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추모]굿바이, 코비

2020-02-03 11:33

작은글씨이미지
큰글씨이미지
슈퍼팩토리공장장 추천17 비추천0

 

 

 

이사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던 아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여보! 3년째 손도 안 댄 농구공은 어쩔 거야?”

 

basketball-4292375_640.jpg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농구공만 잡으면 나이를 망각하는 불꽃 남자였다. 마흔이 넘어서도 농구 동호회에서 활동했지만, 족저근막염으로 6개월을 넘게 고생한 후 농구를 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이제 실전 농구와는 이별해야 할 때라고.

 

“흠….. 농구공 시우 줄까? 입학하는 중학교에 농구 동아리도 있다던데.”

 

나에게 농구공이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다니! 나도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냐는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농구공 하나로?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시우에게 농구공을 넘겨주던 날의 내 표정은 미스코리아 왕관을 넘겨주는 전년도 미스코리아 같았다고 한다. 애써 웃고 있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지나가 버린 육체적 청춘의 종지부를 찍는 것 같았다.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농구와 전혀 안 어울리는 몸매로 변한 나를 보며 시우가 물었다.

 

“이모부도 농구 좋아했어요?”

 

“시우야! 라떼는 말이야…….”

 

1987년 1월 중학교 입학을 앞둔 12명의 농구 좀비들은 내리는 함박눈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독립투사의 연통제처럼 잘 조직된 비상 연락망을 가동했다. 30분 후, 12명의 아이의 손에는 삽과 서까래가 들려 있었다. 우리는 오직 농구를 하기 위해서 학교 운동장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결국, 하루 종일 내리는 눈으로 인해 우리는 그날 농구를 못 했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공부를! 공부를 그렇게 해봐라! 머리고 옷이고 눈에 다 젖어서!”

 

당일치기로 농구대잔치를 보기 위해 왕복 9시간이 걸리는 서울을 오가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주말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 10분에도 농구를 하러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20살이 되어 하나둘씩 고향을 떠났지만, 각자의 생활 터전에서 농구와 함께 성장했다. 소나기, 첫사랑 같은 것이 누군가의 청춘을 대변한다면 나에게는 농구가 그랬다.

 

NBA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내 방에는 영화배우나 가수의 사진 대신 마이클 조던, 드웨인 웨이드, 스티브 내쉬, 크리스 폴의 사진이 걸렸다. 월급을 받게 되면서 나에게 버킷리스트란 NBA 직관과 동의어가 되었다.

 

2020년 1월 설 연휴 마지막 날 코비 브라이언트가 사망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도 그의 추모 열기를 덮진 못했다.

 

image_6672396831513588670092.jpg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NBA에 데뷔하여 20년을 LA 레이커스에서 뛴 원 클럽맨이다. 한 경기 81득점을 기록했고, 치열한 투쟁심으로 블랙맘바라 불리던 그가 헬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

 

두 개의 올림픽 금메달과 한 손 가득 챔피언 링을 끼운 화려한 경력의 선수였지만, 그는 농구 선수 이상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메시, 나달 우사인 볼트 등 타 스포츠 및 각계각층에서 그를 추모하고 있다.

 

2020년 그래미 어워드도 코비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앨리샤 키스와 90년대를 풍미했던 보이스 투맨이 그를 기리는 노래를 부를 땐 감동과 함께 그 들의 발 빠른 기획력에 박수를 보냈다.

 

나는 농구에서 패스를 기반으로 한 팀플레이를 선호하다. 그래서 코비 브라이언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20대 시절 팀 멤버들과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패스보다는 자신의 슛을 먼저 생각하는 선수였다. 내가 좋아했던 패스 마스터 스티브 내쉬와 밀레니엄 킹스는 끝내 코비를 넘지 못했다.

 

나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은 그의 농구 실력이 아니라 상상하기 힘든 훈련량과 농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의 훈련 스케줄은 트레이너와 선수들에 의해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새벽 4시부터 훈련을 시작하고 1,000개의 슈팅을 성공한 후 끝난다고 한다. 하루 1,000개의 슛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승한 다음 날도 체육관을 공 튀기는 소리로 채웠으며, 손가락이 부러져도 경기 출전을 감행하고 심지어 평소와 다르지 않은 기량을 보였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경기 도중 아킬레스건이 끓어진 채 자유투 1구를 던지고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을 떠나는 그를 보고 모두가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훈련보다 힘들다는 재활을 마치고 다시 코트로 돌아왔다. 그런 그도 사람인지라 2016년 NBA 선수로써 은퇴를 하게 되었다. 20대에 코비를 처음 본 나도 어느새 40대가 되어있었다. 그의 은퇴 경기를 보던 날은 시우에게 내가 아끼던 농구공을 물려주던 날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20년간의 NBA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는 코비의 은퇴 경기 날, LA스테이스폴 센터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코비 브라이언트 한 사람을 빼고 모두가 즐거웠다. 퇴직하는 날 퇴근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눈을 부라리며 일을 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코비는 은퇴 경기에서 60점을 넣었다. 한 시즌 동안 한 경기에서 60점을 넘긴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농구 탐욕 왕 코비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의 인생 마지막 경기에서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경기 후 ‘Mamba out’ 이란 말을 남기고 홀연히 코트를 떠났다.

 

이때까지는 그의 과도한 열정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나의 인생관과 배척되는 지점에 있는 그에게 질리기도 했었다.

 

내가 코비를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 이유는 은퇴 후 그가 보여준 의외의 행보 때문이다. 지도자나 사업가로 변신하는 여타의 스포츠 스타와 달리 그는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타났다.

 

k4.jpg

 

그가 직접 쓴 글로 제작한 “Dear Basketball”로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의 SNS에는 자신을 writer, producer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평생 농구만 하다 느닷없이 작가라니! 인생을 대하는 그의 열정적인 자세와 도전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날 이후 글쓰기에 대한 나의 자세가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연금술사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류는 코비 브라이언트 사망 후 놀라운 소식을 발표했다. 그는 코비와 동화책 집필을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다. 파울로 코엘류는 코비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와 함께할 수 없는 이 작업은 의미를 잃었다며 초안을 없애기로 했다고 한다.

 

코비가 탄 헬기의 목적지는 13살 딸의 농구 시합이 예정된 맘바 아카데미였다. 어쩌면 가장 그다운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이소룡이 단지 영화배우가 아닌 철학자였듯이, 코비 브라이언트도 농구 선수 이상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을 더 자주 찾게 된다.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 속에서 죽음이란 터부시 해야 할 것도 아니며,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이성과 본능은 따로 놀기 마련이며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함 마저 느낀다.

 

한 분야에 지독한 노력을 기울여 전문가 된 사람들을 우리는 프로라고 한다.

 

씨름과 방송이라는 두 분야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둔 프로 강호동 씨가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마추어는 걱정하는 대로 되고 프로는 꿈꾸는 대로 된다.’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에 사력을 다한 코비 브라이언트는 프로농구선수를 넘어 프로 인생러라 부를만 하지 않을까?

 

굿바이! Mr. 바스켓볼 맨!

 

 

wp533432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