. 악다구니 중에 문광과 충숙은 한 번쯤 화해와 연대를 상상해보지만, 이미 기생의 삶이 몸에 밴 두 가족에게 공존의 기억은 퇴화되어버렸다. 고래의 양분을 나누는 것은 종족의 괴멸을 의미한다. 저택의 지하에서, 약자와 약자의 연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존의 한계

 

봉준호 감독은 전작에서 사회와 현실에 대한 어떤 입장을 꾸준히 담아왔다. 지식인의 민낯, 독재 사회의 폭력성, 강대국의 패권과 정부의 무능력, 동물복지 등 그의 입장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다. 그 이야기들의 결론들은 작은 혁명을 이뤄내기도 했었고, 때론 더 큰 무력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전작과 다르게 이번 영화에서 그는, 미시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이야기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가장 높은 집과 가장 낮은 집에 사는 사람들의 서식행태를 관찰한다. <기생충>은 사회 부조리를 들춰내는 대항 서사라기보다는, 실험실의 관찰기에 가깝다.

 

계획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생존 방식이었던 기택의 가족에게, 감독은 더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의 돌을 안겨준다. 산수경수는 이 실험의 변수이자, 비극의 암시다. 돌은 결코 마주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을 같은 공간에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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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택의 가족은 최선을 다해 숙주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냄새는 선을 넘는다. 그리고 선을 넘은 냄새는 서로를 어떻게 인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반지하의 사람들은 냄새의 존재를 모르고, 높은 저택의 사람들은 낯선 냄새를 예의 있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른다. 서로의 섭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택은 전에 없던 모멸감에 휩싸인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은 모든 생물에게 비극이다. 그것이 기생충일지라도.

 

 

충(蟲)의 시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주변에 어느 사람들을 벌레 충(蟲)자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성별로, 계층으로, 지역으로, 연령으로, 직업으로, 가르고 나누어 벌레라고 부르는 혐오의 언어가 일상이 되었다. 동시대의 사람들을 부르는 수많은 ‘충’의 단어가 반사되어 다시 귀로 돌아온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를 경멸하고 살고 있는 고래뱃속의 공명이 아닐까. 영화가 환기하는 음울하고 울적한 분위기는 거기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하실의 두 가족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돈을 벌어 잘살아 보고 싶었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고, 메달을 꿈꾸며 운동에 매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스스로 기생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숨을 죽이고, 서식처를 제공하는 숙주를 한없이 존경하며, 서로를 경멸하고 증오하면서.

 

공교롭게도 기택과 지하실의 남자는 같은 카스테라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 재기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 자생력을 거세시킨 것 아닐까. 그편이 생존에 더 유리하므로. 자존감을 지켜내는 자생의 삶을 살아내기에는 현실은 깊은 바닷속 같이 위험하고 아득하다.

 

충의 시대와 충의 전쟁. 저 멀리 유럽에서도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이 울적함이 비단 여기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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