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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지사가 세종대왕의 리더쉽을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의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자기주장을 내려 놓지 않아서 그렇다. 세종대왕 정치는 내려놓으니까 황희를 쓴 것”이며 “헌법을 통해 민주주의가 작동 가능하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의 생각에 상당 부분 동의함을 밝혀 둔다. 나는 우리 사회를 현저하게 망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진영논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진영에든 들지 않으면 불안하고, 일단 진영을 표방한 사람이 다른 진영의 논리와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금기다. 다른 진영에 몸 담았던 사람들은 대개 쓰레기에 벽창호고 자신과 다른 진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과는 그냥 담을 쌓는다. 더 안된 것은 그 진영이 매우 버라이어티하게 갈라진다는 것이다. 한때 누군가의 당선에 환호한 몇 달 뒤 그가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에 반한다 싶으면 가차없이 18원 폭탄을 날린다.

그 상황에서 안희정 지사가 자신의 세자 책봉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귀양간 황희를 등용한 세종의 리더쉽을 얘기하는 것이 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동시에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우선 세종의 리더쉽은 태종이 한 번 땅을 갈아엎은 다음에 뿌려진 씨앗에서 발아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능한 냉혈 군주였다. 그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운 이숙번을 버렸고 이제 이거이 부자를 무력화시켰다. 그건 그렇다고 치는데 정말로 자신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가문의 명운을 걸었던 아내 민씨의 집안을 도륙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맏아들을 제치고 세자로 삼은 충녕대군, 즉 세종의 처갓집까지 박살을 내 버렸다.

태종이 세조와 다른 점이다. 세조는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지키고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태종은 세종의 리더쉽을 위한 방해물을 피도 눈물도 없이 제거했다. 그 기반 위에서 세종은 자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희정 지사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이숙번, 이제, 이거이에다가 원경왕후 민씨의 4형제들, 세종의 장인인 심씨 가문,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아버지를 위협했던 정도전이나 삼촌 방간까지도 버젓이 살아서 세종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형국 아닌가. 이들 앞에서는 황희 정도는 명함도 못 내미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황희를 등용한 세종의 리더쉽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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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 안희정 지사가 세종을 얘기한다면 생각해야 할 건 더 많다. 안희정 지사는 이렇게 얘기했다. “정치지도자는 디테일(세부공약)에 대해 약속을 남발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큰 틀의) ‘방향과 가치 그리고 원칙’을 얘기해야합니다. 구체적인 공약은 각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역시 일면 옳다. 그러나 세종은 방향과 가치 그리고 원칙을 제시한 임금이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던 인물이었다. 공자님 말씀을 내걸고 덕만 쌓은 임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경선을 이루는 압록강 두만강 유역 개척을 위한 사민정책은 깨놓고 말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정책이었다. 남쪽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고 엄청난 사람이 얼어죽고 굶어죽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반발도 심했고 반대도 컸지만 세종은 뚝심있게 밀어부쳤다. ‘전문가’로서 김종서를 발탁한 건 세종의 역량이었지만 방향과 가치와 원칙을 제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 절반이 얼어죽고 굶어죽어도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다.

더하여 세종의 지시는 구체적이고 꼼꼼했다. “백성이 원하는 토지 세법 제도를 만드시오. 우리 조선은 농자천하지대본이오.”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몇 년간의 수확을 통계내어 그 평균 수익을 정해진 비율로 삼아 일정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공법(貢法)을 추진하면서 세종 대왕은 이런 령을 내린다. “정부 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즉 서울의 관청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도의 관리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공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형식적으로 “백성들의 뜻을 알아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무려 5개월간 주관 부서인 호조는 물론 팔도의 수령 방백과 육방 관속들은 무려 17만 명이 넘는 백성들의 ‘낙점’을 받아 보고한다.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노비를 제외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뺀다면 그 수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동원한 군 병력의 최대치가 17만 명 정도였다는 점, 그리고 19세기 초반의 영국 유권자가 전체 인구 중 2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즉 15세기에 행해진 일종의 ‘국민투표’였다. 세종의 리더쉽은 결코 추상적이지도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고 가이드라인만 내려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외에도 세종의 리더쉽이 어느 정도로 단단하게 구체적이었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는지에 대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을 궁중으로 불러 들였던 것도 세종이었다. 음악에 능한 박연을 발탁한 이도 세종이었다. 조선 전기의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같은 집현전 학사들도 결국 세종의 작품이었다. ‘전문가’들을 잘 발탁한 셈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줬지만 동시에 그들을 경탄케 하는 식견도 보여 주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둔탁한 방향은 소중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구체적인 ‘어떻게’ 였다.

안희정도 이제는 ‘어떻게’를 보여 줄 때가 됐다. 그 어떻게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안희정의 앞길은 그다지 밟지 못할 것이다. 세종 대왕 리더쉽은 단순한 반대자에 대한 ‘선의’의 인정만으로 설명될 일이 아니다. 세종의 위대한 점은 원칙의 천명 뿐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인물이었다는 데에 있다. 안희정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구체성 없는 원칙만큼 허약한 건 없다. 더구나 세종을 꿈꾼다면 말이다.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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