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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가 질병으로 인정된 건 사실 최근의 일입니다. 그 전에는 병이라 생각하지 않았죠. Shell shock(1차세계대전 시기 포탄 폭발의 충격과 전투 상황에서의 공포로 인해 정신이 붕괴되는 증상, 신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걷질 못하거나 이상행동을 보인다)라는 비슷한 질환은 인정되었지만 이건 PTSD 와는 좀 다릅니다.


하여간 치열한 전장에서 말그대로 피 튀기며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심신이 완전히 방전되더라는 걸 PTSD 이전에도 알긴 했어요. 특히나 사람의 멘탈에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는 전투행위 이후의 휴식은 전투력 보전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상식이었죠. 문제는 이때 취하는 휴식은 민간인의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는 거였어요. 심신이 지친 상태이니 뭔가 깊은 사고가 필요해서는 안 되었고 가능한 만인이 즐길 수 있어야 했으며 더불어 다음 전투를 위해 빠르게 효과가 발휘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군바리 눈높이에 맞춘 휴식이 필요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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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공연은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서 환영받는 퍼포먼스입니다. 물론 이런 범국가적인 공감이 우리나라에 없을리 만무, 십 수년 전 일요일 오후의 예능 블루칩이었던 '우정의 무대'에 직관관객을 위한 방송불가, 19금 끈적끈적 2부가 편성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구요(제가 군에 있을 때는 위문공연이 없어서 진위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아, 이거 소주 얘기 맞습니다. 좀 있으면 소주 얘기 나옵니다.


다시없을 규모의 전쟁이었던 세계2차대전 당시 각 나라의 군대들은 이러한 위문공연만으로는 전투에 지친 병사들의 멘탈을 회복시키는 건 부족하다는 데 공감하고 그 외의 수단을 마련했습니다. 미군의 경우 병사들의 불만을 미친듯한 보급과 제대로 된 휴양소의 건설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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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운영했던 휴양소입니다. 모그모그섬이라는 곳인데 미군이 저 섬에 살던 원주민한테 돈다발을 끼얹고 잠시 딴 섬에 살다 오라 하고 몇 년을 빌려 휴양소를 만들었습니다(참고로 거기 살던 원주민들도 그때 맞은 돈다발이 상당했던지 기꺼이 섬을 떠났다고합니다). 이렇게 만든 휴양지에서 군대가 운영하는 바에서 맥주 사먹고 놀다 오고 그런 식이었죠. 나름 성과는 좋았다 합니다.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미군 같은 돈 지랄 할 여유는 없었고 아울러 애초에 사람도 아닌 족속들이었던지라 위안부 같은 끔찍한 짓으로 병사들의 휴식을 지원했습니다. 미친놈들...


아, 이제 소주 얘기 나옵니다. 아니, 소주 비슷한 얘기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도 평화로운 러시아는 아무리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일본놈처럼 미친놈들은 아니었고 또한 랜드리스로 물자보급을 받는 처지인지라 제대로 된 휴양지를 만들 여유도 없고, 뭐 그런 이유로 나름 심플한 해결책을 도입합니다. 보드카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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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식량에 보드카를 포함시킨 거죠(사진은 리인액트의 한 장면인 듯 하네요)


그니까 우리식으로 말하면 전투식량에 팩소주를 넣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효과는요? 좋았죠~ 그러니까 독일군을 몰아내고 승리했죠. 미군은 돈 쳐발라가며 휴양소 만들고 그럴 때 러샤는 심플하게 보드카로 PTSD로 녹아나가는 병사들의 전투력을 보존한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보드카는 걍 공업용 에틸알콜에 물 섞은 수준입니다. 그니까 아주 저렴하게 사태를 해결한 거죠.


문제는 전후입니다. 보드카로 전쟁은 이겼는데 살아남은 러샤 군인들은 보드카를 이겨내지 못했던 거에요. 상당수가 알콜중독으로 고생하게 되었고 보드카로 알콜을 대량으로 섭취하는 문화는 전후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니까 남녀노소 술을 겁나 퍼마시게 된 겁니다.


뭐 추운나라는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독주를 즐겨 마시기 마련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술 마시면 체온유지가 어려워집니다. 추운 나라에서 건강을 유지하려면 술을 적게 마시는 게 좋습니다. 러샤군이 보급식량에 보드카 포함시킨 게 체온유지 목적이었다는 얘기는 그런 의미로 무시해도 됩니다.


하여간 러샤는 지금도 알콜중독 때문에 고생 중입니다. 삶의 질을 따지기 이전에 알콜중독으로 젊은 장정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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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소주 얘기입니다.


1965년, 쌀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개편된 주세법의 여파로 판매가 개시된 희석식 소주는 최초에는 35% 였던 모양입니다. 막걸리가 7도 정도이니 가격이 엇비슷 하다면 취하는 데 이만한 술이 또 없습니다. 걍 단순하게 따져보면, 350ml 소주 한 병 마시고 취할 수준으로 750ml 병 막걸리로 취하려면 두 병 반은 마셔야 한다는 겁니다. 막걸리로는 배불러서 취할 수 없는 사람도 희석식 소주라면 충분히 만취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부수적으로 소주는 기본적으로 에탄올에 물과 감미료를 섞은 놈인지라 숙취의 원인이 된다는 fusel oil(알코올 발효시에 부산물로서 얻어지는 고급 알코올류를 주성분으로 하는 혼합물)의 함량이 매우 적습니다. 이 말은 의외로 희석식 소주의 숙취가 적다는 말과 다름이 아닙니다.


막걸리의 경우는 아세트 알데하이드를 비롯한 다양한 숙취원인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지라 저걸로 취하면 답이 없어요. 엄청난 숙취가 몰아칩니다. 그 말인즉슨, 노동력에 상당한 악영향을 준다는 거죠. 반면, 희석식 소주는 막걸리에 비해 숙취가 적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희석식 소주는 정말로 정말로 저렴해요. 다른 나라에서 희석식 소주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보드카의 경우 마트에서 구하면 일 리터짜리 한 병에 만원은 줘야죠. 근데 희석식 소주는 한 병에 천원 조금 더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렴하게 만취할 수 있는 알콜이 주세법 개정으로 똭 하고 튀어나온 겁니다. 게다가 얘는 숙취도 덜해서 다음날 노동생산력에도 크게 영향을 주지도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직장인들에게 여유있는 저녁의 삶이란 낯설기만 합니다. 보통은 회사에 얽매인 몸이죠.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구요. 이런 상황에서 희석식 소주라는 놈이 튀어나왔습니다. 예전에 맥주에 막걸리 마실 때는 숙취로 고생할 일은 있어도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알콜을 섭취하기는 쉽지가 않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증류주는 비쌌으니까요. 하지만 희석식 소주는 이런 회식의 양상을 바꿔버립니다. 두 시간만 술자리를 가져도 충분히 꽐라가 될 수 있는 알콜을 단시간에 섭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해서 가족들이랑 오손도손 그래야 했을 텐데 말이죠. 저녁이 있는 삶을 약속했던 지지난 대선의 문대인이 떨어지고 이제서야 간신히 닭을 몰아낸 게 올햅니다. 60년대야 오죽했겠습니까? 농촌에서는 새마을 운동, 도시에서는 경제 5개년 계획, 말 그대로 삶이 전쟁터, 우연찮게 우리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러샤식 전투력 유지법을 도입하게 된 겁니다. 아울러 피해양상은 러샤나 우리나라나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나마 삶의 질이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은 요즘인데 소주 판매량은 피크를 찍었습니다. 무려 세계 1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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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링크

2등하고 격차를 보라죠. 압도적 1위에요.


이런 희석식 소주의 대중화 경향에 정치적 의도가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하여간 타이밍은 절묘했구요. 이쯤 되면, 그러니까 판매량을 보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기도 하지만, 애초에 희석식 소주를 소주라고 불러야 되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어 우울해지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희석식 소주는 전통소주와 닮은 점이 한 개도 없는 술입니다.


진짜 소주는 막걸리나 청주를 소주고리로 증류해서 마시는 술이거든요. 현대의 증류기의 관점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생산량도 안습이고 아울러, 이 비효율적인 증류방법을 연속도 아닌 단식으로 증류하다 보니 알콜을 증류하겠다는 목적성으로 보면 불순물 덩어리를 증류하는 방식인 겁니다. 이게 거꾸로 생각하면 덜 증류하다 보니 막걸리와 청주의 원료가 되는 쌀의 풍미와 누룩취까지 느껴지는 술을 빚는 방식이라는 거죠. DP(DVD Prime) 소주 대란 때 명인안동소주 드셔보신 분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겁니다. 진짜 소주는 원래 이런맛이 납니다. 일반적인 증류주와는 달리 단맛이 섞여 있습니다. 이게 합성감미료나 설탕에서 나오는 단맛이 아니라서 여운이 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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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고리를 이용한 소주의 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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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증류탑, 저걸로 에탄올을 분류하는 건 아니지만 공업적인 개념으로 주정을 생산할 때는 저런식의 증류탑을 씁니다)


반면 희석식 소주는 원료부터가 진짜 소주하고 차이가 납니다. 쌀을 쓸 수도 있지만 보통은 저렴한 탄수화물 작물을 씁니다. 보통은 타피오카가 많이 쓰입니다. 맛은 없지만 하여간 탄수화물 덩어리니까요. 이걸 포화시켜서 미생물 발효로 10%짜리 술을 만든 다음 이걸 대형 증류탑에 넣고 97 ~ 98% 에탄올을 뽑아냅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확인하시면 됩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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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타피오카


요점은 증류라는 목적으로 보면, 비효율적인 소주고리 대신 공업용의 증류탑을 이용하여 고순도의 에탄올을 뽑아낸다는 거죠. 이 과정에서 원료가 쌀인지 고구마인지 타피오카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97% 알콜로 전환된 시점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아요. 나머지 3%는 대부분 물이거든요. 원래 알콜하고 물은 분리하기가 까다롭습니다.


희석식 소주는 이렇게 97%로 뽑아낸 에탄올, 그러니까 주정이라고 부르는 놈을 20% 미만으로 희석해서 진짜 소주에서 나오는 단맛을 대신해서 아스파탐과 같은 합성감미료를 넣고 병입한 게 희석식 소주가 되겠습니다. 이쯤 되면 진짜 소주와 희석식 소주는 진짜 일본식 라면과 인스턴트 라면과의 유사성만큼의 관계도 없습니다. 차라리 희석식 소주는 보드카와 유사한 술입니다. 진짜 소주와 달리 원료를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품질 좋은 타피오카로 빚은 술이라고 광고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소주회사에서는 술의 원료를 광고하지 않습니다. 좋은 물을 썼다고 자랑합니다. 천연암반수니 알칼리환원수니 이런 드립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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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링크)


분명히 말하건데 저 링크는 지금 물 가지고 싸우는 겁니다. 원료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게 아니에요. 원료의 품질로 경쟁하자니 뻘쭘하여 물 가지고 서로 디스질 하는 겁니다. 물론 좋은 술을 만드는 데 좋은 물이 있으면 좋죠. 하지만 것보다 좋은 재료 쓰는 게 품질향상에 훨 도움 됩니다. 근데 말했다시피 좋은 타카오피 썼다고 자랑할 수는 없잖아요. 아직도 소주 광고할 때 좋은 물 썼다고 자랑을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자랑할 게 물 밖에 없어서 그런 거에요.


소설 뉴로맨서를 보면 스티로폼을 채운 쿠션에서 잠을 자고 진짜 새우로 만든 새우버거가 아니라 크릴새우로 만든 새우버거로 배를 채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진짜가 사라지고 가짜를 진짜처럼 소비하는 세상을 묘사하는 장치였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60년대에 이런 사이버 펑크한 트렌드가 생겨난 거에요. 진짜 소주를 모방한 가짜 소주를 진짜 소주인냥 마시고 있던 거죠. 놀랍게도, 뽕짝에는 익숙해도 펑크에는 낯설 줄 알았던 우리는 그 가짜를 이제 진짜라고 부르고 있네요.


말 하나마나 희석식 소주를 소주라고 부르는 것도 옳지 않아요. 게다가 희석식 소주는 취하기 위한 목적에만 충실한 술이에요. 취하는 데 너무 저렴한 비용이 들고 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습니다. 소주 한 잔의 낭만이란 게 있긴 하겠지만 그걸 막걸리나 맥주로 바꾸면 낭만은 더 오래 지속 될 겁니다. 취하는 데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희석식 소주에 마케팅이 더해지고 감성이 붙으며 우리는 이 가짜에 불순하기까지 한 술에 관대해지는 것 같아요. 개인의 취향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이런 상황이 늘 불쾌했어요. 귀향한 러샤 병사가 보드카로 몰락하는 광경을 보는 것만 같아 불쾌했어요.






피같은내술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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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토우 사쿠라를 좋아하지만

달빠는 아니라구요!