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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9. 월요일

너클볼러


 


들어가는 척하며… 아니 들어가며…


 


저는 일단 제 손을 떠난 후엔 글도, 리플도 보지 않습니다. 제 생각도 그저 여러 가지 중 하나일 뿐이고, 그러니 제가 써제낀 결과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죠. 선플이 있고, 악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절대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릴리즈 타이밍부터 홈플레이트를 보지 않고 바닥을 꼬라보는 전 메이저리그 일본인 투수 ‘오카지마’의 투구폼과 비슷한 거죠. 손 떠나면 끝이에요. 조때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죠. 전 소중하니까요.


 



손 떠나면 끝이다.


 


어느덧 미적미적 세 번째를 맞이한 이 시리즈를 본 독자들이라면 저게 다 구라임을 단박에 알아채셨을 것이다. ‘손 떠나면 끝이라고’ 네버. 워낙 덤벙거리는 성격 탓에 보고 또 봐도 오타와 비문이 수두룩(그나마 편집부에서 손봐주니 그 정도다)하니 마빡에 업데이트 된 뒤로도 가끔씩 다시 읽어보곤 한다. 물론 리플도 확인한다. 꼼꼼히…


 


그 중 필자의 마음을 촉촉히 적신 리플이 있었으니, ‘들은 척 매뉴얼을 써먹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 ‘록 가수 몇몇 안다고 졸지에 사무실에서 영문과 졸업생으로 낙인 찍혔다’는 내용의 리플이 바로 그것이다. 본 필자, 뭐 대단한 게 아니고, 그저 음악 들으면서 주고 받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나누고 싶어 이 연재를 시작했다. 아 근데 나눌 사람이 없다니, 살짝 ‘척’ 한 번 했다 ‘왕듣보’로 낙인이 찍히다니… 이 가슴 아픈 두 개의 사연이 가뭄의 단비로도 적시지 못한 필자의 슴가를 촉촉히 적셨다.


 


필자, 가카의 내곡동 사저 매입만큼이나 중요한 이사를 앞두고 있다. 가카가 만들어주신 평온함과 은혜덕으로 전세 값은 4~5천만 원 정도가 올랐다. 이사는 가야 하겠고, 돈은 없다. 떠날 집도 내 것이 아니고 갈 집도 내 것이 아니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아직도 알몸인 듯한 느낌이다. 멘붕이 수시로 면회를 온다. 허나 이 와중에도 써내고야 말았다. 독자들을 위해 ‘들은 척’을 시전할 단 한 사람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사명과, ‘들은 척’이 온전하게 ‘들은 척’으로 대접받게 되길 바라는 작은 바램을 담았다. 다만 지난주 필독 부편집장이 향후 1년치 고료쯤 되어보이는 아구찜을 쏜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먹을 때까지는 참 좋았던 아구찜.


 


현재 리플과 트윗을 통해 제보해주신 내용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음을 알려드린다. 기회가 되면 제보해주신 내용들로 함 엮어볼 생각이다. 아무쪼록 많은 제보 부탁 드린다. 언젠가 독자들의 제보가 코너에 몰린 필자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들은 척’을 위해 슬슬 몸들 풀어보자.


 


 


시작하기 전에


 


2008년에 열린 50회 그래미 시상식과, 2012년에 열린 54회 그래미 시상식은 많이 닮았다. 각각의 시상식을 초토화시켰던 아티스트는 모두 여성 뮤지션이었고, 젊었으며, 주요 4개 부문 중 3개 부문을 싹쓸이 했고, 나머지 하나는 모두 남자 뮤지션(허비 핸콕, 본 아이버)들이 가져갔으며, 둘 여인 모두 영국 출신이었다.


 


2008년 50회 그래미 시상식. 최다 부분 후보에 오른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는 시상식이 열린 미국 LA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약물중독 때문이었다.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못한, 알코올, 약물 중독의 24살의 퇴폐적 이미지의 이 아가씨에게 그래미는 주요부분 4개 중 3개를 포함에 총 5개의 트로피를 몰아주었다.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한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런던 스튜디오에서 공연을 펼쳤고, 그래미는 위성으로 이 실황을 중계했다. 부른 곡은 재치 있게도 ‘You Know I’m No Good’이었다. 물론 다음 곡은 ‘Rehab’.


 



영국에서 수상한 에이미 와인하우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보여준 빈티지 사운드에 대한 대중의 환호와 평단의 극찬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예쁘고 몸매도 좋은 데다, 매력적이고, 성량도 풍부한 기존의 디바와는 다른 영역에 있는 새로운 유형의 디바가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연이은 스캔들과 알코올, 약물 중독, 재활이라는 가쉽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빈 공백은 장르는 조금씩 달라도 다양한 유형의 여성솔로가 등장하면서 매꿔지기 시작했다. 코린 배일리 래(Corinne Bailey Rae), 사라 바렐리스(Sara Bareilles), 어 파인 프렌지(A Fine Frenzy), 그리고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가장 비슷하게 만들어진 더피(Duffy)까지… 모두 등장과 더불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초토화시킨 뒤 이듬해인 2009년에 열린 그래미 시상식 ‘올해의 신인’상 수상자에 호명된 이는 19살이 되던 해에 데뷔앨범 ‘19’를 발표한 아델(Adele)이었다. 2008년 전세계 음반 판매량 1위 더피를 제치고 아델이 수상한 것이다. 최고의 데뷔를 만들어낸 아델의 행보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다른 여성 뮤지션들과는 살짝 다른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곧바로 새 앨범 작업, 활동을 시작한 반면 아델은 서서히 다음 작품 준비에 들어갔다. 일부에서 소포모어 징크스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예상들이 튀어나왔다. 우려가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이 확인 되는 데는 딱 2년 걸렸다.


 


올해 그래미는 2008년 그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이 에이미 와인하우스에서 아델로 바뀌었을 뿐이다. 신인상을 제외한 주요부분 3개를 싹쓸이(신인상을 포함한 3개 부문이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넘어서는 부문), 총 6개 부분의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아델의 그래미였다 해도 손색이 없는 결과였다.


 



미쿡에서 직접 받은 아델


 


아델은 그래미를 휩쓸고 난 뒤 4-5년간 휴식을 선언했다. 애인과의 연애, 결혼, 출산 등의 이유를 들었다. 많은 이들이 아쉬움과 지지를 보냈다. 그렇게 아델이 무대를 서서히 떠나고 있을 때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비스티 보이즈의 아담 요크(Adam Yauch)가 침샘암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한 달 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기념행사가 초청되었으나 아담 요크가 참석하지 못해 많은 팬들이 걱정하고 있던 차에 전해진 소식이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께서 눈치 깠을 것이다.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영국의 여자 솔로 뮤지션과 뉴욕의 백인 삼인조 힙합밴드를 엮은 이유를, 그리고 그 사이에 중첩되는 이름이 하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아델의 슈퍼히트 앨범 ‘21’과 비스티 보이즈 최고의 앨범 ‘Licensed To Ill’의 프로듀서였던 바로 그 양반. 바로 미다스의 문어발 ‘릭 루빈’ 되시겠다. 자. 눈치덜 깠으면…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Adam Yauch (1964~2012)


 


 


들은 척 매뉴얼


 


PLAY LIST



1. Walk This Way - Run-D.M.C (Raging Hell)

2. Fight for your justify - Beastie Boys (Licensed To Ill)

3. Under The Bridge ? Red Hot Chili Peppers (Blood Sex Sugar Magik)

4. Aerials ? System Of A Down (Toxicity)

5. 99Problems ? Jay-Z (The Black Album)

6. The Long Way Around ? Dixie Chicks (Taking The Long Way)

7. Don’t You Remember ? Adele (21)




릭 루빈


 


릭 루빈 (Rick Rubin. 본명 프레데릭 제이 루빈 Frederick Jay Rubin)은 1963년 3월 10일. 뉴욕 롱비치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유대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신발 도매업자,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이 평범한 유대인 친구가 슈퍼프로듀서가 되기까지 두 번의 훌륭한 만남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스티브 프리먼과, 대학 시절 만난 러셀 시몬스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밴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릭 루빈은 스티브 프리먼을 만나 기타와 작곡연습을 배운다. 그 과정을 계기로 ‘더 프릭스’(The Pricks)라는 밴드를 만들어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고, 학교 기물인 4트랙 녹음기를 가져다가 ‘데프 잼'(Def Jam)이라는 레코드사를 지멋대로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은 참으로 단촐해 보였다.


 


뉴욕대에 진학한 릭 루빈은 호스(Hose)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며, 뉴욕 펑크씬에서 활동하는 몇몇 밴드들과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힙합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디제이였던 제지 제이(Jazzy Jay)를 만나 힙합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제지 제이로부터 소개받은 러셀 시몬스(Russell Simmons)와 의기투합, 정식으로 데프 잼 레코드를 설립하게 된다. 그게 1984년의 일. 1985년 드디어 데프 잼 레코드의 첫 앨범 엘엘 쿨 제이(LL Cool J)‘I Need A Beat’ 탄생하게 된다.


 


자. 뭐 이 정도면 누군가는 제와피의 프로듀서 박 사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프로듀싱한 앨범의 리스트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편집하느라 똥 빠진 Discography (출처 : 위키피디아)


 


나름 눈에 띄는 앨범만 체크해봐도 서른 개가 넘는다. 이 리스트는 릭 루빈이 앨범 전체, 혹은 일부를 프로듀싱한 리스트, 예를 들어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만천하에 알린 Blood Sugar Sex Magik의 경우 릭 루빈이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 했고, 믹재거의 솔로 앨범 Wandering Spirit의 경우 믹 재거와 릭 루빈 공동 프로듀싱. 저스틴 팀버레이트와 쉐릴 크로우의 앨범에는 각각 ‘(Another Song) All Over Again’, ‘Sweet Child O´Mine’, 이렇게 한 곡씩을 프로듀싱한, 그 모든 작업이 포함된 리스트 되시겠다.


 


살짝 살펴보자면, 일단 흑인만의 장르였던 힙합을 메인스트림에 우뚝 꽂아 넣은 기념비적인 앨범 두 장. 런 디엠씨의 Raising Hell과 비스티 보이즈의 Licensed To Ill이 눈에 팍 들어온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에게 장르는 그저 거실과 방을 오가는 미닫이문 같은 것으로 보인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믹 재거, 자니 캐쉬, 탐 패티, AC/DC, 슬레이어, 쉐릴 크로우, 멜라니 C (스파이스걸즈 멤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시스템 오브 어 다운, 메이시 그레이, 제이 지, 림프 비즈킷, 위저, 샤키라, 닐 다이아몬드, 메탈리카, 조쉬 그로번, 고골보르델로(우크라이나 집시펑크 밴드), 그리고 아델까지.


 


그의 이 장황하고도 아름다운 리스트에 흠뻑 빠져 들은 척이고 나발이고 허우적거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럴 때일 수록 정신을 차리고 자신 있게 ‘척’ 할 수 있는 부분을 확실히 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릭 루빈, 음… 그 털쟁이’ 이 정도에서 끝나거나, ‘뭐 박 사장도 그 정도 하지 않나’ 정도로 귀결되는 허무한 ‘들은 척’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릭 루빈이라는 이름 석 자 투척한 후에 마하리쉬를 존경하는 나머지 신선과 같은 외모를 유지보수하고 있으며, 요가를 좋아하나 전혀 요가스럽지 않은 몸매의 소유자(근래 살이 빠진 듯해 보이기도 함)란 사실로 흥미유발. 힙합, 하드 락, 댄스, 컨츄리, 팝페라 등의 장르 불문, 일단 그의 이름이 걸렸다 하면 웬만큼은 먹어주고 들어가는 실력에, 앞서 거론한 몇몇 슈퍼스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집중을 시킨다. 가볍게 런 디엠씨와 비스티 보이즈의 앨범은 ‘흑인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던 힙합을 백인들에게까지 각인시킨 계기였다는 정도의 멘트도 살짝 함 던져주자.(물론 초기엔 흑인문화를 갈취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여기까지 해냈다면 8부 능선은 넘어온 것. 릭 루빈의 만들어 낸 앨범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앨범, 딕시 칙스의 Taking the Long Way로 본격적인 ‘들은 척’을 시전하면 된다.


 


 


들은 척 세부 스킬.



Dixie Chicks


 


1989년 달라스에서 결성된 여성 컨트리 밴드인 딕치 칙스(Dixie Chicks). 소규모 공연을 전전하던 무명시기를 거친 뒤 멤버교체와 리드보컬 나탈리 메인즈의 영입을 통해 현재의 3인조의 틀을 갖춘 뒤, 1998년 Wide Open Space로 뜨거운 데뷔를 하게 된다. 물론 미국 내의 얘기다. (당시 국내엔 앨범조차 발매되지 않았다). 가볍게 천만 장을 팔아제낀 후 이듬해 발표한 FLY로 또다시 천만 장을 팔아 치운다. 컨트리에 팝을 가미해 보다 많은 대중에게 어필한 결과였다. 물론 마냥 순탄하진 않았다. 엄청난 성공은 레코드사와의 로열티 배분 분쟁으로 이어졌다. 지루한 분쟁이 마무리 될즈음 새로운 앨범 Home을 선보인다. 플릿 우드 맥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Landslide’가 곧바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트리플 히트가 기정사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2003년 런던 공연 전까지는 말이다.


 


2003년 3월 10일. 영국 런던에서 공연 중 나탈리 메인즈가 이런 멘트를 날린다.


 



‘우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부끄럽다’




 


이때는 2001년 북한과 이라크, 이란의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정부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를 통한 세계평화이바지라는 참으로 미스유니버시티한 이유로 논란 속에 이라크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 말을 영국에서 했으니, 니덜도 똑같다는 은유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던 사안이었고, 나탈리 역시 가볍게 던진 멘트였음으로 크게 문제될 것 없어 보였던 이 발언의 파장은 예상과 다르게 겁나 커지게 된다.


 


의미있지만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이 멘트는 자국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라는 미국 내 패권주의 정서와, 딕시 칙스가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컨트리를 하고 있었다는 점. 게다가 텍사스는 컨트리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 것. 디트로이트에서 미국인의 고용을 약속한 가카처럼, 딴나라에서 자국의 대통령을 씹었다는 이유 등이 맞물리면서 큰 파장을 일으킨다. ‘딕시 칙스 = 후세인’이라는 플랜카드까지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명과, 부시에게 부끄럽다고 한 멘트에 대한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딕시 칙스의 음반은 판매금지는 물론이요, 그들의 노래가 방송에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쓰레기통에 앨범을 버리는 모습이 공중파에서 보도되었고, 극우파들에 의한 온갖 협박이 등장했다. 딕시 칙스의 세 멤버는 투사가 아니었다. 컨트리 음악을 하는 다분히 미국적인 뮤지션이자, 동시에 자녀를 둔 엄마이기도 했다. 무시 못할 만큼의 우익성향의 대중들에게 외면 받기 시작했고, 앨범 판매량과 콘서트 관람객의 숫자가 급감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탈리가 ‘부시가 부끄럽다’는 멘트를 한 10일 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였다. 전쟁은 26일만에 끝이 났다. 명분이었던 대량학살무기는 확인되지 않았고, ‘이라크전쟁=세계평화’라는 공식은 증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후세인은 잡혔다. 전행이 끝난 뒤 딕시 칙스는 전쟁을 비난하는 누드사진을 찍었고, 엔터테이먼트 위클리는 그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전쟁을 끝났지만 쉽지 않은 상황은 3년간 계속되었다.


 



 


비난 여론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고, 협박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예정되어 있던 (취소되지 않은) 공연들을 계속 해 나갔고, 조금씩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주변의 상황의 호의적이지 않아 다음 앨범의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딕시 칙스에게는 ‘컨트리+팝’의 크로스 오버라는 그들의 장기를 맘껏 살려줄 확실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딕시 칙스의 선택은 ‘릭 루빈’이었다. 여성 삼인조 컨트리 밴드의 제안에 릭 루빈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이력엔 이미 컨트리계의 레전드, 자니 캐시(Johnny Cash) 앨범의 프로듀싱이 들어가 있었다.


 


릭 루빈은 채드 스미스(Chad Smith.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드러머)등의 절친들을 끌어들였고, 동시에 존 메이어(John Mayer), 보니 레잇(Bonnie Raitt)등 정상급 뮤지션들의 조인도 준비했다. 그렇게 딕시 칙스의 다음 앨범 Taking The long way는 릭 루빈에 의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6년,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등장한 딕시 칙스의 새 앨범은 발매 즉시 빌보드 1위에 오른다. 첫 번째 싱글 커트 된 곡은 'Not ready to make nice’였다. 릭 루빈과의 협업이 더할 나위 없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임과 동시에 그간 그들을 괴롭혀 온 세상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털스멜’까지 사랑하는 이 양반은 누구게?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싹쓸이했던 2008년으로부터 1년 전, 2007년 그래미 시상식의 주요 4개 부분 중 올해의 신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분의 주인공은 바로 딕시 칙스였다. 전쟁의 끝이 결국 잔혹한 허상에 불과했다는 여론도 그들의 수상에 한 몫 했다. 주요 부분 중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앨범은 뮤지션과 프로듀서, 엔지니어에게 주는 상이다. ‘릭 루빈’이라는 딕시 칙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확인된 것이다.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 조안 바에즈의 ‘세 명의 용감 무쌍한 언니들’이란 소개를 받고 등장한 딕시 칙스. 자신들의 노래 제목에 빗댄 나탈리의 수상소감은 이러했다.


 



‘나는 더 좋아질 준비가 되어있다. (I'm ready to make nice!)… 우린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자유를 더 누려야 한다.’



 


딕시 칙스는 얼마 전 공연실황을 발매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릭 루빈은 ‘마이더스의 문어발’답게 여전히 장르를 불문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슈퍼 뮤지션들이 릭 루빈은 찾고 있고, 릭 루빈은 능력을 갖춘 수많은 신인들을 픽업하느라 여전히 정신이 없다. 그리고 그의 외모는 여전히 정신 없어 보이지 않는다. 나탈리는 릭 루빈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그는 음악을 물건 찍어내듯 생산하지 않아요. 그는 음악이 발견되게 하는 능력과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생각해보니깐 그는 아마도 Guru인 것 같아요’.



 


일단 음악이 나오는 곳이면 릭 루빈이라는 문어발에 뭐든 하나 걸리게 되어 있다. 일단 하나 물리면 준비된 ‘들은 척’을 시전하도록 하자. 늘 말하지만 성공은 보장 못한다. 아무쪼록 이번 주에도 독자들의 ‘들은 척’의 무사 성공을 빈다.


 



The Long Way Around ? Dixie Chicks


 


** 딕스 칙스의 이야기는 영화 ‘Dixie Chicks : Shut Up And Sing’으로 영화화 되었다.


 


딴지뮤직 구내식당 수석쉐프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