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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한경오’는 왜 다름 아닌 자신의 독자들에게 두들겨 맞는가? 나는 진보진영 일부의 믿음대로 그들이 안철수를 옹립하려 했다거나, 문재인 대통령을 흔들려는 음모를 공유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정의감이 있음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독자를 감히 가르치려고 해서?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얘기는 말미에 풀겠다.


지금의 진보언론은 기존의 언론 현실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한겨레는 언론탄압에 맞선 결과로, 오마이뉴스는 종이신문의 기사생산구조를 거스르는 시도로 창간되었다. 경향신문은 진보진영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개과천선해 돌아온 탕아’ 쯤 된다.


현실을 긍정하기 힘들 때 진보는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가 된다. 독재, 부조리, 자본의 횡포, 여성차별은 당연히 타도의 대상이다. 그런데 인간은 관성의 존재다. 악이 테제일 때 안티테제는 정의다. 한경오 구성원들의 세계관을 형성한 구 운동권의 담론 방식이 탄생하는 과정은 충분히 존경스럽다. 하지만 안티테제로서의 담론생산방식이 지속되면 관성으로 변질된다. 심리적으로는 정의를 담지하고 사고체계에는 ‘안티’만 남는다.


세상은 악과 부조리가 가득하고, 자신은 이를 적발하고 성토하는 비판자로 자리한 세계관은 단순하고 안락하다. 거기에 스스로의 도덕성에 대한 확신까지 겸비하면 중세시대 교황처럼 무오류적인 존재가 된다. 그들의 정체성은 안티테제이므로, 민주화된 세상에서 존재가치가 지속되려면 김대중 대통령은 구태와 손잡은 낡은 정치인이어야 하고, 참여정부는 가짜 진보여야 한다.


한겨레와 경향은 참여정부를 비판하고 노무현의 말년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나는 기사와 방송에서 참여정부의 실패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진보라고 해서 진보진영에서 배출된 대통령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체는 이렇다. 한경오는 진영론적인 사고를 탈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단적인 진영론에 의해 노무현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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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실패를 거칠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어디까지나 나의 분석이다), 신자유주의의 팽창을 조장하고 방기한 것이다. 그런데 진보언론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을 뒤로 물리고 노무현 개인에 대한 분노로 일관했다. 그들에게 농민을 때려잡은 정권의 수장인 노무현은 변절자이자 타락한 내부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내부자를 밀어내야 했다. 보수지보다 폭력적이었음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노무현이 투신 서거하자, 진보언론은 그의 동인지가 되었다. 노무현을 다시 소환해 선은 언제나 악에 패배하며, 그럼에도(그러므로) 영원히 저항해야 한다는 안티테제 세계관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노무현은 용과 싸우다 산화한 비극적 로망스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안티테제는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에서 관성이 아니라 기능으로 보였다.


진보진영은 흔히 조선일보의 의제선점능력에 감탄한다. ‘유능한 악당론’ 프레임이다. 허나 안티테제는 존재증명을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테제가 먼저 등장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의제설정은 테제다. 세 싸움의 차원에서 보면, 안티테제라고 해서 테제를 이기지 못할 건 없지만 안티테제를 ‘고수’하면 지는 건 당연하다.


실제 세상에서 선악은 혼재되어 있다. 진보언론의 독자들, 특히 젊은 층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얽히고 설킨 구조에 억압당한다. 진보언론은 여전히 가시적으로 드러난 악을 타격하자고 부르짖는다. 세상을 선악으로 나누면, ‘이쪽’ 편인 노조가 ‘저쪽’ 편인 재벌과 싸워 임금인상을 받아내면 약자들의 사정이 나아져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과 겸상을 해주지 않는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생겨났다는 시민단체에서 열정페이논란이 불거지고, 그 이름이 다름 아닌 ‘희망제작소’라면 취업계층은 진보나 보수나 다 똑같다는 믿음을 갖게 마련이다. 이 자연한 현상을 ‘젊은 층의 우경화’로 규정하고 그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가장 쉬운 선택지는 ‘각성’이 아니라 일베에 회원가입하는 것이다.


세상을 선악-강약의 구도로 보면, 개인과 집단은 반드시 어느 편에 놓여야 한다. 남성은 필연적으로 진보적이지 못한 성별을 갖고 태어났다. 내가 보기에 진보진영과 진보언론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메갈리아 논쟁 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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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인사이드 주식갤러리(이하 주갤)는 여성혐오로 유명한 공간이다. 2016년 메갈리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 놀랍게도 그들은 열광했다. 메갈리아가 던지는 거친 농담의 그 맥락이 동의 가능한 것이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농담의 언어가 아무리 못됐어도 사람이 웃을 때는 이유가 있다. 사회적 시의성의 차원에서 감응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남콘’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자학개그의 소재로 쓰는 남성들이 많았다. 근원을 따지고 보건데 주갤의 여성혐오도 다분히 오락적이었으니, 남성혐오도 동등한 오락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합당했다.


진보언론이 본능적 의무로 메갈리아 응원에 뛰어든 시기는 이미 메갈리아 그룹이 공격적 언어를 도구가 아닌 몸통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혐오를 위한 혐오만 남았을 때였다. 성별을 떠나 누구든 가해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은, 적어도 진보언론에서는 묵살되었다. 맥락을 거세하고 세상을 좋은 편과 나쁜 편, 진보와 시대착오로 구분하는 진영론적 사고 탓이다. 그 결과 진보진영 엘리트 담론자들은 기괴한 프레임 전략을 들고 나왔다. 남성이라면 자신이 ‘잠재적 성범죄자’임을 고백함으로써 깨어있는 시민임을 증명하라는 권고였다.


진보언론의 지면은 분노한 여성들과 ‘전향한’ 남성들의 글로 채워졌다. 남성 독자들의 저항감은 각성이 덜 된 구시대의 잔재로 간주되었다. 졸지에 소외된 진보진영 남성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자구책은 구독중단이었다. 한편 안락한 안티테제 세계관에 균열이 생기자 진보언론은 당황하고 분노했다. 그들은 비판자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독자들을 논파하기로 했다.


일 년이 지나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그들이 마음 떠난 독자들을 대하는 방식 역시 투쟁이다. 정의의 투쟁이 지속되려면 타도해야 할 테제가 있어야 하는데 정권은 교체되었다. 진보언론은 탄압의 주체를 찾아야 했다. 독자들은 언론의 관성이 기능이 아니었음을 불과 며칠 만에 확인했다. 그 결과 언론과 독자가 SNS에서 싸움을 벌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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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한 정치인의 무비판적인 추종자로 치환하고 ‘덤벼라, 문빠들’이라 일갈하는 세계관은 낭만적이다. 허나 낭만은 유행을 탄다. 진보언론은 변절하지도 타락하지도 않았다. 음모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우리 편’이고 ‘착한 편’인데 다만 실수를 한 것도 아니다. 일차원적인 좌-우, 선-악의 선을 그어놓고 그들을 판단하면 선택 역시 일직선의 줄다리기만 남는다. 인정하거나, 싫어하거나, 아니면 용서를 하거나. 반면 기계적인 진영론에서 탈피해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결론은 간명하다. 그들은 동시대성을 잃어버렸다.


‘한경오’를 버리자느니, 화해하자느니, 어찌 됐건 우리 편이라느니 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모두 진영론 사고에 매몰된 언어다. ‘한경오’는 지속될 수도 번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도덕적 당위는 아니다. 비정하게 말하겠다. 진보언론과 독자와의 불화는 비극이 아니라 가치중립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구독은 도덕적 의무감에 의해 시작했을지 몰라도, 구독을 끊는 일은 경제적인 판단이다. 지면은 상품이지 대자보가 아니다. 진보언론의 과제는 성난 독자를 논파하는 데 지면을 쓰는 게 아니라 질 좋은 기사로 수준을 증명하는 일이다.


‘돈 없는 조중동’이라는 유행어는 직역하면 양심도 없고 돈마저 없다는 뜻이다. 공격 대상을 비하하려는 위악적인 말이다. 하지만 예리한 맥락이 없다면 지금처럼 공격자들의 쾌감을 자아내진 못한다. 저 낙인엔 독자들이 느끼는 문제의 요체가 내재되어 있다. 돈이 없어서 그런지 그래서 돈을 못 버는지, 아무튼 담론의 질이 낮다는 뜻이다.


질이 낮다는 말을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필력이 아니라 동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세계관 탓이라는 의미다. 많은 이들이 한경오는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고 성토한다. 어차피 기사는 주장이든 보도든 새로운 정보의 전달이다. 말뜻을 따지고 보면 결국 가르침이다. 진보언론 독자들은 가르침 자체에 화나지 않았다. 가르치는 방식에 질린 것이다.


나의 로맨스가 누군가에게는 불륜일 것이듯, 진보언론의 낭만도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신파다. 그래서 첨언하겠다. 신파를 더한 신파로 비난하는 진보정치 자영업자들이 있다. 그들은 먼저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팬덤, 절대적 정의를 한 카테고리에 쑤셔 넣는다. 진영론에 입각해 타락한 한경오에 앞장서 분노함으로써 순수성 검열을 통과한 정의의 투사로 스스로를 마케팅한다. 한겨레와 경향이 노무현을 폄하한 방식 그대로다. 분석과 이해가 필요한 시점에 ‘악에 맞서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생계에 도움이 된다. 이 공교로운 사실이 우연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싶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시대가 어느새 훌쩍 진보해 있다. 불과 보름 만에 대선 이전의 정치를 유물로 만들어 버렸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권 중 최고의 수준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정의감만으로 진보가 수립되지 않는다. 동시대를 이해하는 미감(美感) 역시 진보의 필요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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