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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19. 금요일
오덕요정 카인








* 참고로 이 기사는 각주 기능을 지원한다. 그리고 스크롤 압박이 심하다. *









0. 대화가 필요해

4.19 기념일이니(?) 거창한 명제로 시작해보자.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하다."



미안타. 거창하긴 커녕 그냥 1+1=2 수준의 상식 명제다. 저 명제를 졸라 철학적으로 깊이 파서 해석하지 않고, 그냥 커뮤니케이션을 '대화'로 번역하기만 해도 상식이다. 대화는 중요하다. 그래서 뭐?

과거 [더 딴지]에는 춘심애비의 글 '[전상서] 좌빨좀비가 수구꼴통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린 적이 있다.[1] 말이 겉돌고, 상호 오해하고, 아예 얘기할 기회도 없으니, 얘기라도 하자는 의도를 비단 춘심애비만 느낀 것은 아닐 것이고 정치 영역에서만 느끼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나'와 대화가 안 통하는 것 같은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다시 정치 영역의 예를 들자니 무안하지만, 지난 총선/대선 시즌에 새누리/공주님을 지지하면서 '문재인/안철수는 빨갱이잖아.' 라고 말하는 집안 어르신들과의 대화 같은 거 말이다. 사용하는 대화의 코드가 다르고 두뇌에서의 이해 프로세스 절차가 다르고 대화 주제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 다르고... 아주 그냥 복장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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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안 되면 그 얼마나 답답한가.



다시, 비단 정치만이랴. 일상 생활에서 이런 상황은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몇 달 전, 본지 필진인 이동현과 단둘이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실업자가 된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술을 사러 온 내 친구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몹쓸 짓을 해버렸는데, 그 이유는 내가 내 취미생활에 대해 아주 약간 - 그러나 그녀의 입장에선 매우 지나치게 - 썰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내 애인이 이 얘기할 때도 짜증이 솟구치는데 니눔 썰까지 듣자니 폭력적으로 변할 것 같다.' 술병에 맞지 않기 위해 대화 주제를 포기해야 했다.


종교 분야에서는 이 어려움을 몇 세기 동안 겪었다. 종교를 포교하려면 일단 대화가 되어야 하는데,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가니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거다. 여기서도 소통 불가의 문제가 일어났고, 그 결과로 작게는 멍석말이 후 추방, 크게는 순교가 야기되었다.

거창한 담론에서부터 하찮은 잡담에까지, 대화의 단절은 꽤 자주 일어난다. 커뮤니케이션 현상의 태생적 한계 때문인 부분은 철학적인 주제이겠지만, 대부분은 단순히 쌍방 간의 문화적 장벽 때문이다. 그렇다면 깊게 안 들어가도 된다. 대화를 위한 노력만 있으면 된다.

물론 그 노력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여러분은 어르신들에게 빨갱이 취급 당했고, 난 이동현에게 맞을 뻔 했고, 선교사들은 신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대화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빨갱이 사냥도 폭행 사태도 순교도 줄일 수 있다.

문화사회학과 기독교 선교학 등의 측면에서 보자면, 문화적 배경이 차이가 날 수록 대화의 가능성이 현저히 좁아진다. 이건 학문적 관찰의 결과다. 특히 문화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종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관찰하다가 발견한 건데, 민족도 같고 국가도 같아서 같은 문화집단(ethnic)이라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거주환경이나 사회계급이나 세대 등에  따라서 문화 배경이 상당히 달랐다는 것이다. 무리없이 종교가 전파될 것이라 생각했던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문화적 장벽이 뙇 떠오르는 것을 본 학자들은 민족, 종족 등의 단어를 대체할 개념을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나온 게 에쓰닉(ethnic)이다. 이 설명의 디테일은 (당연하게도) 틀릴 수 있지만 인과 관계는 대강 맞겠다.

그리고 난 이기적이며 능력에 한계가 있는 보통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소통 불가 상황에 대한 답이나 가이드라인을 전해줄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손댈 수 있는 부분만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게 어떤 분야냐고? 내가 이동현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맞을 뻔 했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내가 대화에 끌어오려했던 주제가 뭐였을까. 답은 간단하다. 나의 정체성 중 하나는 '덕후'다. 일찌기 '그것은 알기 싫다' 19회에서 UMC/UW는 내게 '오덕요정'이라는 별명을 선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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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게임 [둠]의 주인공 둠가이, 오른쪽이 유엠씨유위. 
애정:)을 담아 이 비교체험 이미지를 그에게 헌정한다.


글타. 일베는 물론이요 오유는 당연하며 온라인 공간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곳곳에 퍼져 있는 천만 덕후 영혼들이 내가 정한 '대화 시도의 대상'이다. 그들이 아니 우리가 즐기는 문화 컨텐츠에 대한 간단한 이해만으로도 대화의 기본 조건이 완성된다. 같은 것을 공유하여 문화 격차를 줄이면 대화 성공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더 많은 대화 상대는 풍요로운 인생의 열쇠다.

이제 눈치깠으리라. 여기까지 열심히 읽어내려온 독자 니덜은 다 낚였다. 지금까지 주워섬긴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니 에쓰닉 이론이니 다 미끼였다. 이건 단지 내가 덕질하는 분야를 소개하기 위한 연재물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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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분인 거 안다. 참아라.


하지만 동시에, 이 연재물은 여러분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컨텐츠를 소개하는 용도이기도 하다.

인생 뭐 있냐. 취직하기는 열라 힘들고, 취직하면 비정규직이라 불안하고, 정규직 돼도 물가만 높고 인건비 낮은 탓에 봉급은 이전가카꼬리만 해서 빚만 쌓여가고, 야근야근 열매를 안주삼아 마시는 소주 한 잔으로 버티면서 인생 팍팍해지기만 하지 않았나. 뭔가에 빠져들어 신나게 즐겨본 게 과연 언제적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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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없이 그냥저냥 살다가는 팍팍한 인생을 못 벗어난다. 
원의 한 방법은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익과 공익의 합치라는 것이다. 난 내 덕질 분야를 안내하게 되니 좋고, 니덜은 삶을 윤택하게 해줄 즐길거리를 찾아볼 수 있어서 좋고. 그냥 그런 걸로 퉁치고 넘어가자.

앞으로 한 주에 한 편씩, 이것저것을 다룰 것이다. 소재는 당연히 내가 덕질하는 분야다. 아마도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향후 다룰 소재를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도 있겠다. 즉 이것은 자기합리화 아니 문화컨텐츠 소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진심으로, 앞으로 디벼볼 분야와 장르 중에서 꽂히는 걸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유희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본성이고, 이런 관심의 정수는 결국 덕질이다. 적절한 덕질은 삶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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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일반화가 된 '덕후'에 대한 이미지. 

하지만 집에만 있다 보니 관계성이 부족해졌기에, 생리 욕구에 매몰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가 생겨났다. 실상 매니아나 오타쿠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 아닌가. 그러니 대화를 통해 그들의 사회성을 훈련시켜줘보자. 덤으로 나도.



첫회, "수퍼히어로물"로 시작한다. 물론 수퍼히어로를 죄다 다뤘다가는 나도 죽고 독자도 몰살할 것을 알고 있으니 걱정 마라.




1. 아이언맨

명색이 문외한/초심자를 위한 가이드로 기획된 연재물이니 쉬운 것 위주로 다뤄야 할 거다. 그러자 떠오르는 건 딱 하나, 수퍼히어로 영화의 기념비가 된 [어벤져스]다. 특히, 아이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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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 강한 아침 만약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아이언맨[3]



꾸물 기자가 이런 제보를 했다. "히어로물 같은 거에 아무 관심 없는 여자애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언맨에는 호감을 보이더라고요. 깔끔하고 매력적이고 부자라서 호감 요소가 있다던가..."

뭔가 '옛날옛적에' 삘이 나고 꾸물 기자가 여자를 알다니 부럽 허구라고 의심해볼 여지도 있지만 이건 괜찮은 지적이다. 피자 배달과 파파라치 촬영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스파이더맨보다는, 잘나가고 쌔끈한 아이언맨 정도는 되어야 최초 호감의 동기 부여가 된다. 게다가 부자인데 착한놈이라면, 이거슨 동심의 로망 아닌가.

게다가 아이언맨(본명 토니 스타크)은 80년대의 맥가이버와 마찬가지로 공대생의 로망이다. 폐기물 더미를 뒤적뒤적해서 자신의 수트를 직접 만들어 낸, 엔지니어 토니 스타크의 간지를 어느 공돌이들이 꿈꾸지 않을까. 문돌이인 나도 부러운 멋이라고 생각할 정도인데. 게다가 토니 스타크는 부자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CEO 겸 소유주이며, 예쁜 비서와 연애도 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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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샷] 이거 내가 직접 만듬 ㅇㅇ



당연하지만, 아이언맨을 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영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매력적이고 재수없는 바람둥이 토니 스타크를 완벽하게 형상화했다. 옛날옛적에 수퍼맨을 연기했던 크리스토퍼 리브 이후 가장 캐릭터와 싱크로율이 높은 수퍼히어로 배우다.

게다가 오는 25일에는 <아이언맨 3>가 북미보다도 일찍 개봉한다. 지금 관심을 가질 만한 시의성도 있다.

또한 아이언맨은 다른 수퍼히어로와의 크로스오버인 [어벤져스]로 이어진다는 데에서도 입문용으로 좋다. [어벤져스]는 각종 수퍼히어로를 한 컨텐츠에 출연시켜 팬들을 흥분시키는 종합선물세트 형태의 컨텐츠다. 영화 [어벤져스]는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헐크, 토르, 블랙 위도우, 호크아이의 여섯 캐릭터를 모아놓았고, 영화가 산만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훌륭히 불식시켰다. 또한 영리하게도, 아이언맨만이 아니라 캡틴 아메리카, 헐크, 토르의 영화를 사전에 범작 이상의 퀄리티로 만들어내 각 영화들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게 했다.




[어벤져스]의 하이라이트인 6인 단체 전투 장면. 특별히 3D 지원 영상으로 가져왔다.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당연히 원작 코믹스에 관심을 두게 될 거다.

그런데 미국 만화의 창작 형태 때문에 이 부분에서 난관이 생긴다. 한 작가가 한 캐릭터의 타이틀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작가가 맡았다가 손 떼고 한 캐릭터가 여러 타이틀에 동시 출연하고 하는 등 중구난방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작가 별로 사소한 설정의 차이가 존재하고, 이런 게 쌓여서 큰 차이도 만들어낸다.

영화에서는 아이언맨의 기원을 '회심한 무기 엔지니어'로 설정한다. 이건 1976년에 추가된 설정이다. 왜냐하면 아이언맨을 창조한 원작자 스탠 리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를 1963년에 창조해 베트남전 공간에 등장시키면서 반공주의자로 설정했기 때문이다.[5] 물론 미국과 적대적인 군대에 의해 미세 파편이 혈관에 박히는 불치의 부상을 입고, 여기서 생존하기 위해 독자적 에너지원을 만들어 몸에 박고 이를 배터리로 하는 수트를 착용한다는 설정은 대강 동일하다.

어쨌든 아이언맨은 냉전 시대가 만들어낸 캐릭터로 시작했고 세월이 지나 냉전이 붕괴하자 개인적인 심리 문제를 겪게 되는 캐릭터로 변모했다. 영화는 나름 이 둘을 동시에 잡아내려 시도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그래도 태생이 어디 갈까. 아이언맨은 무척이나 미국적인 캐릭터다. 그의 캐릭터 코드를 보라. 자본, 과학기술, 대기업, 전쟁무기, 적국 혹은 테러와의 싸움... 미국이라는 범주를 전혀 벗어나지 않고 그에 대한 비판적 고찰도 없다. 그냥 그걸 대변한다. 이게 아이언맨의 특징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이언맨의 동료인 캡틴 아메리카는 반대다. 온몸에 성조기를 두르고 2차대전 공간에 최초로 등장했던 캡틴 아메리카야말로 가장 미국적이고 국수주의적일 것 같지만, 정작 캡틴 아메리카는 아이언맨과 반대의 길을 간다. 아이언맨이 현실의 미국이라면 캡틴 아메리카는 이상적인 미국이다.


이 둘이 싸우는 이야기, 그게 한국에도 번역된 [시빌 워]라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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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 vs 캡틴 아메리카



초인들이 늘어나 수퍼히어로와 수퍼악당 노릇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국가적 이슈가 되자 미국 정부가 법안을 빼든다. 이름하야 '초인등록법안'. 정부에 등록을 하여 허가를 받지 않으면 능력이고 장비고 사용할 수 없고, 등록하지 않으면 범죄자로 수감된다는 것.

자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아이언맨은 당연히 여기에 찬성한다. 반면 캡틴 아메리카는 군인 출신으로서 이상적인 민주주의라는 이념에 충성하기에 인권 옹호를 위해 반대파를 이끌게 된다. 그리고 모든 수퍼히어로들이 이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운다.[6]

이 논쟁이 어떻게 진행될지 딱 보이지 않는가.

국가 질서가 감당하기 힘든 개인을 국가 질서 내에 강제로라도 편입시켜야 한다.
  → 초인이기 이전에 국가의 시민이고 그 이전에 인간이다.
    → 사실상 초국가적 개인이라 할 수 있으니 국가의 시민이라고 봐야 하는가.
      →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초인들에 대한 차별이며 경찰국가 발상이다.


글타. X-멘에서 돌연변이 설정으로 계속 다루고 있는 근대 시민권에 대한 보수/진보의 고찰이다. 즉 '국가의 통제와 인권의 옹호'라는 정치적 테마가 수퍼히어로물의 형태를 입은 것이다.

[시빌 워]는 쏟아져 나오는 캐릭터의 홍수를 우수한 두뇌 활동으로 소화해낼 수만 있다면 초심자를 중급자로 끌어올려주기에 충분하다. 재미도 있고 정치적으로 고민해볼 꺼리도 던져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캐릭터들에 대해 관심이 가는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시빌 워]를 추천한다. 다른 장르는 없냐고? 게임? 아서라. 어벤저스를 다룬 게임은 하나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7]

6 시빌워.jpg

맘 좋은 사람 나 한 부만 사주라. 얼마 전에 이사하다가 잃어버렸다.




1½. 멀티버스라는 것

영화를 통해 친숙해져 있는 수퍼히어로는 아이언맨이 처음이 아닌 거 다 알고 있을 거다. 수퍼맨, 배트맨 등등.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영화 [어벤저스]가 개봉했을 당시, 본지 필진 중 한 사람이(그나마 없는 명예지만 필명은 밝히지 않는다.) "왜 배트맨은 안 나옴?"이라는 느무느무 순수한 질문을 해버렸다. 이 질문의 퇴치(!)는 물뚝심송 님이 했다. "어벤저스는 마블이고 배트맨은 DC여. 소속사가 달라."

이게 뭔 소리인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미국 만화에는 양대산맥인 회사가 둘 있다. 하나는 마블 코믹스, 다른 하나는 DC 코믹스. 디시인사이드와 관계는 당연하게도 없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스파이더맨 등의 어벤저스는 마블 소속 캐릭터이다. X-멘과 판타스틱 4 역시 마블 소속이다.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그리고 요즘 청년들은 잘 모를 플래시는 DC 소속이다. 잘 안 알려졌지만 영화로도 나온 퇴마사 콘스탄틴 역시 DC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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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의 마법 계열 영웅 중 중심 캐릭터이며, 만화에서는 더욱 싸가지가 없다.



그런데 마블과 DC의 만화를 접하는 데에는 커다란 애로점이 있다. 도무지 뭐부터 잡아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미국 만화의 창작/생산 형태를 언급했다. 수많은 작가가 손을 대다 보니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커다란 부분에까지 설정이 어긋나고 스토리의 아구가 맞지 않는 일이 자꾸 발생했다. 하지만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었던 출판사는 '평행세계'라는 카드를 꺼내 든다. 작가들이 창작/생산한 이야기 중 몇 가지만 빼고 나머지는 다 정식 스토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쪽 이슈에서는 수퍼맨과 배트맨의 사이가 안 좋지? 이건 지구-1이야. 저쪽 이슈에서는 수퍼맨과 배트맨이 절친이지? 저건 지구-2야. 지구-1의 수퍼맨은 영웅이지만 지구-3의 수퍼맨은 악당이야. 대신 지구-3에선 악당들이 모두 영웅이지!" 아주 복잡하겠지?

이 평행우주 설정을 '멀티버스', 또는 '엘스월드'라 부른다. 사실 멀티버스와 엘스월드도 차이가 있는 개념이지만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리고 상급 오덕 동지들, 이런 거 시시콜콜 설명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가 친구 없이 온라인에서만 지내는 거다. 인내는 금이다.

최초에는 이게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동시에 작가들에게는 금단의 봉인 해제이기도 했다. 온갖 아이디어가 멀티버스라는 미명 하에 시도된다. 배트맨을 산업혁명 시절의 런던에 등장시킨다거나, 수퍼맨이 탄 우주선이 미국이 아닌 소련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식의 상상 말이다. 물론 이렇게 온건한 시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8]

최악의 시도는, 지구-1, 2, 3, 4, 5, 6... 이렇게 나뉜 각 멀티버스를 서로 연결하는 거였다. 지구-1의 수퍼맨과 지구-2의 수퍼맨이 만나 양쪽 세계를 둘 다 구할 방법을 찾는다... 이런 거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수십 개의 세계가 연결되고 어느 세계는 한큐에 날아가고 두 세계가 하나로 융합되고... 이런 일이 마블과 DC 양쪽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과는? 졸라 복잡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지나칠 정도로.

멀티버스가 남발되자 문제가 많아졌다. 골수 오덕 팬들도 지금 무슨 이야기가 어떤 인과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상업적으로는 더 심각했다. 새로운 독자가 유입되지 않았다. 자기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작가들만 신났다.

DC 코믹스는 큰맘먹고 이 상황을 해결하기로 했다. [플래시포인트]라는 통합 이슈를 발간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사의 모든 캐릭터/타이틀의 세계를 리부트해버린 것이다.[9] 마블은 이런 걸 아직 실행하지 않았다.

때문에 현재 <New! 52>라는 표제를 달고 발간되고 있는 타이틀 이슈는 쉽게 읽을 수 있다. 기원과 설정을 하나로 통일하거나 아예 새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문하고 싶은 우리 초심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2. 배트맨

배트맨의 기원은 리부트 이전에 대강 정리가 되었고 중요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배트맨의 특이점 몇 가지가 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배트맨을 직업으로 분류하면 탐정에 속한다는 식이 그런 것이다.

배트맨과 수퍼맨의 대화 중에 이런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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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허쉬], 1권, 5. 대결, 세미콜론 출판



수퍼맨의 정체성이 보이스카웃이고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공학자였다면 배트맨의 정체성은 탐정이다. 그는 갈고 닦은 탐정술과 고도의 기술 장비를 이용해 범죄 현장을 분석하고, 때때로 변장하여 탐문 수사를 벌이기도 한다. 영화에선 빠진 부분이다.

또한 배트맨은 살인을 하지 않는다. 이 점은 수퍼맨과 배트맨의 특징인데, 어쩔 수 없으면 살인을 하기도 하는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DC의 메인 캐릭터인 이 둘은 '선을 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특히 배트맨은 수퍼맨과 다른 지점에 서있는 것이, 수퍼맨의 불살주의는 도덕적 이유인 데 반해 배트맨의 불살주의는 도덕을 포함하여 사법 시스템과 개인철학까지 포함간다.

일단 배트맨은 치안 시스템이 무너진 도시의 자경단원이다. 사적 정의를 부정하는 현대 법 체계에 근거하면 배트맨 역시 범죄자이고, 때문에 몇몇 작가들은 배트맨을 연방 수배자로 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트맨은 자신의 역할이 도시의 사법 시스템이 정상화되도록 돕는 역할이라고 이해하고 있다.[10] 따라서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며 부모의 피살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경단이 된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배트맨의 불살주의다. 또한 살인을 시작하면 점점 더 타협하게 되어 상습적인 살인자가 될 것이라는 경각심 또한 존재한다.

팀 버튼부터 시작한 일련의 배트맨 영화는 이런 부분을 일단 뛰어넘어 배트맨의 캐릭터에만 집중했다. 리부트 된 후 배트맨을 잡은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런 요소를 사용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배트맨을 손에 잡아보고자 하는 중급 입문자라면 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이런 부분을 알고 있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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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처럼 보이지만 해치지 않아요.



이 불살주의 때문에 불세출의 악당, 아니 악마라 해도 되는 조커가 죽지도 않고 계속 나타난다. 배트맨에겐 조수(사이드킥, sidekick)인 소년 로빈이 있다. 그리고 조커는 2대 로빈인 제이슨 토드를 후드려 팬 후에 폭발로 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은 조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조커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 때문에, 후일 부활하게 된 제이슨 토드는 큰 충격과 상처를 받는다.

지금 배트맨 부문에서 중급자로 올라가게 되는 또 다른 두 가지 요소를 언급했다. 로빈, 그리고 초자연적 요소. 친절한 설명 들어간다. 앞 챕터에서는 전체적인 조망법을 논했으니 이번엔 오덕답게 파고들어가 보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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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과 로빈. 옛날고리짝 TV 드라마 버전.



로빈은 놀란 이전의 배트맨 영화에도 등장했고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마지막에도 이름이 살짝 등장했기에 익숙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배트맨의 파트너인 로빈은 최소 4명이며, 놀란의 '로빈'은 영화 오리지널이다.

1대 로빈은 리차드 딕 그레이슨. 비포 놀란 영화인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 앤 로빈]에 등장했던 로빈이 이 친구다. 곡예사 출신으로 아크로바틱이 몸에 익었고 고담의 폭력배에 의해 공연 중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딕이 부모를 잃는 공연장에 있었던 브루스 웨인은 딕과 자신의 공통점을 본다. 브루스 웨인은 소년의 보호자를 지원해 딕을 웨인 가문에 데리고 오고, 얼마 가지 않아 배트맨의 정체를 알게 된 딕은 배트맨에게 요청해 최초의 로빈이 된다.

딕 그레이슨은 장성해 몸매 좋은 미남이 되었다. 그리고 양아버지나 마찬가지인 배트맨에게서 독립해 나이트윙(Nightwing)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자경단이 된다. 배트맨 버금가는 능력을 갖고 있고 최근에는 브루스 웨인 부재시 배트맨의 대리, 아니 2대 배트맨을 할 정도로 장남 노릇을 톡톡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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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와이어라는 여성 초능력자는 
나이트윙의 엉덩이를 만지며 "요 팽팽한 엉덩이나 따라갈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딕 그레이슨이 나이트윙으로 독립하고 난 후, 배트카의 바퀴를 훔치다가 걸린 소년이 있었다. 그게 앞에서 거론한 2대 로빈 제이슨 토드. 절도 현행범으로 잡힌 것이 인연이 되어[11] 배트맨의 제자 로빈이 된 제이슨은 분노나 열정의 조절이 미숙한 단점을 보였다. 이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제이슨 토드 없애라'는 원성이 자자했다. 이에 DC 코믹스는 친모를 찾던 제이슨 토드가 조커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창고에 갇혀 죽음 직전까지 몰린 데까지 연재를 해놓고는, 전화 투표를 개설했다. '독자 니덜이 결정해.' 62표 차이로 제이슨 토드의 죽음이 결정됐다. 그리고 후에 알려지길 한 사람이 컴퓨터를 이용해 320표 이상 제이슨의 죽음에 투표했다고 한다. 지못미 제이슨.

제이슨 토드의 죽음은 배트맨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입힌다. 3대 로빈 팀 드레이크가 나타나기 전까지 배트맨은 혼자서 일한다. 팀은 배트맨과 로빈을 동경하는 소년으로 싹수가 좀 있었다. 리부트 이전의 설정으로는 싹수가 좀 과하게 훌륭해서, 독학으로 습득한 탐정 수사 기술을 통해 배트맨과 1, 2대 로빈의 정체를 간파하고는 브루스 웨인을 찾아가 로빈으로 써줄 것을 요청했다. 리부트 이후에는 먼저 배트맨의 눈에 띄었고, 처음부터 '로빈'이 아닌 '레드 로빈'이라는 이름을 쓴다는 정도로 살짝 수정되었다.

그런데 '졸라 복잡해서 설명하기도 미안한 사건'[12] 때문에 제이슨 토드가 부활한다. 되살아나 보니 자기를 죽였던 조커는 아직도 살아서 수용소를 들락날락거리고 있고, 새로운 로빈이 배트맨 옆에 있다. 제이슨은 큰 충격과 상처를 받고, 스승에게 받았던 불살주의를 폐기해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을 죽였던 조커가 과거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레드후드'라는 이름으로 자경단 활동을 시작한다. 물론 불살주의를 폐기, 그것도 적극적으로 폐기했기에 중범죄자들을 죽이는 데에 망설임은 없다.

12 레드후드.png

이 친구가 얼마나 스승/양아버지와 반대로 튀냐면,
검거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자 교도소 내의 중범죄자를 수십 명이나 의문사로 처리해버릴 정도다.
리부트 이후에는 배트맨과의 사이가 좀 나아졌다.



이왕 로빈을 비롯한 '배트맨 패밀리' 얘기를 시작한 거 끝까지 가보자. 3대 로빈인 팀 드레이크는 배트맨을 다룬 게임 등에서도 대부분 로빈으로 등장할 만큼 자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4대 로빈인 데미안 웨인 - 브루스 웨인의 친아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딕 그레이슨, 제이슨 토드, 팀 드레이크는 모두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피보호자로서 양자나 마찬가지였고 팀의 경우엔 친부의 사망 후에 정식으로 입양되기도 한다. [13] 그런데 데미안이라는 친자가 등장했다. 그리고 데미안의 성격은 부활한 후의 제이슨 토드만큼이나 시크하고 싸가지가 없다. [14] 이런 대화가 오간 적이 있다.

13 데미안.jpg

팀은 수양동생에게 나름 배려한 건데, 저 성격 보소. (번역은 내가)



수양형제 팀과 데미안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데미안이 로빈 코스튬을 입게 되고, 팀은 반독립을 한다. 현재의 로빈은 데미안 웨인이다. 물론 이 다음에 이어지는 스포일러가 있지만 언급하지 않겠다. 트위터로 물어보든가 검색을 하든가.

14 레드로빈.jpg

팀도 20대 직전이라 독립 욕구 무럭무럭



정식 로빈은 이렇게 넷이고, 간간이 일시적으로 로빈이었던 아이들이 있긴 하지만 죄다 쩌리인데다 리부트 이후엔 아직 등장도 없다. 그러니 패스.

하지만 '배트맨 패밀리'는 아직 더 남아 있다. 집사 알프레드? 그 만능 할아버지 말고. 배트걸이 있지 않은가.

영화만 봤던 사람들에게 배트걸은 알프레드의 조카일 것이다. 만화의 배트걸은 바바라 고든으로, 배트맨과 강한 동맹을 맺은 제임스 고든 경찰청장의 딸이다. 리부트 전에 간신히 정리된 설정에 따르면 고든 청장의 조카지만 부모 사망 후 양녀로 입양된다. 바바라는 네트워크 프로그래밍과 정보 처리와 체조에 재능이 있었는데, 배트맨의 활동을 보고 감명 받아 자경단 활동에 낀다.

당연히 10대 소녀의 정신나간 짓으로 봤던 배트맨은 제지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결국 배트걸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 로빈에 이은 두 번째 사이드킥이 된다.

배트걸 캐릭터는 배트맨 브랜드에 발랄한 10대 소녀의 분위기를 가미하는 역할이었다. 로빈들과 달리 어두운 구석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바라 고든의 역경은 이제 시작된다. 조커가 제임스 고든을 습격한 자리에 함께 있던 바바라는 복부에 조커의 총격을 정통으로 맞아버리고 나체 사진을 찍힌다. 더 안 좋은 것은, 총격으로 인해 바바라가 하반신 불수가 된 것이다.[15]

팬들은 이후 바바라 고든 캐릭터의 발전상에 환호한다. 바바라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다른 재능을 계발하여, 전문 해커이자 정보 브로커가 되어 고담의 자경단을 지원한다. 웨인 타워의 펜트하우스에서 네트워크를 다루는 그녀의 새 이름은 오라클(Oracle).

15 오라클.jpg

심지어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의 호신격투술도 연마했다.



바바라는 배트걸 코스튬의 제1권한을 갖고 있었고, 이후의 배트걸들은 그녀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2대 배트걸은 후일 헌트리스라는 이름을 쓰게 되는 헬레나 버티넬리, 3대 배트걸은 아마도 세계 최강의 무술가일 것으로 추정되는 카산드라 케인, 4대 배트걸은 범죄자 클루마스터의 딸인 스테파니 브라운으로 이어지지만... 리부트 전의 이야기일 뿐이고 리부트 된 지금은 바바라 고든이 기적적으로 하반신 불수에서 회복되어 배트걸 활동 중인 것으로 진행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데미안 웨인과 우정 혹은 썸씽을 나눴던 스테파니 브라운이 그립다.)

이런 배트맨 패밀리들은 스승인 배트맨과 특성을 공유한다. 배트맨은 무술과 탐정수사에 있어서 월드 클래스 거장이다. 당연히 나이트윙, 레드후드, 레드로빈, 로빈, 배트걸 모두 이 두 분야에 있어 달인이다. 또한 배트맨은 한국 오덕들에게 '뱃신(神)'이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용의주도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모든 가능성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늘 생각해두는 전략가다. 배트맨의 지성과 정신에서 약점은 오직 부모의 죽음뿐이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육체/정신/지성 모두를 극한으로 훈련 받았다.[16]

마블에 어벤저스가 있듯 DC에는 저스티스 리그가 있다. 수퍼맨과 배트맨이 중심이 되어 이끄는 수퍼히어로 집단인 저스티스 리그에서, 수퍼맨이 정신적 리더라면 배트맨은 실질적 리더 혹은 수석 참모의 역할을 한다. 초능력 하나 없는 인간이 초능력 보유자들을 지휘하거나 그들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을 정도이니 뱃신이라 불릴 만하긴 하다.

16 뱃신.jpg

배트맨의 정신적 안정성이 얼마나 인정받느냐 하면... 
수퍼맨은 자신이 세뇌되거나 타락할 경우를 대비해 배트맨에게 크립토나이트를 맡겨둔다. 
때문에 '수퍼맨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배트맨'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게 된다. 
크립토나이트가 뭔지 모르면 검색.



경력이 가장 짧은 데미안을 제외한 나머지 넷은 모두 각자가 소속된 팀이 따로 있는데, 스승이 유능한 리더다 보니 그의 제자들도 각자의 리그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된다. 나이트윙은 리부트 이전, 로빈 시절일 때 '틴 타이탄즈'라는 10대 수퍼히어로 팀을 이끌었다. 리부트 후에도 임시로 결성되는 팀에 끼게 되면 리더급에 속한다. 레드 로빈은 나이트윙의 뒤를 이어받아 새로운 틴 타이탄즈의 리더가 됐다. 레드후드 역시 '팀은 아니지만 같이 다니는'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상 팀인 '아웃로즈'에서 강한 통솔력을 보인다. 배트걸은 '버즈 오브 프레이'라는 여성 히어로 팀에서 리더다. 오라클일 때도 버즈 오브 프레이를 사실상 지휘하는 조언 역할을 했다.

배트맨과 그 사이드킥들의 이런 측면을, 영화에선 다루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에게는 새로운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나 제이슨 토드의 부활 같은 이야기는 극으로서 꽤 큰 매력이 있기 때문에 별도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배트맨: 언더 더 레드후드]로 다뤄지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이전에는 식물을 조종하는 포이즌 아이비나 냉각 무기를 이용하는 미스터 프리즈 등의 비사실적 캐릭터도 등장한 적이 있지만, 놀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덕분에 산에 얼굴 반쪽이 타버린 후 투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는 일찍 죽었다. 라즈 알 굴은 단지 불사의 전설이 따라다니는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베인은 독성 화합물을 흡입하여 자신을 강화하지 않는다. 놀란뿐만 아니라 팀 버튼도 펭귄의 캐릭터를 완전히 뒤바꿔버린 전례가 있다.[17] 팀 버튼의 펭귄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베인 때문에 오덕들이 얼마나 승질을 냈는지. (나도)

늘어놓다 보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오덕 동지들의 특성인 '아는 척 하기를 주체하지 못하기'가 발동된 것 같아 마음이 울적하다. 이 부분만 따로 빼서 '아는 척 하기' 코너로 만들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일단 이 정도를 살짝 훑어볼 수 있어야 중급자로의 길이 열린다는 의미로 봐주면 되겠다.

자, 이제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이야기와 설정을 즐기는 법을 알았다 치자. 하지만 국내에 번역된 만화는 많지 않을 뿐더러 원소스 멀티유즈의 시대이니 만화 외에도 수퍼히어로 컨텐츠를 덕질할 장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생각이 맞다. 이제(이제서야?) 알려주겠다.


첫 번째는 게임이다. 당신이 게임 좀 좋아하거나 게임 좀 해보고 싶다 싶으면, 그런데 아직 이 게임을 안 해봤다면... 정말 부럽다. 즐거운 경험을 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앞서서 어벤져스, 그러니까 마블 캐릭터 기반의 게임은 아무 것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영화 시즌을 잡아 빠르게 치고 빠지려는 의도로, 완성도도 낮고 아이디어도 별로 없는 게임을 만들어 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소개하는 배트맨 기반의 두 게임은 정반대다.

놀란의 영화 시즌과 겹쳐서 출시했지만 영화와는 관련이 별로 없고, 오리지널 스토리에다 엄청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 대작이었다. 첫 게임은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

17 아캄어사일럼.jpg

필진 페니레인 누님께 자신있게 추천하고 빌려드렸는데
돌려주겠다는 말은 커녕 재밌게 했다는 말도 없다.
그래서 그냥 마음을 비운지가 1년 째다.



고담의 정신질환 범죄자 수용소 겸 치료병원인 아캄 수용소를 무대로 하며, 배트맨의 탐정 요소와 액션 요소 모두를 구현해낸 훌륭한 게임 시스템을 자랑한다. 물론 잘 만들어진 시스템과 인터페이스만 덕목이었다면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이 출시 직후 '올해의 게임' 상을 타지는 못했을 것이다.

각종 악당 캐릭터의 개성을 반영한 전투 디자인과 그런 캐릭터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하여 모아놓은 게임 내 정보 파일은 이 게임이 '덕후 입문용 및 덕후 심화용'으로 매우 유용하다는 걸 증명한다. 캐릭터 정보를 모아 읽는 것만 해도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아래는 PC판의 실제 플레이 장면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제작사인 락스테이디(Rocksteady)는 일약 업계 스타덤에 올랐고 좋은 수퍼히어로 게임이 '죽지않는돌고래가 옷 잘 입는 확률'로 나오는 와중에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당연히 후속작을 하나 이상 내지 않으면 제작사가 바보다. <배트맨: 아캄 시티>가 후속작으로 나왔고, 당연히 얘도 '올해의 게임' 상을 받았다. 두 작품에는 차이가 있는데,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은 일방 진행형이라서 가볍게 즐겨도 충분한 게임이었지만 <배트맨: 아캄 시티>는 전작의 몇 배나 되는 대작으로 완성되었다.

18 아캄시티.jpg

작보다 더한 완성도였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게임으로서도, 수퍼히어로 컨텐츠로서도.



'아캄 시티'란 고담의 구시가지를 성벽으로 둘러싸 격리시킨 후 그 시가지 전체를 감옥으로 사용한다는 과격한 설정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전작의 아캄 수용소보다 몇 배는 더 넓은 이 아캄 시티가 무대이고, 거기다 오픈월드 게임[18]이다.

그럼 어디 [배트맨: 아캄시티]의 실제 플레이영상을 보는 게 어떨까.


물론 게임은 영 손에 안 맞는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얌전한 분들은 영화나 만화 말고 다른 장르는 없냐고 채근할 수도 있다. 내 덕후 레이더에는 소설 같은 건 안 잡혔지만, 왠만한 덕후들이 알고 있는 장르가 있다. 애니메이션과 TV 드라마다.

그런데 최근 수퍼히어로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는 많지 않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을 소개해주면 되겠는데... 이 또한 90년대에 주로 제작되었다. 그나마 배트맨 중에서 2000년도에 제작된 비교적 따끈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제목은 <더 배트맨>.

19 더배트맨.jpg

호불호가 엇갈린다. 골수 덕후들에게는 욕먹고 적당한 덕후들은 그냥저냥 인정.



<더 배트맨>은 만화를 기준으로 삼거나 하기보다는 만화를 원작으로 존중하는 별도의 시리즈로 기획된 것 같다. 배트맨 패밀리를 제외한 모든 악당 캐릭터들의 외모와 설정이 나름대로 바뀌는 등 독자적인 이야기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했다. 물론 이런 건 기존의 덕후들로 하여금 '원작 파괴!'라며 화를 낼 구실을 주기 충분하다. 하지만 난 다른 덕후 동지들과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다.

좀 더 객관적이려고 애쓰는 시선에서 보면, 그런대로 수작이란 말이다. 옛날 애니메이션인 <배트맨 TAS(The Animated Seried)>는 애니메이션 치고는 약간 어두운 편이었다. 그 후에 만들어진 <배트맨 NBA(New Batman Adventure)>의 경우에는 반대로, 배트맨답지 않게 밝고 명랑한 분위기였다. 각각 당시 시즌의 배트맨 영화를 제작한 팀 버튼과 조엘 슈마허의 영향 때문이 아니겠냐는 추측도 있지만... 다소 가벼운 경향이 있는 애니메이션 장르의 성향과, 어두운 분위기가 강점인 배트맨 브랜드의 결합에 있어 <더 배트맨>은 나름의 균형을 찾았다고 본다.

또한 선배 컨텐츠에 대한 존중도 충분하다. 과거 드라마의 클리셰를 이용해 꾸민 에피소드라거나, 작중의 로빈인 딕 그레이슨 자신의 게임 캐릭터 이름을 나이트윙으로 하는 등의 디테일은 이 브랜드의 덕후에게는 나름의 재미를 준다.

물론 쉽고 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입문자에게도 꽤 좋다. 시즌3 정도부터는 떨어지는 시청률 때문인지 저스티스 리그의 온갖 수퍼히어로들이 잔뜩 등장하긴 하지만, 어쩌면 이 또한 장점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더 배트맨>은 입문에 좋다.[19]

<더 배트맨>은 국내에서도 '카툰 네트워크 코리아'에서 방영한 적 있고, 같은 채널에서 <더 배트맨> 이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배트맨: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를 <배트맨: 더 브레이브>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배트맨: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는 꽤 옛날 감성으로 회귀해서 추천하기는 약간 꺼려진다.



3. 그린애로우

그래. 인정하겠다. 난 특별히 배트맨 브랜드의 덕후다. 그래서 배트맨 챕터가 길었다. 그리고 독자들 중 쌩초짜 입문자, 예를 들면 '내 주변 어딘가 있을 수퍼히어로 덕후를 포용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읽어내려온 착한 마음씨의 여성' 같은 사람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배트맨 챕터를 마무리하며 '최근에는 수퍼히어로 드라마가 거의 없다'고 했는데, 맞다. 수퍼맨의 청소년 시절을 다룬 <스몰빌> 이후에는 딱히 주목할 만한 게 없었다. 없다가, 이번에 새로 나온 것이 있다.

그린 애로우를 다루는 <애로우>가 그 신작이다. 썰을 풀기 전에 앞서의 여성 독자들에게 헌정하는 조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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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우>에서 그린 애로우 역을 하는 스티븐 아멜의 몸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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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애로우는 이렇게 섹시하고 터프하게 훈련한단다.



DC 코믹스의 대대적인 리부트의 수혜를 제대로 받은 캐릭터 중에 하나인 그린 애로우. 그는 마블 어벤저스에서 활을 다루는 캐릭터인 호크아이와 대응되곤 한다.

원래 그린 애로우의 시작은 배트맨의 모사품으로 시작했다. 고담과 유사한 분위기의 스타 시티에서 자경단을 하는 그린 애로우의 본명은 올리버 퀸. 퀸 인더스트리라는 대기업의 소유주이자 CEO다. 당연히 이뭐배트맨짝퉁이다. 이렇게 시작은 미약했으나, 차차 좋은 작가들이 그린 애로우에 손을 대면서 점점 메인급 캐릭터로 성장해갔다. 나중에는 저스티스 리그의 2대 의장을 맡을 정도의 비중으로 말이다.

왜 그린 애로우가 리부트의 수혜를 받았다고 했을까? 리부트 비포/애프터의 그의 외모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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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리부트 전에는 수염 기른 중년 아저씨다. 
나이가 대략 본지 수뇌부의 게으른수다쟁이 팀장 정도 될 거다. 힘내세요 팀장님.[20]



23 뉴그린애로우.jpg

리부트 이후 수염이 줄었다. 아마도 이는 동시 출격하는 드라마의 캐릭터와 맞추기 위해서인 듯하다. 
참고로 <스몰빌>에 등장한 그린 애로우 캐릭터 역시 수염을 말끔히 밀고 나왔다.



그린 애로우는 한국에 정말정말정말로 안 알려진 캐릭터다. 그나마 <스몰빌>에서 준주연급으로 등장한 적이 있지만 이 정도의 네임 밸류를 가진 캐릭터 치고는 심하게 듣보잡이다. 그러니 기원 설정부터 썰을 풀어보자.

올리버 퀸은 방탕한 부잣집 망나니 도련님이었다. 바다로 요트 여행을 나갔는데 하필이면 졸라 센 폭풍을 만나 무인도에 표류한다. 그리고 무인도에서 생존하기 위해 갖고 있는 도구를 이용해나가는데, 그 중에서 사냥용으로 만든 활이 그의 미래를 바꾸는 도구가 된다. 여기서 약간 다른 설정이 생기는데, 표류한 무인도가 정말 무인도인 경우가 있고, 반대로 용병 조직이나 국제 범죄 조직이 훈련장 내지는 기항지로 사용하는 무인도인 경우도 있다. 아무튼 그런 곳에서 몇 년을 생존하다가 간신히 구조 받아 고향인 스타 시티로 돌아온다. 돌아온 올리버 퀸은 사람이 바뀌어 있었고, 이제는 활을 든 자경단원이 되었다.

그린 애로우의 특이점은 유사한 다른 캐릭터와 비교할 때 극명해진다. 특히 정치적으로.

수퍼맨이나 아이언맨은 워낙 사기캐릭터다 보니까 외계인이나 초거대 테러 조직이나 그들 자신 정도의 능력을 가진 강력한 개인 같은 거국적 위기 상황에 주로 개입한다. 자연히 그들의 관점은 정부친화적이고 중앙정부적이 된다.

반면 배트맨의 경우엔 사적 정의를 실현하는 자경단원답게 기본적으로는 수배범 신분이다. 배트맨처럼 자신의 지역을 자신이 직접 지킨다는 자경주의 성향은, 이민국가로 시작하여 본국 영국에 대한 반란으로 독립한 미국의 특수성이다. 따라서 배트맨은 수퍼맨/아이언맨보다 미시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며 지방정부를 우선시한다.

배트맨이 그린 애로우와 다른 점은 얼마나 진보적이냐 하는 것이다. 배트맨은 정부의 권력 집행자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인식을 보인다. 그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사회 시스템의 복원이다. 그린 애로우는 시스템을 쥔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배트맨이 공화당 온건파라면 그린 애로우는 민주당 중도파 내지는 과격파에 해당한다.

리부트 이전 그린 애로우의 전력은 재미있다. 일단 올리버 퀸은 브루스 웨인보다 훨씬 공격적인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을 벌이다 회사의 재정 상태를 말아먹는다. 주주들에 의해 쫓겨난 올리버 퀸은 진보적 칼럼을 쓰는 시사 칼럼리스트가 되었다가 정치에 도전해 스타 시티의 시장으로 당선되기도 한다. 사회 시스템이 붕괴한 도시에 대한 해법으로 시스템의 복원이라는 보수적 해결법을 제시하는 배트맨과는 매우 다른 지점에 가있다.

이런 정치적 특성이 리부트 이후에 살아남았는지는 아직 더 두고봐야 한다.[21] 초반 이슈가 스너프 필름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는 자들과의 싸움 정도였기 때문에. 다만 정치성이라는 특성은 드라마 <애로우>에 어느 정도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 그린 애로우가 자경단을 시작하는 직접적인 동기는 난파된 보트에서 아버지가 죽기 직전 들려준 고백이다. 아버지 자신이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하여 스타 시티의 현재가 망가졌으며 그 정치적 사조직의 멤버들이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 이 유언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올리버 퀸은 도시에 귀환하자 '아버지의 리스트'에 있는 이름을 사냥한다. 파산시키고, 감옥에 보내는 등. 살인은 정 여의치 않으면 감수하지만 최대한 자제한다.

24 애로우.jpg

채널 CW의 드라마 <애로우>. 현재 시즌1 방영중. 배우들이 모두 쌔끈하다는 것에 주목.



드라마는 어느 정도 수작으로 나오고 있는데,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액션이나 테크놀로지 설정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 액션은 유치해죽겠고, 기발한 기능의 화살을 사용하던 모습은 아직 안 나온 것인지 기술적 상상력도 그닥 보이지 않는다.


반면 장점은 확고하다. 캐스팅이 쩐다. 일단 주연인 스티븐 아멜의 외모부터가 샤방샤방하다. 그 외의 모든 캐릭터가, 청년중년 할 것 없이 모두 잘 생기고 예쁘다. 이게 무슨 의미냐고? DC가 이 드라마를 일부러 '초심자 입문용'으로 만들고 있다는 거다. 진입 장벽을 낮춘 거다. 그렇다고 연기력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엄청나지도 않지만, 딱 적당한 수준.

게다가 <애로우>는 한국 드라마마냥 인물의 얼굴 클로즈업이 많다. 클로즈업은 인물의 심리 상태를 관객에게 가깝게 전달할 때 쓴다. 즉 드라마는 액션이나 서스펜스에 비중을 싣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 간의 심리적 관계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에 걸맞게 배우들의 연기도 주로 내면 연기다. 액션이 유치한 이유가 있는 거다.[22] 물론 트레일러에는 그렇게 안 보이게 편집해놨지만.


드라마 본편의 특성을 표현하지 못한 트레일러라 하겠다.



쌔끈샤방프리티한 배우들이 나와서 관계와 심리로 풀어가는, 수퍼히어로물답지 않은 수퍼히어로물이 <애로우>다. 이건 그린 애로우의 입문작으로 딱 좋겠다. 일반적인 여성들의 취향과 꽤 들어맞는다.

그리하여 미남미녀들의 안구정화 사진을 마지막으로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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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퀸의 동생인 테아 퀸으로 연기하는 윌라 홀랜드. 입매가 매우 귀염귀염. 
별명이 스피디인데, 만화에서는 그린 애로우의 사이드킥인 로이 하퍼와 미아 데어든의 이름.



26 로이하퍼.png

최근에 로이 하퍼 역으로 합류한 콜튼 헤인즈. 생계형 날치기로 나온다. 
이름인 '스피디'와 마약 경력은 테아 퀸 캐릭터에게 뺏긴 듯하지만 외모는 여성들에게 딱일 듯. 



27 토미멀린.jpg

올리버 퀸의 친구인 토미 멀린 역의 콜린 도넬. 외모/성격 모두 훈남. 
특히 방탕한 재벌 2세에서 조금씩 성장하려는 모습이 여성들의 심금을 울린다고. 
이 이름은 만화의 악당인 '멀린 더 블랙 아처'의 이름.




-. 수퍼히어로물이 글치 뭐

수퍼히어로라는 하위 장르는 미국에서 탄생해 미국에서 발전했다. 앞에서 살짝 언급한 자경주의의 전통, 사회 시스템이 붕괴 혹은 붕괴 직전까지 갔던 대공황 시절의 경험 등에서 싹이 튼 서사 장르다. 다른 국가에서는 이런 식의 서사가 나오기 힘들다.

수퍼히어로들이 타자(他者)를 대하는 방법은 이분법에 가깝다. 상당히 적나라하게 폭력적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이를 창작하고 소비하는 미국인들의 인식 체계를 반영하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런 걸 창작자들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아시아계, 아랍계, 동성애자 등의 캐릭터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그래봐야 태생적 한계를 쉽게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단 자신들의 현재를 반영하는 이야기가 '대결의 플롯'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수퍼히어로 이야기를 대할 때에는 적당한 색안경이 필요하다. 자경주의의 전통과 G1이라는 자뻑, 대결이나 전쟁이 아니면 세계를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대중문화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 색안경을 올바르게 착용한다면 '현대의 신화'라고 하는 수퍼히어로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수퍼히어로 장르를 이해할 수 있다면 미국을 바라볼 시선을 얻을 수 있다. 덤으로 나 같은 덕후와도 대화가 가능하다. 우리 모두 외롭지 않은가.

그리고 의미를 다 떠나서, 지금까지 썰을 푼 문화 컨텐츠들을 취미생활로 만들면 팍팍한 일상에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여유가 없었고 즐거움이 없었다면 마음 닿는 것부터 시작해 즐겨나 보자. 생각보다 재미있을지 누가 아는가. 더군다나 덕질은 적당히만 하면 돈이 별로 안 든다. 사실이다.

부디 당신의 삶이 조금 더 재미있기를. 다음 주에는 좀 더 분량이 적은 주제로 돌아오겠다.





본문에서 다룬/연계되는 컨텐츠
- 국내에서 구매 혹은 입수 가능한 것만.
- 검은색 이외의 색은 위에서부터 시간/인과순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1. 아이언맨
영화 [아이언맨], 2008년 개봉, 2010년 재개봉 / 입문자용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 2008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아이언맨2], 2010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퍼스트 어벤져], 2011년 개봉 /입문자용
영화 [토르], 2011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어벤져스], 2012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아이언맨3], 2013년 4월 25일 개봉 예정 / 입문자용?
  ★ 어벤저스 영화 시리즈의 밤샘 상영회가 있어 소개한다. 'SF&판타지 도서관'에서 바로 내일 20일 오후 10시부터 날밤까면서 진행된다. 나도 간다. 나 보고 싶어서 와도 된다. (관장님 인상이 매우 좋다.) 안내는 여기를 누르면 된다.
도서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시공사, 2009년 출판 / 입문자용
도서 [아이언맨: 엑시큐트 프로그램], 시공사, 2013년 출판 / 입문자용
도서 [아이언맨: S.H.I.E.L.D. 국장], 시공사, 2013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시빌 워], 시공사, 2009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시빌 워: 아이언맨], 시공사, 2010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시빌 워: 스파이더맨], 시공사, 2011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시빌 워: 캡틴 아메리카], 시공사, 2013년 출판 / 중급자용

1½. 멀티버스라는 것
영화 [콘스탄틴], 2005년 개봉 / 안 봐도 됨
도서 [플래시포인트], 시공사, 2013년 출판 / 상급자용

2. 배트맨
영화 [배트맨], 팀 버튼, 1990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배트맨2], 팀 버튼, 1992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배트맨 포에버], 1995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배트맨 앤 로빈], 1997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배트맨 비긴즈], 2005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다크 나이트], 2008년 개봉 / 입문자용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년 개봉 / 입문자용
도서 [배트맨: 이어 원], 세미콜론, 2008년 출판 / 입문자용
도서 [배트맨: 허쉬], 총 2권, 세미콜론, 2008년 출판 / 입문자용
도서 [배트맨: 킬링 조크], 세미콜론, 2010년 출판 / 입문자용
도서 [배트맨: 롱 할로윈], 세미콜론, 2011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배트맨: 다크 빅토리], 총 2권, 세미콜론, 2012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배트맨: 패밀리의 죽음], 세미콜론, 2012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배트맨: 나이트폴], 세미콜론, 2012년 출판 / 중급자용
도서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 세미콜론, 2012년 출판 / 상급자용
도서 [DC: 더 뉴 프론티어], 총 2권, 시공사, 2012년 출판 / 상급자용
게임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 2009년 출시 / 입문자용
게임 [배트맨: 아캄 시티], 2011년 출시 / 중급자용
애니 [배트맨 TAS], 1992~1996년 방영 / 입문자용
애니 [배트맨 NBA], 1997~1999년 방영 / 입문자용
애니 [더 배트맨], 2004~2008년 방영 / 입문자용
애니 [배트맨: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 2008~현재방영중 / 중급자용
애니 [배트맨: 언더 더 레드후드], 2010년 개봉 / 중급자용

3. 그린 애로우
드라마 [애로우], 2012~현재방영중 / 입문자용
드라마 [스몰빌], 2001~2011년 방영 / 중급자용
도서 [저스티스], 시공사, 2008년 출판 / 상급자용



각주>
  1. 제3호 340페이지에서 시작한다.   [본문으로]

  2. 놀랐지! 연재물이다!   [본문으로]

  3. 이 드립을 이해한다면 덕후들과의 대화 성공률이 높다. 1998년에 한국에 출시된 게임 <마이트 앤 매직 6>의 전설적인 번역문 때문에 생겨난 드립이다. 원문은 "Hello there! Mighty fine morning! if you ask me, I'm Waldo."다. 고등학교 수준 영어만 할 줄 알아도 이걸 "안녕, 정말 상쾌한 아침이군! 나는 왈도라고 하네."라고 번역하겠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저렇게 번역이 되었다. 요새도 웹툰 등에서 열심히 패러디되고 있는 클래식이다. <마이트 앤 매직 6>의 오역과 발번역은 유명하다. 용의 성채(Dragon's Keep)을 '드라군의 음식물'로 번역했을 정도.  [본문으로]

  4. 여기서 공대생 평균의 욕망도 도출할 수 있다. 자기 분야에서 대성하여 인정받고, 돈도 벌고, 예쁜 여자와 연애도 하는 것. 왠지 마지막 항목에서 약간 눈물이 흐르는 것 같다. 갑자기 공대 출신인 너클볼러 님이 생각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그는 현재 유부남이다. 다행이다.   [본문으로]

  5. 후에 스탠 리는 매카시즘의 영향 때문에 반공주의로 시작해버렸다며 후회는 한다.   [본문으로]

  6. 스파이어맨 피터 파커의 경우에는 좀 불쌍하다. 최초에 법안 찬성파여서 정부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정체를 공개했다가, 직장 짤리고 고소 당하고 가족이 공격받는 등 나락으로 떨어진 후 반대파로 갈아탄다.   [본문으로]

  7. 어벤저스 관련 게임은 모두 영화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 연계 출시 되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망작 아니면 망작 직전의 상태다. 캡틴 아메리카의 게임이 그나마, 그으나마아 할 만하고 토르와 헐크의 게임은 최악이다.   [본문으로]

  8. 이런 멀티버스 중 내가 목격했던 충격과 공포의 멀티버스는 DC의 지구-11이다. 모든 수퍼히어로의 성별이 정반대가 되어 있는 지구다. 수퍼우먼, 배트우먼, 아쿠아우먼... 그리고 원더맨. 상상해보자. 원더우먼은 여전사이기에 골격이 튼튼하고 체구가 좋다. 그리고 곱슬머리다. 이걸 그대로 남성으로 바꿔보라. ...젠장.   [본문으로]

  9. <플래시포인트>는 매우 복잡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궁금하다는 사람을 위해 한큐에 설명해준다. 플래시는 빛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시간 여행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거 자제하고 안 하던 플래시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시간 여행을 감행해 과거를 바꿔버린다. 그런데 이 때문에 현재가 이상하게 바뀌어버리고 그 여파가 다른 멀티버스로 튀거나 새로운 멀티버스가 만들어지거나 존재하던 멀티버스가 사라지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자, 플래시는 다른 수퍼히어로의 도움을 받아 모든 걸 바로잡는다. 이 과정에서 모든 멀티버스가 정리되어 몇 개만 남는다. 근데 이런 거 알아봐야 오덕 냄새만 나니 몰라도 된다.   [본문으로]

  10. 이 때문에 배트맨은 원래 신분인 브루스 웨인으로서도 노력한다. 도시에 각종 자선 사업을 벌이고 다양한 사회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등 도시의 사법과 교육 시스템이 정상화되도록 말이다. 이는 같은 갑부 캐릭터인 그린 애로우도 하는 일이지만 아이언맨은 좀 소홀하다. 이건 아이언맨이 자경단으로서의 성격보다 초국가적 개인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 몇 년 전에 포브스 지가 재미로 뽑아본 수퍼히어로 재산 순위에 따르면 아이언맨이 배트맨을 밀어내고 1위에 등극했다.   [본문으로]

  11. 이 기원 또한 작가 별로 약간 달랐던 적이 있다. 토드 패밀리 역시 그레이슨 패밀리처럼 곡예사 가족이었다는 설정이 있었다. 물론 이런 거까지 외우고 다니는 나같은 덕후를 이해하고 포용해주기 위해 지금 이걸 읽고 있다는 것, 잊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본문으로]

  12. 상급 오덕을 노리는 소수를 위해 이것도 간단히 설명해준다. 멀티버스 중 하나에 사는 수퍼맨이 심각하게 비뚤어져 있었다. 이 수퍼맨은 우여곡절을 거쳐 수퍼보이 프라임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매우매우 강했다. 얼마나 강하냐면, 주먹을 휘둘러 현실 그 자체에 타격을 줄 정도로. 비유 아니다. 진짜다. 그리고 수퍼보이 프라임이 현실을 뜯어고쳐서 고향 행성인 크립톤을 되살리고 '완벽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난장을 피우는데, 이 여파 중 하나가 제이슨 토드의 부활이다. 수퍼보이 프라임이 난리치는 이 이슈의 이름은 <인피니트 크라이시스>로 리부트 이전의 DC 코믹스에서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는 이벤트였다.   [본문으로]

  13. 리부트 이후에는 갱 조직의 표적이 된 탓에 팀 드레이크로 개명을 하고 브루스 웨인의 밑으로 들어가는 걸로 바뀌었다.  [본문으로]

  14. 왜냐하면... 악당으로 분류되며 일시적으로 배트맨의 연인이었던 탈리아 알 굴이 시험관 수정으로 낳아, 세계를 정복할 아이로 히말라야 사원에서 가혹하게 키웠기 때문이다. 놀란 3부작을 봤다면 탈리아 알 굴이 악당 라즈 알 굴의 딸이라는 것을 기억할 거다.   [본문으로]

  15. 부상입은 바바라의 나체 사진을 촬영한 조커의 의도는 제임스 고든에게 온갖 정신 공격을 가하여 그를 광기의 세계로 빠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고든은 구타, 학대, 고문을 모두 이겨내고, 도리어 배트맨이 폭주하지 않도록 "원리원칙대로야, 알았나? 그놈한테 보여줘야 해! 우리 식 방법이 먹혀든다는 걸 그놈한테 보여줘야만 해!" 라고 당부한다.   [본문으로]

  16. 4대 로빈 데미안의 경우에는 아버지 배트맨의 교육뿐 아니라 유년 시절에 어머니 탈리아 알 굴에게서 제왕학 교육도 받은 바 있다. 10살 나이에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뗐다나.   [본문으로]

  17. 영화와 만화의 차이를 살짝 보자.(살짝?)
    투페이스의 경우, 그의 얼굴에 산을 뿌려 태운 사람은 조커가 아니라 마피아인 살바토레 마로니이며 장소는 살 마로니가 증인으로 증언하는 법정이었다. 이후 하비 덴트는 정신분열을 겪어 질서/혼돈의 두 인격을 한 몸에 가진 투페이스가 되고, 범죄계로 진출해 갱 두목이 된다.
    라즈 알 굴의 경우엔 진짜 불사다. 정확히는 죽은 시체도 되살려주는 '라자루스의 구덩이'라는 화합물을 갖고 있고, 죽으면 여기 들어가서 살아 나오는 것이다. 탈리아 알 굴이 제이슨 토드를 소생시킬 때도 라자루스의 구덩이를 사용했다. 제이슨의 육체는 살아났는데 죽음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 탓에 정신이 회복되지 않자 탈리아가 제이슨을 라자루스의 구덩이에 넣은 것. 라자루스의 구덩이 덕에 라즈 알 굴은 몇백 년을 살았다. 여기에 부작용이 있는데, 라자루스의 구덩이로 부활하면 잠시동안 광기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장기 사용한 라즈 알 굴의 사고 방식이 뒤틀려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베인이 쓰고 있는 마스크가 무슨 용도인지 궁금하지 않았나? 영화에선 아무 설명이 없었지만 만화에선 그게 바로 베인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한다. 베인은 산타 프리스카라는 남미의 가상 국가 출신이다. 아버지는 산타 프리스카의 혁명가로, 반정부 활동 중 감옥에 갇혀 감옥에서 아들을 낳는다. 아버지는 곧 죽고 이름도 없이 자란 베인은 교도소에서 자행되는 인체 실험에 자원한다. 실험의 내용은 독성 화합물을 체내에 주입해 신체를 강화하는 것. 실험을 통과하여 힘을 얻기 위해 베인은 육체/정신/지식을 극도로 단련하고, 결국 실험을 통과한다. 베인이 독을 자기 몸에 주입할 때는 혈관과 식도를 통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스크는 식도용으로 보인다. <배트맨 앤 로빈>에서 베인이 만화의 컨셉대로 등장하긴 하지만 대사 한 마디도 없는 무뇌괴물이어서 오덕들의 분노를 샀다. 우리으 베인은 그렇지 않다능! 육체와 지성 모두 일류라능!
    팀 버튼의 펭귄은 기형으로 태어나 어릴 적 버려진 비극적 캐릭터인데, 만화의 펭귄은 전문 범죄자다. 사소한 신상은 설정 별로 약간씩 다른데, 그의 집안인 코블팟 가문 자체가 범죄로 잔뼈가 굵은 집안이라서 가업을 이은 경우와 정반대로 코블팟 가문의 이단아인 경우 두 가지가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펭귄은 고담의 갱 두목 중 최고급 거물에 속한다. 설정에 따라 수집가의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본문으로]

  18. 뛰어다니든 망토 행글라이더로 날아다니든 돌아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미션이 솟아오른다. 메인 미션을 하다가 저 서브 미션을 할지 아니면 서브 미션 먼저 하고 메인 미션을 나중에 할지 뭐 이런 진행의 순서는 플레이어의 마음이다. 어느 정도 유저에게 자유도를 허락한 것이 오픈월드 게임이다.   [본문으로]

  19. <더 배트맨>은 애국심 마케팅도 가능했다. 한국인 프로덕션이 제작했거든.   [본문으로]

  20. 그린 애로우 뒤에서 빨간 활을 들고 있는 친구는 그린 애로우의 사이드킥인 스피디. 본명은 로이 하퍼로, 마약중독자의 길을 걸었다가 갱생하여 현재는 무기전문가 아스널(Arsenal)이라는 이름으로 레드후드 제이슨 토드의 팀 아웃로즈에 들어가있다.   [본문으로]

  21. 그린 애로우가 리부트로 인해 손해본 건 있다. 리부트 전에는 저스티스 리그의 주요 멤버였으나 리부트 후에는 리그 가입을 신청했다가 까였다.   [본문으로]

  22. 덕후로서 눈에 들어오는 사소한 단점도 있긴 하다. 일단 몇몇 안티 캐릭터의 원전이 아쉽다. 현재까지 등장한 캐릭터 중 헬레나 버티넬리는 배트맨에서 2대 배트걸이자 헌트리스로서 활동하는 자경단 캐릭터다. 악당 캐릭터인 데드샷 역시 배트맨의 캐릭터다. 배트맨 브랜드에서 악당 파이어플라이로 등장했던 인물도 쓰였다. 메인 악당 캐릭터인 데스스트로크와 멀린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배트맨 브랜드에서 가져온 거다.   [본문으로]






  23. 오덕요정 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