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본 시리즈는 인간관계 실전지침서로

정신분석학을 도구 삼아 깊고 어두운 인간 내면을 탐구한다.

 

나와 타인의 역동을 이해, 실전에 활용함으로써

명랑 생활에 기여코자 한다.

 

 

 

 

# 오늘의 사례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발견한 A의 사례다.

 

그림1.jpg

 

우리는 누구나 말실수라는 것을 한다. 말실수는 대부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자칫하면 알바 오빠와의 관계가 어색해지거나, 최악의 경우 변태라는 불명예를 안고 일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도대체 말실수라는 게 싸이코다이나믹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정신분석가들은 말실수에 관심이 많다.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프로이디안 슬립(Freudian slip; 프로이트적 말실수)’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말실수에서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일까? 일단 오늘의 문제를 보자.

 

 

# 오늘의 문제

 

A는 말실수를 해서 알바오빠의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A는 왜 그런 실수를 한 걸까?

 

1. 주작이다.

 

2. 왜라는 게 어딨겠나. 사람이 그냥 말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3. 뇌의 신경 회로 하나가 망가진 것이 분명하다.

 

4. A는 평소 위에(얼굴)는 괜찮지만 그곳은 왜소한 본인의 남자친구에게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 말실수란 무엇인가

 

202001220980021243_4.jpg

작고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자전적 연구>(1925)에서 말실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분석학은 그것이 꿈의 해석을 이용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하는 말실수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중략) 나는 이러한 현상들이 우연적이지 않으며, 단순한 생리학적인 설명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그것들이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말실수로부터 억눌러지거나 억압된 욕동과 의도들을 추론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Freud 1925).”

 

프로이트는 실제로 말실수의 문제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이라는 글에서는 자신의 경험담을 예로 들며 이를 매우 자세하게 분석하였다(Freud 1901). 한 때 (그리고 지금도) 지성계의 핫스타로 이름을 날린 프랑스의 정신분석가(또는 사상가) 라깡의 경우 이 말실수의 문제를 매우 심도있게 다룸으로써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욕동(또는 충동; drive)'에 기반한다고 봤다. 우리는 누구나 공격성이나 성욕 같은 것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사회를 살아가려면 이런 날 것의 욕동들을 어느 정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한다. 만약 프로이트의 이론대로 우리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성욕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아버지 앞에서는 그것을 포기하고 굴복해야만 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겠지만, 자고로 사람 자식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다.

 

흔히 프로이트 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리곤 하는데, 이 용어도 결국은 이런 성욕과 공격성을 그 중심에 포함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넘어 더 큰 공동체로 넘어간다 해도 이처럼 욕동을 억눌러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우리는 친구를, 선생님을, 배우자를, 우리 옆집 아저씨를 욕동에 이끌리는 방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욕동이라는 것은 에너지의 흐름 같은 것이고, 에너지란 기본적으로 양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처럼 욕동은 형태를 바꿀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많은 욕동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프로이트는 바로 그곳이 우리의 무의식이라고 보았다(이 무의식이라는 것은 꼭 인간의 신체 안에 국한된 어떤 ‘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차원’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라고 보는 것이 낫다). 현실 속에서 용납되지 않은 우리 정신의 무한한 차원들은 모두 무의식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꾹꾹 눌러 담아진다. 억압의 대상은 ‘생각’이 될 수도, ‘감정’이 될 수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 ‘눌러 담아지는’ 과정을 ‘억압(repression)’이라고 불렀다.

 

억압은 크게 보아 약 25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는 방어기제 중 하나에 속한다(Cabaniss 2016). 그러나 이 억압은 수많은 방어기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많은 방어기제들이 억압에서부터 파생될 뿐 아니라, 억압 자체가 억압될 대상, 즉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철학적으로도 큰 충격을 준 개념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보듯, 서양철학은 언제나 ‘생각하는 나’라는 실체를 모든 사유의 중심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항상 나이고, 나 밖의 타자는 언제나 타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최초로 ‘나 안에 나 아닌 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내 안에 있다고?!

 

히스테리는 대표적으로 이 억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애이다. 사실상 “정신분석은 히스테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됐다(McWilliams 2011)”고도 볼 수 있다. 처음에 신경의학자로 일하기 시작했던 프로이트는 아무런 신경학적 이상이 없는데도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존에 사람들은 이것이 여성들에게만 특유하게 나타나는 고약한 질병이라는 뜻에서 히스테리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상태였다. 이 여성들은 종종 발작을 하거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호소했는데 신경학적 치료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반면, 최면치료에는 효과를 보였다. 프로이트는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단지 말을 할 수 있게 해줬을 뿐인데 어떻게 증상이 치료되는 걸까? 말과 그 말에 들어있는 기억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거기서 프로이트는 억압을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욕동들, 가령 공격성 같은 것이 해소될 배출구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꾹꾹 눌러 담아지다보면 어느 새인가 빈틈을 비집고 올라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억압과 자주 헷갈리는 방어기제 중 하나가 억제(suppression)다. 다소 거칠게 구분을 해보자면 억제란 ‘의식적으로 눌러 담는’ 것을 말하며, 억압이란 ‘무의식적으로 눌러 담는’ 것을 말한다(Cabaniss 2016). 가령 우리가 ‘아 나는 친구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지적을 하고 싶지만 지금 그냥 참도록 하자’라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억제에 해당한다. 반면 내가 어떤 친구에게 항상 친절한 태도를 보이고 살아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에게는 유독 과잉친절을 베푸는 패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친구에 대한 감정에는 뿌리 깊은 증오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억압에 해당한다. 억제와 억압을 칼로 자르듯이 구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정신의학자들은 대충 이런 식으로 두 가지를 구분한다.

 

 

# 문제를 풀어보자

 

다시 오늘의 말실수인 '바지 ㅈ지' 문제로 돌아가 보자. A는 왜 이런 말실수를 하게 된 걸까?

 

1. 주작이다. (현실 부정의 입장)

필자도 솔직히 자작나무 타는 냄새를 약간 느끼기는 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례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글에서 ‘말실수’와 두글자짜리 신체부위를 지칭하는 단어를 동시에 입력해보면, (일단 먼저 성인인증이 뜨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례들이 발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왜라는 게 어딨나. 그냥 말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극단적 회의주의의 입장)

18세기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과관계’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실제로 아무 이유 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을 ‘인과관계’ 속에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사실 원인을 규명한다는 노력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고, 모든 것을 ‘그냥 그렇게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좀 편리한 면은 있다. 그렇지만 어떤 말실수의 경우 반복적인 패턴을 보이기도 하고, 그 용법 안에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한 많은 통찰의 지점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실제로 정신분석가들은 때때로 환자들의 말실수 또는 행동의 실수 안에서 억압의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실수라는 것은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계륵 같은 소재다.

 

jjLL.jpg

전설의 레전드 말실수

 

3. 뇌의 신경 회로가 하나 망가진 것이 분명하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의 입장)

최근에는 신경과학이 발달하다 보니 거의 모든 정신의학적 현상에는 그에 대응하는 물리적 현상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말실수라는 것에도 신경학적인 현상이 ‘매개’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많은 부분 뇌를 경유하고, 그런 기억은 하는 말에도 영향을 준다. 어제 들었던 말은 1주일 전에 들었던 것보다 더 잘 떠오를 것이다. 혹은 개인의 용법에 따라 ‘작다’라는 서술어가 두글자짜리 신체부위와 많이 연합되어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을 신경회로 상의 연합의 문제로만 파악하는 경우, 도대체 왜 그러한 연합이 형성되었는지, 가령 이 사람의 과거 경험 상 어떠한 계기들에 의해 그러한 연합이 발생했는지 아무런 설명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4. A는 평소 위에(얼굴)는 괜찮지만 그곳은 왜소한 본인의 남자친구에게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섣부른 결론 도출의 오류)

사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 보기 문항은 꼭 말실수의 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의학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감정이나 기억 같은 것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실체화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 회의주의의 정 반대 측에서 오히려 과도한 인과추론을 감행하면서 독단적 이론을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있다(사실 프로이트 본인도 그런 비판을 받았던 적이 많다).

 

상담일을 하는 사람 중 생각보다 이런 독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누군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건 다 당신 엄마 때문”, “그건 다 당신의 성욕이 억압됐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무리한 결론을 내리려는 것 같다면 왠만하면 그 사람에게 치료받는 건 피하라. 저명한 정신치료자 카바니스도 “해석적인 언급을 하기 전에는 먼저 가능한 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Cabaniss 2016)”라고 말한다.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뜻이다. 그런 건 선무당이 하는 일이지 의사나 상담가가 하는 일은 아니다. 이런 점은 필자에게도 적용된다. 필자가 허구헌날 어머니, 아버지, 성욕, 오이디푸스니 뭐니 떠들더라도 그걸로 모든 걸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시라...  

 

 

# 말실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럼 도대체 정답이 뭐란 말인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다는 게 정답이라면 정답이겠다. 우리는 사실 왜 인간이 말실수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종류의 말실수는 특별히 의미 있게 두드러지는 부분이 있다고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어떤 말실수는 이상하게 특정 상황에서만 반복된다든지, 그 단어에 담긴 감정이 다른 단어를 발화할 때와 다르다든지, 그 단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많이 발견된다든지 하는 식의 차원들을 드러내곤 한다. 그런 경우 그 말이 포함된 그물망들을 발견하고, 그 사람의 무의식을 탐색할 기회를 얻는다.

 

677111e102c4899644c26a2b061cd808.jpg

 

모든 정신분석가나 정신의학자가 항상 말실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은 매우 다양한 학파로 나뉘면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갖게 되었고, 어떤 학파에서는 말실수 같은 것에만 집중하는 경우 공감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정신의학자들은 엄밀한 정신분석치료가 아니라면 말실수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무를 보다가 숲을 놓치게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보다 행간에 더 많은 것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는 말의 내용 자체보다 오히려 그런 말이 발화된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실수에 대한 프로이트의 가르침 또한 특정한 내용이 회피되거나 실언으로 이어지는 것에서 배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말과 말실수의 배후에는 언제나 의식의 손아귀를 벗어나버리고 마는 무의식이, 그리고 억압이 있는 것이다.

 

 

 

REFERENCES

 

(1) Cabaniss DL. Psychodynamic Psychotherapy: A Clinical Manual. John Wiley & Sons;2016. 

(2) Freud S.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 SE 6. London: Hogarth Press;1901. 

(3) Freud S. An Autobiographical Study, 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 the Question of Lay Analysis and Other Works. SE 20. London: Hogarth Press;1925. 

(4) McWilliams N. Psychoanalytic Diagnosis, Second Edition: Understanding Personality Structure in the Clinical Process. New York: Guilford Publications;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