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영웅의 삶을 살다 서른이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그가 이승에 남긴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번엔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의거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 블라디보스톡 일본 총영사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왼쪽)와 아들 분도(오른쪽)・준생(가운데)
1.
안중근은 아내인 김아려(金亞麗)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녀 안현생(安賢生)과 맏아들 분도(안문생), 둘째아들 준생(俊生)이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철저히 계획됐다고 추론할 수 있는 게 의거 직전 안중근의 동료들이 가족들을 국외로 도피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일날 안중근의 처와 자식들은 하얼빈에 도착한다.
이들의 도피를 도운 유승렬 선생은 일제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는 연해주 꼬르지포로 안중근의 가족들을 피신시켰고 재정적인 후원을 해줬다. 당시 유승렬은 의사로서 활동했는데, 그의 아들 유동하는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하얼빈 의거가 안중근 의사 혼자서 결행한 의거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의거 전부터 법정투쟁을 대비한 변호전략을 논의했고, 변호사를 준비했고, 가족들을 대피시켰다는 것은 조직적인 준비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직후 연해주에서 ‘안중근 유족 구제 공동회’가 결성됐고, 1910년 10월에 안중근의 어머니와 첫째 동생 안정근 내외와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가 모여 산다. 1911년 4월이 되어 꼬르지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으로 이주한다. 이 때 도움을 준 이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안중근 가족은 농장을 마련해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갈 듯이 보였지만... 일제의 추적이 여기까지 미쳤다.
안중근 의사가 자식 중에서 아꼈던 큰아들 분도. 잘 교육시켜 신부(神父)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분도가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죽었다. 이때 나이가 7살, '독살(毒殺)'이었다.
이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지만, 이 곳에서의 삶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안중근 의사의 동지들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러시아 혁명 때문에 이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희소식이 들린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안중근 가족은 1919년 10월 상해(上海)로 이주했고, 평안도 출신 인사들이 많이 거주하던 프랑스 조계 내 남영길리(南永吉里)에 정착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얼마간은 가족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속마음을 짐작할 순 없지만,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이전보다 나아보였다. 안중근의 둘째동생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오른팔로 활동하고(안중근 의사의 두 형제 안정근, 안공근은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며,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안중근의 하나 남은 아들 안중생은 가톨릭 스쿨에 들어가 영어를 공부한다.
그러나 가족의 도피와 유랑 생활이 너무 길었다. 1930년대 중반 안준생은 자신보다 2살 많은 정옥녀(鄭玉女)와 결혼한다(2남 1녀를 두었다). 이 때 처가에서 제안이 들어온다.
“자네 신분상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기도 힘들고, 취직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직장생활 하는 것이 어려우니 가게를 하나 열어보는 건 어떤가?”
이렇게 안준생은 약국을 차리지만, 약국을 두고 심상찮은 소문이 돌았다. 헤로인을 판다는 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소문도 돌았다.
“안준생이 친일파가 돼서 일본 돈으로 약국을 차렸다면서?”
“안준생이 변절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안중근 일가는 1909년부터 1937년까지 도피와 유랑을 했다. 아버지가 근대 일본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대가로, 가족들은 일제의 마수를 피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장남은 독살당했고, 차남 안준생은 평생을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번듯한 직장도, 제대로 된 삶을 꾸리지 못한 채 부평초처럼 떠돌아야 했고, 일제의 감시와 위협 속에서 불안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삶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둘째, 1937년 7월 7일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상해로 치고 들어왔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갔지만, 안준생은 가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미처 챙기지 못했을 수도(개인적으론 그렇게 생각한다) 혹은 자의적으로 남았던 걸 수도 있다.
일본이 상해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잔뜩 독이 올라있었다. 처음에는 2~3개월이면 대륙을 토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장제스가 독사단(독일식 사단. 독일군 군사고문에게 훈련을 받고, 독일식 장비로 무장함) 88사단을 통해 일본군을 철저히 박살낸 거다.
그 결과 상해에서만 3개월 동안 있었다. 그나마도 일본군 증원부대가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상해 전투의 피해 때문에 독이 잔뜩 올라있었고, 그 결과는 양민학살로 나타났다. 난징 대학살의 단초가 된 게 상해전투였다.
이 상황에서 상해에 남은 안준생은 어떤 입장을 표명해야 했을까?
2.
장충단은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에 맞서 싸우다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쌓은 제단이다. 독립과 항일의 의지를 담은 공간이란 의미다.
이 공간을 일본이 가만히 내버려뒀을까?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곤 1932년 이 공원 동쪽 언덕에 춘무산(春畝山)이란 이름을 붙이고, 언덕 위에 박문사(博文寺)란 절을 세운다.
이 두 개의 이름은 한 인물과 관계돼 있다. 춘무(春畝)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다. 박문사는 다들 짐작했겠지만, 이토의 이름인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다. 완공된 것도 이토 히로부미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이었다.
이름부터 목적을 짐작케하는 박문사는 설립목적에서 실체를 제대로 보여준다.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勳業)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위해서 세웠다.”
이 절의 낙성식에는 조선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를 대표로 한 일본측 인사들은 물론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을 포함한 친일파 인사들이 모였다. 박문사의 위상을 잘 확인할 수 있는 게 낙성식에 천황과 황족들의 하사품이 전달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박문사가 어떤 의미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박문사
여기서 눈여겨봐야 하는 게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이란 대목이다. 일본은 박문사를 통해 한국인들의 정신을 통제하려 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본격화 하던 시기였다. 중국과의 전쟁, 뒤이은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사회를 통제하고, 군국주의 색채를 강화했다. ‘전쟁모드’에 들어선 거다.
그 결과 1937년에 여기에 ‘폭탄 3용사’ 동상을 세운다.
폭탄 3용사가 누굴까? 1932년 2월 22일, 중국 상해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일본 육군 공병이었던 에시타 다케지(江下武二), 사쿠에 이노스케(作江伊之助), 기타가와 유주루 (北川丞)가 긴 폭탄통을 같이 들고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성책으로 육탄 돌격, 중국군 수십 명을 죽이고 성책을 함락시켰다. 일본군은 이 일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일본 사회는 최초로 전몰장병을 위한 조의금 모금을 했으며, ‘폭탄 3용사’란 군가까지 만들어졌다.
‘폭탄 3용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열기는 ‘비정상’으로 보일 정도였는데, 폭탄 3용사에 대한 가부키가 만들어졌고, 한 달 사이에 6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으며, ‘3용사’를 주제로 한 창가가 만들어져 레코드로 발매됐으며, 이 음악을 기린맥주가 CF 음악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
아니, 이 정도는 ‘애교’였다. 나중에는 ‘3용사’ 장난감이 만들어졌고, 일본 국민윤리 교과서에도 실렸다. 태평양 전쟁 때 빈번하게 등장했던 만세돌격이나 가미카제 자폭공격, 옥쇄 등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폭탄 3용사의 이야기는 전후 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창작’인 것이 밝혀졌다. 중국에서의 전쟁이 생각외로 길어지자 일본군은 일본 사회의 눈을 돌리기 위해 ‘영웅’을 조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 육군 첩보부가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몇 명의 전멸장병들(특기는 공병으로 한정해서)을 모아서 이들의 이름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폭탄 3용사의 동상이 서울 한가운데 세워졌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박문사를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정신적 기지로 사용하겠다는 의미다.
실제로 박문사는 그 소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1939년이 되면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한일 합방 공로자이자 친일파이자 매국노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 위령제에도 최린, 이광수, 윤덕영 등등 친일파들이 대거 자리를 빛냈다)
박문사는 일제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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