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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연말을 뜨겁게 달군 영화 <관상>, 이 영화가 ‘조선 최고의 붓’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드물 것이다. 비밀은 바로 <관상>의 메인 포스터다.

주인공 김내경으로 분한 송강호의 초상화 포스터는 조선시대 초상화 중 가장 파격적이라 불리는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을 오마쥬 한 작품이다. 국보 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은 터럭 한 올까지 살린 세밀한 붓 터치. 보는 이를 압도하는 강렬한 눈빛은 한국 회화사에서 손 꼽힐만한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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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상화는 기본적으로 몸 전체를 그렸다. 신체 일부를 떼어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금기 그 자체였다. 그러나 윤두서의 자화상은 목 아래 몸체 없이 오로지 얼굴만 그렸다. 이유가 뭘까? 적외선 촬영과 X선 촬영을 통해서 윤두서가 처음엔 몸을 그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1mm도 채 되지 않는 자화상 속 수염과 옷의 선이 겹칠 걸 고려해 몸체를 떼낸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1mm도 되지 않는 수염을 어떻게 그렸냐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조선 최고의 붓이라 할 수 있는 ‘쥐수염 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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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던 비결은 붓 끝의 탄력으로는 그 어떤 붓이 와도 견줄 수 없는 쥐수염 붓 덕분이다. 미세필(微細筆) 중에서도 최고의 세필로 통하는 쥐수염 붓은 쥐의 수염을 모아서(붓을 만들기 위해서는 100~200마리의 쥐를 잡아야 했다) 재와 물을 뿌린다. 이렇게 하면 기름기가 빠져서 털이 부드러워진다. 이 상태에서 붓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붓은 끝이 뾰족한 첨(尖), 가지런한 제(齊), 털의 모듬이 원형을 이루는 원(圓), 한 획을 긋고 난 뒤에도 털이 다시 일어서는 건(健). 붓이 가져야 하는 네 가지 덕목을 다 갖춰야 명품 붓이 완성되는 것이다(중국 최고의 서예가였던 왕희지도 쥐수염 붓을 썼다는 말이 있다).

렇게 말하면, 조선의 붓이 세계적인 명품으로 분류 된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에 조선 붓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물론, 명나라의 고반여사(考槃餘事)에 보면 '조선의 낭미필(狼尾筆)이 좋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낭미필은 황모필(黃毛筆, 혹은 황서필黃鼠筆로 불렸다)을 말하는데, 바로 족제비 털로 만드는 것이다(우리나라 붓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바로 이 황모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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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과 전남 광주지방이 붓의 명산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 두 지방은 황모와 장액(獐腋 : 노루 앞다리와 몸뚱이 사이에 난 털)을 가지고 붓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지도층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붓을 사용했다(당시 조선시대 붓 생산은 공조에서 관장했기에 그 품질이 중국에 미치지 못했다). 중국은 당, 송 시절 붓 제조업이 크게 번성했기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송나라 시절 후저우(湖州)의 붓이 유명해 호필(湖筆)이라 불렸는데,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위명을 떨치고 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붓을 잡고 글을 쓰는 이들이라면 호필휘묵(湖筆徽墨)이라 해서 절강성 호주의 붓과 휘주의 먹이 최고라는 말이다. 사대를 말하며, 1년에 서너번이 넘게 중국을 오갔던 조선으로서도 이 호필휘묵이란 말을 가볍게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 붓의 출신지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선비의 집에 붓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니, 조선시대 ‘제도권 교육’을 받았다면, 붓과 종이는 학문의 시작과 동시에 배우는 말이다. “염필륜지 균교임조(恬筆倫紙 鈞巧任釣)” 천자문의 한 구절이다. 몽염은 붓을 만들고, 채륜은 종이를 만들었고, 마균은 기술이 뛰어났고, 임공자는 낚시를 잘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마균은 수레를 만들었고, 임공자는 오십마리의 소를 미끼로 해서 회계산에 앉아 낚싯대를 동해에 드리웠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염필륜지다. 한자를 처음 접한 이들에게, “진나라의 몽념은 토끼털로 처음 붓을 만들었고 후한의 채륜은 처음 종이를 만들었다.”

붓과 종이로 세상을 배우고, 공부했던 선비들이기에 한자를 처음 배우는 그 순간에 붓과 종이를 만든 이들을 기리고,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에 대한 감사의 뜻도 들어간 것이다. 문자(文字)의 나라이며,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예부터 붓과 글씨에 대해 철학적 사유와 수신(修身)의 도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말이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는데, 글씨는 쓴 사람의 인품, 교양, 학덕 등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있는데, 바로 서권기문자향(書卷氣文字香)이란 말이 있다.

“글로 자신을 닦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몸에서 글의 기와 문자의 향기가 난다.” 라는 말인데, 이는 다시 말해 선비라면 늘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곁에 둬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늘 문자의 향기가 나려면, 묵향과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대목에서 주목해봐야 할 것이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말이다. 미술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 말은 실은 중국에서 유래했는데, 바로 문방사보(文房四寶). 즉, 서재의 네 가지 보물이란 것이다. 아예 한 수 더 떠 문방사후(文房四侯)란 말도 있는데, 아예 이 네 개의 보물에게 벼슬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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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해 보자면, 종이를 호치후(好畤侯), 붓을 관성후(管城侯), 먹을 송자후(松滋侯), 벼루를 즉묵후(卽墨侯)라고 부르며 이들의 공을 기렸던 것이다. 사람이 벼슬 살이를 통해 제후의 작위까지 오르려면 얼마만한 노력이 필요할까? 조선이나 중국이나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기에 지필묵(紙筆墨)에 대한 애정이 비슷했던 것이다.

이렇듯 글을 하는 선비라면, 붓에 대한 애정, 좋은 붓에 대한 열망이 있을 것 같지만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 굳이 따지자면 붓보다 종이를 더 따졌을 것이다. 특히 화가의 경우에는 닥종이와 화선지의 차이가 컸을 것이다. 화선지가 먹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닥종이의 그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어지간한 화가가 아니라면 자신이 구상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하는 선비라면 어떨까? 붓을 탓했을까? 추사 (김정희), 그가 생전에 자신의 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비록 내 글씨는 보잘 것이 없더라도,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좋은 붓과 재능이 있더라도 노력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생각하는 바는 똑같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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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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