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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사족을 좀 곁들이자. 

 

사족1) 몇 주 전부터 죽지않는돌고래 편짱의 노련한 원고독촉이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글이 나오질 않았다. 징검다리 연휴를 앞두고 본업이 바빴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역사적 대선 코앞에서 대놓고 맘에 없는 핑크빛 희망을 노래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독자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할 타이밍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족 2) 개인적인 일이지만, 필독님은 춘심애비라는 이름을 처음 딴지마빡에 걸어준 사람이다. 

 

사족 1+2) 이런 두 맥락이 합쳐지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투표만 잘 해낸다면, 그래서 정권교체를 이뤄낸다면, 앞으로 우리가 줄기차게 해야 할 대화는 바로 이런 대화이지 않을까. 필독님이 쓴 <심상정 유감>과 같은 반론이 제기되고, 그에 대한 재반론이 재기되는 이런 대화. 우리가 10년간 잃고 있었던, 소위 ‘생산적 대화’ 말이다. 






 

필독님께 다시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해보자. 

 


“현기차 생산직의 노동은 직업을 갖기 위해 투입해야 할 재능, 비용, 노력, 그리고 노동 자체의 강도와 수준에서 비슷한 연봉을 받는 의사의 의료노동과 큰 차이가 난다. “ 


 

노동자의 임금을 규정하는 기재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그 노동자가 그만큼의 생산성을 갖추기까지 투입된 시간과 노력에 따라 임금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소위 ‘전문직’의 고임금은 이렇게 설명된다. 똑같이 사회 초년생이라 할 때, 19세에 기본교육만 받고 바로 투입된 육체 노동자에 비해, 전문직인 4~10년가량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교육비와 그 시간을 투자했고, 그에 따라 생산성이 더 높아졌기 때문에,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더이상 고전적이지는 않은 현대의 시장에서, 임금 수준의 규정은 반드시 저 원칙만을 따르지는 않는다. 단적인 예로, 금융수익에 대한 기여도의 측면은, 고전 경제학에서 노동자의 임금으로 해석되지 않지만, 현대에는 임금의 형태와 수수료의 형태를 동시에 지닌다. 예컨데 수조짜리 M&A 협상에 참여한 사모펀드 측 피고용인은, 그 수조 원의 거래가 성사되는 대가로 수십억을 받는다. 이는, 거래에 대한 수수료임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가 된다. 이 액수는 그들이 엘프족마냥 수천 년씩 살아왔지 않은 이상 고전적 시각에서는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21세기 자본론’의 토마 피케티의 말처럼, 21세기 현대사회는 자본 이득 및 자본 소득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돈이 모이면 무조건 은행에 고이 모셔두는 게 전부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 시대는 단돈 100만 원도 어떻게든 굴려서 만 원이라도 더 만들어내는 걸 미덕이자 능력으로 보는 사회다. 수많은 투자상품이 개발되면서 일반인들도 쌈짓돈으로 채권에 투자 하며 부도율을 타진해보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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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수십조의 자본으로 수조를 만드는 투자는, NASA의 화성탐사 못지않은 치밀한 연구가 이어진다. 생각해보자. 100만 원 투자로 연 수익이 10%냐 9%냐는 1만 원의 차이를 만들지만, 투자액수가 1조가 되면 그 1%의 차이는 100억이다. 1조 자산가에게 100억은, 모두에게 똑같은 100억이다. 그 100억은 서울에 빌딩 하나를 살 수 있냐 없냐의 차이를 만들고, 그 빌딩 하나에는 1년에 수천 만 원에서 억 단위의 임대수익이 딸려있으므로 전체 현금흐름에서 만들어내는 차이는 여전히 어마어마하다. 

 

즉, 현대의 소위 ‘자본의 극대화’에 대한 기술적 연구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고도화돼있다. 소수점 저 아래까지 치밀한 분석을 통해 위험관리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임금 수준은 더이상 그 노동자의 실질 생산성과 비례하지 않으며, 다분히 자본 이득에 대한 기여도 및 자본 이득에 대한 비용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1년에 1억을 버는 생산직 노동자와 똑같이 1년에 1억을 버는 의사를 비교할 때, 그 둘이 실제로 근무시간에 하는 행위의 내용만으로 그 노동의 내용과 임금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건 실제와 거리가 멀다. 

 

원문과 같은 예를 들어, 현대 또는 근미래의 생산직이 실제로 하는 일은 부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부품생산을 하는 기계를 보조하는 것이므로 억대 노동자나 2천 대 노동자의 업무가 근본적으로 같다는 관점은 역시 현실과 괴리가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그 산업이 제조업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그 제조에 대한 투자 수익률을 따지는 자본 이득의 관점에서 사업 방향이 정해진다. 그렇게 계획하고 예상한 자본의 흐름에 대해 각각의 노동자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 의해 임금이 규정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사한 생산라인을 20~30년간 지켜봐온 노동자와, 작년부터 보기 시작한 노동자는, 근무시간 동안의 실제 물리적 행위는 유사할지언정, 자본의 흐름에 대해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물론, 이런 차이가 옳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좀 더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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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이라는 공포심을 지니지만, 사실 그와 같은 공포심은 이미 지난 세기에 ‘자본’에 대해 지녔어야 한다(사실 우려를 한 사람들이 맑시스트들이라고 봐도 되겠다만). 왜냐하면, 단순히 말해서, ‘현금 20억’은 나보다 돈을 잘 벌기 때문이다. 어떤 사업주가 좋은 성과를 만들어낸 나머지, 그냥 회사를 폐쇄하고 남는 돈으로 자본소득 구조를 만들어서 평생 놀고먹겠다면 그 회사 직원들은 죄다 짤린다. 이건 실제로 숱하게 벌어져 온, 벌어지는 일이다. 이걸 그냥 당연한 걸로 보면서, 아직 대체 가능한 노동자 수보다 물리적 기기의 유지보수에 필요한 노동자가 더 많은 인공지능에 대해 공포를 갖는 건 모순적이다.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폄하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둘 다 무서워하는 게 맞다는 얘기다. )

 

그렇다면 이러한 시각을 고려해볼 수 있다. 어차피 자본 이득이 세계 공용 이데올로기화가 됐다면, 필부의 임금은 그냥 예전 관점을 쓰면 안될까? 근무시간에 하는 일은 똑같은데, 더 큰 돈놀이에 가까이 서있었다고 월급을 10배씩 받는 건 좀 그러니까, 똑같이 일한 애들끼리 어느 정도는 비슷하게 나눠주면 안됨?

 

이 관점이 소위 말하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논리다. 실제로 하는 일이 같다면 같은 임금을 주는 것. 자본 이득에 대한 기여도가 아니라, 즉, 생산가치를 교환가치적 맥락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생산해낸 가치의 실질적인 내용을 보자는 것이다. 결국, 생산직의 노동과 의사의 의료노동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원문의 관점은, 오히려 ‘동일 임금, 동일 노동’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노동의 내용이 다르니 임금이 달라야 한다는 주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아예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 보자. 애초에 서로 다른 형태의 노동에 대해 그 가치의 경중이나 대소를 비교하는 게 가능할까. 아니, 가능여부는 둘째치고 의미는 있을까. 아무도, 소방대원의 노동이 지적재산권 전문 로펌 변호사의 노동보다 가치가 적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기아자동차 본사 정규직의 노동은 어떨까. 저 둘 사이에 있을까. 아니면 저 둘보다 가치가 적을까. 어떤 대답을 생각해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근거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특히 한국 사회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은 공유할지언정, 당장 어디까지 개선해야할지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게다. 

 

원문의 견지는 ‘성 안’과 ‘성 밖’의 개념을 바탕으로, 노조의 권력화, 노동자 내에서의 2차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에 있다. 물론 일면 동의한다. 비정규직을 내치는 노조는 비판과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는 아주 미묘한 차이로 위험한 논리가 되어버린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어쨌든 이 사회는 노동자에게 너무 작은 빵을 주는데, 노조가 권력화되어 정규직 노조원들이 그 와중에 빵을 더 많이 빼앗아간 나쁜 사람들이라는 관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은, 성의 안도 밖도 아닌 제3자들로부터 자칫 정규직 노조의 빵을 떼어서 비정규직에게 줘야한다는 논리로 왜곡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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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 빵은, 애초에 빵을 나눠준 그 사회에서 더 받아내야 할 일이다. 한국사회가 과연 40~50대 노동자로서 연봉 1억, 세금 떼고 한달에 600 받으면 탱자탱자 놀고 먹을 수 있는 사회인가. 그래서 그들에게 한 200씩 떼면 비정규직과 일용직 문제가 해결되는 재원 마련이 가능한가. 본사 정규직이 아니라 본사 임원, 그 본사의 주식을 들고 있는 사모펀드의 LP, 그 본사랑 아무 상관이 없더라도 부모 잘만나 수십조를 물려받으면서도 세금 100억도 안낸 사람들 말이다.

 

그렇다면 대략적인 그림은 명확하다. 다양한 형태의 자본소득에 대한 세율, 법인세 등을 조정하면서 터무니없이 많은 절대적 액수의 자본소득 주체가 실제로 납부하는 세금의 양을 늘린다. 그리고 그 세금으로 복지를 확대한다. 이를 통해 같은 액수의 실질 임금 중 소비로 전환될 수 있는 비중을 늘린다. 망할놈의 노동 유연성이라는 핑계도 못 댈 장기 편법 비정규직을 없애서 개인의 현금흐름 상 안정성을 높이고, 중소기업이 회사 차원에서의 사내 복지를 시행할 때 국가의 지원을 더해준다. 

 

이게 어느 정도 실제 이뤄졌다고 가정해보자. 꿈같은 일이겠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의 복지구조와 소득재분배가 달성됐다고 가정해서, 일주일에 집에 한 두번 가고 밤새 일하면서 한달에 80도 못 받는 젊은이들의 고통이 사라지고, 지방 소도시 영세기업 주임급이어도 애 둘 낳아 키우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는 사회가 왔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 월급 300은, 지금 현재 시점 한국 사회에서 월급 500 정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게다. 월급 300으로도 나름 자가용도 끌고, 문화생활도 하고, 여가도 즐기면서 살 수 있을 게다. 

 

자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 생산직 노동자가 의사나 변호사와 유사한 삶의 질을 누린다는 가정을 더해보자. 그렇다면 이 사회는 ‘너무 심하게 평등해진’ 사회인가. 이 사회는 노동의 의욕을 저하시킬까.  서로 다른 노동마저 같은 임금 수준을 만든, 과잉 복지 사회인가.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나 단순 노동으로 만족하는 나머지, 고등교육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 종사자가 줄어들까? 그럴 리 없다. 애초에 노동이란 생존수단으로서의 노동력 판매 행위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생산직 종사자는 이 시대에 연봉 1억을 받으면 안 되는가. 같은 직종에서 ¼의 연봉을 받는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 1억 연봉을 받는 노동자를 비정상으로 만드는가.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회는, 노동을 ‘삶’ 그 자체의 문제로 확실히 되돌려올 수 있는 사회다. 물론, 직업에 따라 수익은 다르겠지만, 그 수익의 차이가 생존의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는 안전망이 확충된 사회 말이다. 그래서 내 인생을 걸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면서, 그게 뭐든 간에 인간이 누려마땅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 

 

내가 보기에 심상정이 원하는 사회도 거의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생산직 노동자가 현재 시점에 연봉 1억을 받는 건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같은 산업에서 착취당하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마저 간과하겠다는 건 아니다. 심상정의 발언 역시, 그 문제를 그냥 넘어가 달라는 얘기는 아니다. 어떻게,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비정규직의 낮은 급여를 문제시하지 않는 모순을 지닐 수 있겠는가. 

 

심상정의 발언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실 심상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비정규직을 쳐낸 기아차노조의 결정에 대한 문제 제기다. 심상정은 그 기아차 노조의 결정을 ‘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기아차 노조원들이 과한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회의 시각을 지적한다. 

 

물론 나 역시도, 심상정의 모든 면이 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경계선을 제시하는 것이다. 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기득권층이 되는 게 아니다. 그 액수가 얼마든 간에, 노동의 대가로 연봉을 받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는 기득권층이 아니다. 애초부터 부르주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연봉의 규모와 무관하게, 노동을 안 해도 먹고 사는가, 노동을 해야만 먹고사는가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도, 심상정도, 아마도 안철수와 슈뢰딩거의 유승민까지도 이러한 의견이 포함된 틀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를 꿈꾼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홍준표가 아닌)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필독님의 원문과 이 글과 같은 대화가, 어찌 보면 배부른 소리인 이런 대화가, 다시 10년 만에 뜨거워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춘심애비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